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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4차 산업 혁명과 그리스도인: 4차 산업 혁명과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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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9-22 ㅣ No.1591

[4차 산업 혁명과 그리스도인] 4차 산업 혁명과 신앙

 

 

세상에는 많은 종류의 학문이 존재한다. 그중에서 특별히 이성적인 추론과 보편적이고 논리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세상과 자연의 이치를 따지고 탐구하는 학문을 과학이라 부른다. 자연을 그 대상으로 탐구하는 수학과 물리학, 화학, 생명 과학 등의 자연 과학은 오늘날 우리 삶에 더욱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하지만 과학의 이성적 추론 방식은 눈에 보이지 않고 관찰할 수 없는 여러 가지 것들, 특히 신을 비롯하여 천사, 영혼 등의 영적 실체와 신앙의 전통적 가르침에 의문을 제시하면서 점차 신앙과 멀어지는 양상을 보인다.

 

 

과학이 모든 것에 답할 수 있을까

 

무신론 과학자로 잘 알려진 영국의 리처드 도킨스는 자신의 저서 「만들어진 신」에서 “지능이나 교육 수준이 높을수록 신앙적이거나 어떤 신앙을 지닐 가능성이 적다.”고 언급하며 신앙을 가진 과학자들을 덜떨어진 존재로 비하하고 있다.

 

하지만 한편에선 다음의 질문이 언급되고 있다. “과학은 과연 이 세상의 모든 사실을 정확히 다 설명해 줄 수 있는가? 그리고 과학 시대, 이른바 ‘4차 산업 혁명 시대’라고 부르는 이 시대에 과연 신앙이라는 것은 의미가 있는 것일까?”

 

과학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설명해 줄 수 있다는 것도 실은 인간의 ‘신념’에 해당한다. 이런 신념을 우리는 ‘과학만능주의’(scientism)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과학은 정말 이 세상의 모든 질문에 답해 주고 있을까?

 

물리학에서 위대한 법칙으로 손꼽는 ‘뉴턴의 중력 법칙’이 있다. 흔히 ‘만유인력의 법칙’이라고도 부르는 그 내용은 이렇다. “질량을 가진 두 물체가 있을 때 그 두 물체는 서로 떨어진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게 서로 잡아당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두 물체가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게 잡아당긴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하필 제곱인가? 중력 법칙에 왜 반드시 ‘제곱’이 들어가야 하는가? 뉴턴도 이 ‘제곱’이라는 수를 증명하는 데에 많은 노력을 할애했다. 하지만 그 이유를 뉴턴 본인을 포함하여 이 세상의 어떤 물리학자도 설명을 못하고 있다.

 

그런데 이 ‘제곱’이라는 숫자 ‘2’가 대단히 중요하다. 만일 뉴턴의 중력 법칙이 “질량을 가진 두 물체가 있을 때 그 두 물체가 서로 떨어진 거리의 제곱이 아닌 2.0000000001제곱, 또는 1.999999999제곱에 반비례하게 서로 잡아당긴다.”고 한다면 우리 태양계를 비롯한 이 우주의 모든 은하계가 멀리 흩어지면서 와해되거나, 모든 별과 행성이 서로 부딪치면서 조만간에 다 붕괴되어 버린다.

 

이 우주가 정확하게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게 서로 잡아당기고 있다. 그래서 지금까지 우주가 이런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왜 정확히 ‘제곱’인지에 대해서 아무도 설명하지 못한다. 단지 물리학자들은 “경험적으로 제곱이더라.” 또는 “제곱이 아니면 안 되더라.”라는 정도까지만 설명할 뿐이다.

 

물리학에서 매우 중요한 또 하나의 법칙으로 ‘쿨롱 법칙’이 있다. 이것은 “두 전하가 있을 때 그 두 전하는 서로 떨어진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게 서로 잡아당기거나 서로 밀어낸다.”는 것이다. 여기서도 왜 정확히 ‘제곱’인지에 대해 어떤 물리학자도 설명을 못하고 있다.

 

 

과학이 답할 수 없는 것들

 

물리학은 “이 세상에 시간과 공간이 있고, 모든 물질은 질량과 전하가 있다.”는 것을 기본 전제로 하여, 그 전제 위에서 모든 자연 현상을 설명하려는 학문이다. 물리학에서 이 전제는 수학에서 말하는 ‘공리’(axiom)와 같은 것이다. 그래서 시간과 공간의 존재, 질량과 전하의 존재는 물리학이라는 학문의 전제인 것이지, 이것이 왜 존재하는지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은 물리학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물리학은 이 세상의 많은 자연 현상을 설명해 주는 위대한 학문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그러한 현상들이 이 자연에 ‘왜 존재하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해 주지 못한다. 다만 그러한 경험적 현상들을 최대한 간단한 개념과 이론과 모델을 통해 기술하는(describe)법을 우리에게 알려 주는 학문이 물리학이다.

 

아인슈타인의 최대의 업적이라 할 수 있는 일반 상대성 이론은 “아주 무거운 질량을 가진 물체가 존재하면 그 물체 주위에 시공간이 휘어진다.”고 설명한다. 그래서 이 이론은 태양 주위에서 빛이 휘어지는 현상을 가장 간단하면서도 현상적으로 정확하게 설명해 주는 위대한 이론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도 질량이 시공간을 휘어지게 만드는 방식은 잘 기술하면서도, 그 근본적인 이유까지는 설명해 주지 않는다. 과학은 어떤 현상들을 최대한 간단하고 엄밀하게 기술하는 학문이지, 그 현상들이 왜 일어나야만 하는지, 왜 존재해야만 하는지를 설명해 주는 학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연 과학은 철학에서 말하는 ‘인식론’의 영역은 받아들이지만, ‘존재론’의 영역은 포함하지 못한다. 그것이 왜 존재하는지를 아직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수학을 제외한 다른 모든 자연 과학은 기본적으로 ‘귀납법’에 기반한 학문이다. 그래서 아무도 예상치 못한 새로운 자연 현상이 발견되면 이전의 개념과 이론, 모델은 즉각 폐기되고 만다.

 

이것은 이 분야에 종사하는 이들에게는 도전하려는 큰 동기를 주지만 그만큼 학문의 엄밀성과 견고성에서는 취약하다는 증거도 된다. 그래서 과학 철학에 종사하는 학자들은 자연 과학의 이러한 취약성에 대해 종종 언급하곤 한다.

 

앞에서 제기한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과학은 과연 이 세상의 모든 사실을 정확히 다 설명해 줄 수 있는가? 물론 과학주의자들은 주저함 없이 “예!”라고 답할 것이다. 하지만 이 응답 또한 그들이 가진 어떤 내적 확신에 근거한 믿음과 신념이지, 왜 그런 내적 확신을 가졌는지에 대해서는 그들도 엄밀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과학주의 또한 하나의 신앙인 것이다.

 

 

신앙의 가치와 의미

 

과학은 명확히 한계가 있는 학문이다. 무엇보다도, ‘나는 왜 이 세상에 존재하는가?’ 등의 존재론적인 질문에 명쾌하게 답하지 못한다. 나아가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나는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옳은가?’ 등의 의미론적인 질문에 대해서도 답을 주지 못한다.

 

과학은 근본적으로 보편성과 재현 가능성을 기반으로 한다. 하지만 우리가 살면서 경험하고 맞닥뜨리는 여러 질문은 시간이 지나면서 답이 달라지는 것이 태반이다. 우리는 과학 시대에 살고 있지만, 과학이 이 세상의 모든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여기서 우리는 신앙의 가치와 의미를 확인할 수 있다. 신앙은, 그 구체적 내용이 특정 종교마다 다르더라도 인간의 삶에서 드러나는 보편성은 어느 정도 갖고 있다. 예컨대 죽음에 대한 두려움, 삶의 의미에의 추구, 윤리적인 질문에 대한 답의 추구, 인간보다 더 큰 어떤 존재에 대한 동경과 경외심 등을 말이다.

 

그러면서 개개인이 지닌 고유한 삶의 질문에도 신앙은 어느 정도 답을 제시한다.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지금의 이 사건, 사고를 나는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여야 하는가?’, ‘내가 그동안 받아온 나의 고유한 상처들을 어떻게 해소하고, 또 어떻게 마음의 평화를 찾을 수 있을까?’ 등 뉴턴 역학, 상대성 이론, 양자 역학, 진화론 등이 대답할 수 없는, 능력 바깥에 있는 이러한 질문에 신앙은 나름의 답을 개별적으로 제시해 준다.

 

 

오늘날 신앙의 의미

 

지금과 같은 과학 시대, 4차 산업 혁명의 시대에 신앙은 과연 의미가 있는가? 분명히 의미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신앙은 과학이 절대 답해 주지 못하는 고유한 응답 능력을 갖고 있다. 도킨스가 신앙의 폐해들을 지적하면서 신앙은 사라져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 사람 또한 어떤 개인적 신념의 체계 아래에서 그런 주장을 하는 것이고, 그러한 신념 또한 나름의 개별적 경험들의 산물인 것이다.

 

도킨스 자신도 결국은 비과학적인, 개별성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다. 그 신념 또한 본인의 신앙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본인은 부정하지만, 그도 한 명의 신앙적 인간일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 세상의 어떤 사람도 신앙성을 탈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특정 신앙에 귀의하는 것은 각자의 몫이겠지만, 고유의 신앙성과 삶의 의미의 물음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지는 것은 우리가 인간인 이상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앙은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앞으로도 이 세상에 인간이 존재하는 한 영원히 그 고유한 의미와 가치를 갖게 될 것이다.

 

과학과 신앙은 각자 고유한 영역이 있으며, 서로 대화하며 보완해 나가야 할 대상이다. 서로 물어뜯으며 한쪽을 일방적으로 평가 절하하는 대상이 아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말처럼 과학과 신앙은 “인간이 진리를 향해 날아오르기 위한 두 날개가 되어야 할” 것이다.

 

* 김도현 바오로 - 예수회 신부. 서강대학교 물리학전공 교수로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경향잡지, 2018년 9월호, 김도현 바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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