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8일 (일)
(백) 부활 제5주일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성극ㅣ영화ㅣ예술

가톨릭 예술가 이야기: 박완서 정혜 엘리사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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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06-12 ㅣ No.75

[백형찬의 가톨릭 예술가 이야기] (23) 박완서 정혜 엘리사벳 (상)


아들 잃은 어미 박완서, 주님을 원망했지만 주님께 위로받아

 

 

박완서는 벽촌의 보수적인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었다. 6.25 전쟁 후 가장 역할을 도맡아 하며 스스로를 불행하다 여겼다. 하지만 화가 박수근을 만나며 그의 인생은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아들 잃은 어미의 통곡

 

소설가 박완서(정혜 엘리사벳, 朴婉緖, 1931-2011)는 남편을 병으로 잃고 몇 개월 후에 또 단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잃었다. 박완서는 울부짖으며 통곡했다.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는 참혹한 슬픔을 ‘참척(慘慽)’이라 한다.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슬픔이다. 참척을 당한 박완서는 하느님을 원망했다. ‘내 아들아. 이 세상에 네가 없다니 그게 정말이냐?’ 이렇게 아들을 목놓아 부르며 하느님도 너무하시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 아이를 데려간 것은 ‘하느님의 실수’라고 했다. 그렇게 실수한다면 하느님도 아니라고 하느님을 마구 원망했다.

 

그 죽은 아들은 스물다섯 살밖에 안 되었고, 튼튼한 몸과 잘생긴 얼굴을 가진 앞날이 무척이나 촉망되는 젊은 의사였다. 이토록 소중한 아들을 잃은 박완서는 ‘하느님의 장난’을 피눈물을 흘리며 원망하고 또 원망했다. 그러면서 하느님께 대들었다. ‘당신의 장난이 인간에겐 얼마나 무서운 운명의 손길이 된다는 걸 왜 모르십니까?’라고 따지며 ‘당신의 거룩한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을 이렇게 막 가지고 장난을 쳐도 되는 겁니까?’라며 마구 대들었다.

 

그 아들은 최고 명문대 의과대학에서 인턴 과정을 마치고 전문의를 선택할 때 남들이 가기를 주저하는 마취과를 선택했다. 박완서는 이를 못마땅해 왜 하필 마취과냐고 물었다. 아들은 마취과 의사는 주로 수술실에서 의식이 없는 환자들과 마주하는데 수술이 무사히 끝나고 의식이 돌아오면 할 일이 없어지는 의사이며, 환자도 환자 가족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의사이므로 그 쓸쓸함에 마음이 끌려 마취과를 선택했다고 대답했다.

 

이렇게 어질고 똑똑한 아들을 잃은 박완서는 예수님이 매달려 있는 십자고상(十字苦像)을 원망의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예수님은 실컷 욕하고 원망하라는 표정 같았다. 그런데 예수님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무척 슬퍼 보이고 모든 것을 다 이해하고 계시는 것 같았다.

 

그 후 박완서는 이해인 수녀가 있는 부산의 수녀원으로 내려갔다. 바다가 보이는 그곳에서 생활하며 마음을 다스렸다. 그곳에서 참척의 깊은 슬픔을 조금씩 이겨낼 수 있었다. 그리하여 다시 글을 쓰게 되었다. 이젠 아들이 없는 세상도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박완서는 이렇게 고백했다. “주님, 저에게 다시 이 세상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박완서가 자식을 잃고 쓴 글 ‘한 말씀만 하소서’는 자식을 잃은 어미의 통곡을 기록한 것이다. 박완서의 말대로 ‘통곡을 고스란히 참기가 너무 힘들어 통곡 대신 미친 듯이 끄적거린 게’ 이 글이다.

 

- 박완서 가족의 식사 모습. 사진 오른쪽이 단 하나밖에 없는 아들 원태씨다.

 

 

어머니의 교육열

 

박완서가 태어난 곳은 개성에서 조금 떨어진 개풍군 벽촌이었다. 채 스무 가구도 되지 않는 작은 마을이었다. 조상들이 200년에 걸쳐 대대로 살아온 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곳의 자식 교육은 보수적이었다. 아들은 서당에 보내 한문을 배우게 하고 딸은 집에서 한글을 가르쳤다. 박완서는 그런 보수적인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소학교(현재의 초등학교)는 서울에서 다녔다. 이것은 어머니의 끈질긴 고집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일찍 남편을 병으로 잃었다. 도시의 신식 병원에만 갔어도 고칠 수 있는 병이었는데 시골의 무지로 남편이 죽었다.

 

그래서 그 무지한 시골이 싫어 무작정 서울로 떠났다. 친척들의 비난이 쏟아졌다. 그러나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서울 변두리에서 어려운 생활을 시작했다. 어머니는 바느질로 자식들을 키웠다. 그 후, 어머니의 뜻대로 박완서는 좋은 학교에 진학했고, 오빠는 좋은 곳에 취직됐다. 집도 버젓한 곳으로 이사했다. 어머니는 고향에서 못된 며느리 대신에 ‘잘난 며느리’로 불렸다.

 

박완서는 숙명여고를 나와 서울대 국문과에 입학했다. 그런데 그해 6·25 전쟁이 나고 집안이 몰락해 어린 조카들과 노모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 되었다. 학교를 중퇴하고 돈 벌 자리를 찾아야 했다. 서울대 학생이었기에 남들보다 쉽게 미군 부대에 취업할 수 있었다. 미8군 PX(전문매점) 초상화부에서 일했다. PX는 지금의 서울 신세계백화점 자리에 있었다. 그곳에는 가난한 화가들이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전쟁 전에 극장 간판을 그리던 사람들이었다.

 

 

화가 박수근과 인연

 

그곳에서 박수근이 일하고 있었다. 박완서는 그들을 얕잡아 보고 함부로 대했다. 박완서가 하는 일은 초상화 주문을 맡아오는 일이었다.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찾아오는 미군은 없었다. 그 일이 너무 힘들어 매일 그만두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느 날, 박수근이 화집을 끼고 출근했다. 박완서는 속으로 비웃었다. 박수근은 화집을 펴들고 박완서에게 왔다. 그러고는 어떤 그림을 가리키면서 자신이 그린 것이라고 했다. 촌부(村婦)가 절구질하는 모습인데 ‘조선미술전람회(鮮展)’에서 입선한 작품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박완서는 놀랐고, 부끄러웠고, 기뻤다. 놀란 것은 초상화 그리는 사람 중에 진짜 화가가 있다는 것이고, 부끄러운 것은 그것도 모르고 함부로 대한 것이며, 기쁜 것은 착하고 맑은 화가 한 사람을 알게 된 것이었다. 박완서는 이 일을 계기로 불행한 생각만 하며 살아오던 자신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그 후, 박완서는 결혼해 PX 생활을 청산했다. 그러나 박수근은 PX에서 계속 초상화를 그렸다. 박수근은 점차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생활은 여전히 어려웠다. 백내장으로 고생하다가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박수근의 유작전(遺作展) 소식을 신문에서 보았다. 박완서는 마음을 먹고 그 전시회에 갔다. 많은 작품 중에 유독 ‘나무와 여인’이라는 작품에 사로잡혀 오랫동안 그 앞에 서 있었다. 그때의 감동을 소설로 쓴 것이 바로 「나목(裸木)」이다. 박완서는 「나목」으로 마흔, 불혹의 나이에 한국 문학계에 축복과 같이 등단했다. 그러곤 한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박완서의 대표 작품으로는 「휘청거리는 오후」,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그 산이 정말 거기에 있었을까」,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 「한 말씀만 하소서」를 들 수 있다.

 

- 성라자로 마을에서 박완서와 이해인 수녀.

 

 

가톨릭 장례에 감동 받다

 

박완서가 종교를 갖겠다고 생각한 것은 시어머니의 장례를 치르고 난 후였다. 시어머니를 26년 넘게 모시고 살았다. 박완서가 낳은 자식은 딸 넷과 아들 하나였다. 시어머니는 그 아이들을 모두 업어 길렀다. 시어머니는 새로운 생명을 기쁜 마음으로 맞이했고 손주들을 기르는 데도 온갖 정성을 다했다. 그런 시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것이었다. 종교가 없던 시어머니였기에 장례는 장의사에게 맡겼다. 박완서는 정성을 다해 시어머니를 하늘나라로 보내드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 장의사의 장례 예절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그래서 가슴이 무척이나 아팠다. 자신은 죽어서 그런 장례 의식을 치르지 않겠다고 굳게 결심했다.

 

박완서가 본 장례 예식 중에 가장 감동적인 예식은 가톨릭 장례였다. 자신도 죽으면 저렇게 대접받고 싶었다. 가톨릭 장례 미사는 죽은 사람이 귀하건 천하건, 부자건 가난하건 구별하지 않고 극진하게 대접했다. 또한 고인을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절망감보다는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감을 안겨주었다. 박완서는 가톨릭 장례 미사를 보면서 죽은 사람이 산 사람에게 ‘슬픔이 있는 기쁨’을 선물해 주는 예식이라 생각했다. 이렇듯 박완서가 가톨릭 신자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가톨릭 장례 미사 때문이었다.

 

이와 함께 성경 말씀도 너무 좋았다. 성경 말씀은 박완서에게 많은 사랑을 베풀어준 할아버지의 말씀처럼 푸근하게 와 닿았다. 예수님이 비유하여 말씀하시는 것도 할아버지 말씀과 비슷했다. 할아버지는 무조건 혼내고 훈계하는 것이 아니라 재밌는 이야기를 통해 잘못한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특히 루카복음의 마르타와 마리아에 대한 말씀을 들으면 마치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이야기로 착각할 정도였다. [가톨릭평화신문, 2023년 6월 11일, 백형찬(라이문도, 전 서울예대 교수)]

 

 

[백형찬의 가톨릭 예술가 이야기] (24) 박완서 정혜 엘리사벳 (하)


주님, 진실하고 따뜻했던 어머니가 하늘에서 더 행복하게 하소서

 

 

성탄 자정 미사, 기쁨과 감동 솟아올라

 

박완서가 가톨릭 신앙을 갖기로 결심한 후부터 세례받을 때까지 몇 년 걸렸다. 이유는 동네에 성당도 없었고 성당으로 인도하는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주일에 명동대성당에 가보긴 했으나 신앙과 연결되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잠실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그곳 아파트 단지 내에 성당이 있었다. 그해 성탄절이었다. 텔레비전에 성탄절을 맞은 명동대성당의 모습이 나왔다. 갑자기 성당에 가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남편과 함께 아파트에 있는 성당으로 갔다. 상가 4층에 자리 잡은 성당이었다. 신자들도 너무 많아 복도와 계단까지 꽉 찼다. 무질서했다. 그런데 미사가 시작되자 질서가 잡히며 고요하고 경건한 분위기로 바뀌었다. 거의 세 시간 동안 성탄 자정 미사를 봉헌했다. 구유 경배 예절까지 하고 나왔다. 밖은 무척이나 추웠다. 그러나 마음속에서는 뜨거운 기쁨과 감동이 용솟음쳤다. 그 후, 같은 단지에 사는 교우의 권유로 교리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고 세례를 받았다. 어떤 사람이 박완서에게 종교에 너무 깊이 빠지면 소설을 못 쓴다고 말했다. 그러나 박완서는 ‘생명력 있는 말에는 힘이 있다’는 것을 믿고 있었고, ‘문학과 종교는 서로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잘 통할 수 있는 사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요한 복음서 가장 좋아해

 

박완서가 신약 성경을 처음 통독한 것은 마흔을 바라볼 때였다. 성경 통독은 종교적인 갈망보다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지식을 쌓으려고 시작했다. 박완서는 복음서 중에 요한 복음서를 가장 좋아했다. 왜냐하면 요한 복음서는 서술이 특이하고 힘이 있고, 예수님을 보는 시각이 다른 복음서와 다르기 때문이었다. 요한 복음서의 저자는 예수님의 고결함과 아름다움 그리고 용기를 섬세하게 보여주었다. 그래서 박완서는 복음을 읽을 때마다 깊은 감동을 받았다. 특히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과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은 놀랍고도 황홀했다. 또한 박완서가 가장 좋아한 예수님 말씀은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였다. 그 말씀은 ‘예수님과의 첫사랑’이었으며 ‘예수님께 통하는 관문’이었다. 그리고 또 좋아한 성경 말씀은 예수님이 사람들을 신분에 상관없이 식탁에 초대했다는 말씀이었다. 초대받은 손님은 거지, 장애인, 세리, 매춘부로 당시 소외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식사하면서 깊은 위로와 용서를 받았다. 특히 예수님을 자기 집에 초대할 생각도 감히 하지 못하고 그저 돌무화과나무 위로 올라가서 물끄러미 예수님만 바라보던 세리 자캐오에게 예수님께서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라고 하신 말씀은 참으로 깊은 감동을 주었다. 반면에 성경을 읽었을 때 이치에 맞지 않아 화가 났던 말씀도 있었다. 바로 하늘나라를 포도원 일꾼과 품삯에 비유한 마태오 복음이었다. 하루 종일 일한 일꾼, 반나절 일한 일꾼, 오후 늦게 일한 일꾼 모두에게 동일한 임금을 준 것은 화가 났다. 분명히 불공평한 일이었다. 박완서는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왜 그들은 온종일 일자리를 못 얻었고 서성거리고만 있었을까. 겉모습이 초라해 보였거나 몸이 약해 보였을 것이다. 그들은 주인 눈에 들어올 정도가 되지 못했던 것이다. 박완서는 그런 불쌍한 일꾼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눈길은 ‘따뜻하고 부드러웠다’고 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그 꼴찌 인생들에게도 똑같이 일용할 양식을 주신 것’이라 했다.

 

- 소설가 박완서씨 환갑 기념 축하식

 

 

김수환 추기경과 인연

 

박완서는 서울성모병원에 입원 중인 이해인 수녀에게 문병 갔다. 그런데 같은 병동에 김수환 추기경이 입원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가슴이 울렁거릴 정도로 꼭 뵙고 싶었다. 그러나 병이 위중해 문병을 사양한다고 하고 또한 편안한 안식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뵙기를 단념했다. 박완서는 예전에 어느 신문사 초대로 러시아 발레단의 ‘백조의 호수’를 구경하러 갔었다. 2층의 자리였다. 김 추기경도 초대받아 그곳에 앉아 있었다. 박완서는 추기경과 나란히 공연을 관람했다.

 

추기경은 제의(祭衣)가 아닌 간편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서 무척이나 가볍고 작은 분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공연이 끝나자 추기경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뜨겁게 박수쳤다. 계속해서 박수쳤다. 박완서 표현대로 ‘연예인에 열광하는 청소년’과 같았다. 박완서는 추기경의 그 순수하고 열정적인 모습에 감동했다. 그 후, 박완서는 추기경을 모시고 식사할 기회가 있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였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앞에 서 있던 추기경은 옆으로 비켜서며 박완서에게 먼저 타라고 했다. 사양하자 “레이디 퍼스트!”라고 했다. 박완서는 그런 말에 더 이상 사양하지 않고 먼저 탔다. 그러면서 추기경에게 “영 레이디가 아니어서 죄송합니다”라고 했다. 그랬더니 추기경은 “나보다 영(Young)이지요” 했다. 박완서는 추기경의 이러한 모습에서 인간적인 따뜻함과 유머를 느꼈다.

 

박완서는 추기경을 만날 때마다 어릴 적 할아버지가 연상되었다. 집안 식구들은 할아버지 곁에 앉는 것을 어려워해 가까이하지 않았다. 그러나 박완서는 할아버지의 귀여움을 받아 늘 같은 밥상에 앉았다. 추기경과 함께 식사할 때도 이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추기경이 선종했을 때 박완서는 추모하는 글을 썼다.

 

“요한 바오로 2세가 선종하시고 나서 접하게 된 그의 어록 중에 이런 것이 있었다. ‘바티칸은 지구 상에서 가장 작은 나라다. 이 작은 나라가 전쟁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제로에 가깝지만, 평화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무한대다.’ 그게 바로 가톨릭 정신이라면 김수환 추기경님이야말로 그 존재 자체가 하나의 교회였다는 걸 이제야 알겠다.”

 

- 소설가 박완서는 의정부교구 구리 토평동성당에서 신앙생활을 하다 지병으로 선종했다. 박완서씨의 장례 미사에서 조광호 신부가 고인의 관에 성수를 뿌리며 고별 예식을 주례하고 있다. 가톨릭평화신문 DB

 

 

봉사하는 마음으로

 

박완서는 서울주보에 ‘말씀의 이삭’을 3년 동안 연재했다. 그 글을 시작할 때 교만한 마음에서 쓰기 시작했다. 세례받은 지 15년이나 되는데 그동안 봉사한 적이 없었다. ‘말씀의 이삭’을 써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나도 봉사라는 거 한번 해볼까’하는 마음으로 승낙했다. 그런데 신앙 글은 글재주만으로 써지는 글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후부터는 성경을 자세히 읽고 깊이 묵상하며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렇게 3년을 했더니 비로소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기쁘고 떳떳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박완서는 노년을 경기도 구리 아치울에서 보냈다. 그곳 토평동성당에서 신앙생활을 했다. 성당 1층 작은 쉼터에 자신이 소장한 책을 기증해 본당 신자들이 볼 수 있도록 했다. 박완서는 지병인 담낭암으로 여든한 살에 세상을 떠났다. 장례 미사는 토평동성당에서 봉헌되었다. 이해인 수녀가 추모 기도를 했다.

 

“생명의 하느님/ 진실하고 따듯하고 지혜로운 모습으로 지상의 소임을 다하고/ 눈 오는 날 눈꽃처럼 깨끗하고 순결하게 한 생을 마감한 우리 어머니를/ 이 세상에 계실 때보다 더 행복하게 해 주시기를 부탁드려도 되겠지요.”

 

참고자료 : ▲ 박완서 「한 말씀만 하소서. 세계사」 2004 ▲ 박완서 「옳고도 아름다운 당신」 열림원. 2008. ▲ 박완서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현대문학. 2010 ▲ 박완서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세계사. 2020 ▲ 공선옥 외 「뒤늦게 만나 사랑하다」 생활성서. 2007 ▲ 평화신문 엮음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평화방송·평화신문. 2004 ▲ 백형찬 「나의 아름다운 벚꽃동산」 태학사. 2018 ▲ 백형찬 「예술가를 꿈꾸는 젊은이에게」 태학사. 2015. ▲ 평화신문(2011.1.30.) ‘한국 문학계 큰별 박완서 작가, 주님 곁으로’ ▲ 가톨릭신문(2011.1.30.) ‘고 박완서 작가 삶과 신앙’ ▲ 오광수. 「박수근」 시공사. 2002

 

[가톨릭평화신문, 2023년 6월 18일, 백형찬(라이문도, 전 서울예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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