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8일 (토)
(백) 부활 제7주간 토요일 이 제자가 이 일들을 기록한 사람이다. 그의 증언은 참되다.

종교철학ㅣ사상

종이책 읽기: 지금, 이 순간을 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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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01-16 ㅣ No.87

[김계선 수녀의 종이책 읽기] 지금, 이 순간을 살며


“한때 저는 금으로 된 성반과 성작으로 미사를 봉헌하였으나,
이제 당신의 성혈은 제 손바닥에 놓여 있습니다.
한때 저는 대회와 회의를 위해 세계 각지를 여행하곤 했으나,
이제 저는 창문도 없는 좁은 감방에 갇혀 있습니다.
한때 저는 감실에 모신 당신을 조배하곤 했습니다만,
이제 저는 당신을 제 호주머니 속에 밤낮으로 지니고 다닙니다.
한때 저는 수천 명의 신자들 앞에서 미사를 봉헌하곤 했습니다만,
이제 밤의 암흑 속에서 모기장 밑으로 성체를 전하고 있습니다.
매트 위에서 흰 버섯이 자라는 이 감방, 여기에서 저는 행복합니다.
왜냐하면 당신께서 저와 함께 계시고 당신께서는
제가 이곳에서 당신과 함께 생활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일생 동안 많은 말을 했습니다.
이제 저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 이제는 당신께서 제게 말씀하실 차례입니다.”


감동적인 이 글은 베트남의 바오로 사도라고 일컫는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우엔 반 투안 추기경의 책 《지금, 이 순간을 살며》에 나오는 글이다. 2007년부터 시복청원에 들어간 반 투안 추기경의 삶은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자신이 만난 모든 사람에게 희망을 전한 인물’로 선정한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말씀에 잘 드러나 있다.

우리는 현대의 영성가로 복자 야고보 알베리오네, 토마스 머튼, 헨리 나웬 등을 꼽고 있다. 그런데 여기 아시아인으로서 현대의 영성가로 불리는 인물이 있으니 그가 바로 반 투안 추기경이다. 그런데 그의 영성에는 좀 특별한 점이 있다. 이를테면 감옥으로부터 온 희망의 빛이랄까? 이 책을 통해 그의 희망의 영성의 실마리를 잡을 수 있다. 언론들은 그가 겪은 감옥살이에서 좀 더 선정적이고 이데올로기에 부합한 정치고발과 복수를 끌어내길 유도했지만 그는 한결같이 평온한 목소리로 희망의 문턱으로 초대한다.

이 책은 요한복음의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바탕으로 구성되었다. 소년이 가진 것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에 불과하였지만 그것은 그가 가진 ‘전부’였으며 ‘예수님의 사랑의 도구’가 되도록 바쳐진 것이었기에 그도 이러한 사랑의 도구가 되길 기도하며 그가 체험한 것들을 대비시킨다. 그리고 아울러 그가 느꼈던 여러 가지 착잡한 생각, 비애, 버림받음 그리고 탈진 등을 담담하게 고백하면서 아주 중요한 두 가지 아니, 그 이상의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

첫 번째는 ‘나는 기다리지 않으리라. 현재의 순간을 사랑으로 가득 채우면서 살아보리라.’고. 흔히 많은 사람들은 때를 기다리라고 말한다. 특히 감옥에 갇힌 사람에게는 풀려날 날을 학수고대하며 기다리는 것이 일일 것이다. 그런데 그는 풀려날 미래의 일이 아닌, 지금 이 순간 현재의 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어떻게?

그는 사목자답게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자신의 교구민들에게 어떻게 희망을 전할까 고심하는데 예수님의 빛을 받아서 옥중 서간의 대선배이자 가장 많이 읽히는 옥중 서간의 대표자인 성 바오로 사도처럼 편지를 쓰게 된다. 쿠앙이라는 소년의 어머니가 사다준 묵은 달력 뭉치에 글을 써서 주면 그의 형과 누나들이 베껴서 사람들에게 보내곤 했는데 이 작은 쪽지가 한국말을 비롯해서 8개 국어로 출판되었으며 전 세계 수백만의 사람들에 삶의 희망에 대해 감동을 안겨 주었다.

두 번째는 ‘하느님의 일이 아닌 하느님을 택하라’이다. 세속적으로 말하면 잘 나가던 나트랑 교구의 주교, 많은 업적을 이루고 사목에도 성공을 거둔 그에게, 정신이상 직전의 상태에서 절대적인 공허, 관절염에 걸리지 않기 위해 아침부터 밤 9시 반까지 걷기를 계속해야 했던 9년간의 독방 생활, 정신적인 고문과 무기력한 상태는 참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하느님의 일이 아닌 하느님을 선택할 수 있었을까?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그를 재촉하는 음성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너는 어찌하여 네 자신을 그렇게 괴롭히고 있느냐? 너는 하느님과 하느님의 일을 식별해야 한다. 네가 해온 모든 일과 계속해서 행하기를 원하는 모든 것들, 사목 방문, 비그리스도교인을 복음화하기 위한 사명`…` 이 모든 것들은 훌륭한 일이고 하느님의 일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하느님은 아닌 것이다! 만일 하느님께서 네가 이 모든 일들을 그분의 손에 맡기고 포기하기를 원하신다면 즉시 그렇게 행하고 그분을 신뢰하여라. 네가 택한 것은 하느님일 뿐이지 그분의 일은 아니다!”

이밖에도 기도에 대한 그의 간절한 체험은 기도가 이렇게 쉽고도 감동적이고도 현실적이면서도 영적인 것이구나 하는 깨달음을 준다. 그는 그 작은 독방에서 했던 모든 기도의 순간들, 성경의 짧은 말씀으로 하는 기도들이 서로 연결되어 기도의 삶을 살게 해주고 그러면서 예수님과의 깊은 일치와 사랑의 손짓, 표정, 친밀한 언어가 되는 순간들, 그 순간과 자신을 분리시키지 않으면서도 성화로 이끄는 변함없는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체험으로 녹여낸다.

특히 감옥에서의 미사는 감동을 넘어 경이로움과 성체성사에 대한 존경과 사랑으로 이끌어준다. 위장약으로 들여온 포도주, 빈 손전등 속에 넣어 보내준 제병으로 그는 손바닥을 제구삼아 포도주 세 방울과 물 한 방울을 놓고 그가 아는 모든 언어를 동원해 창미사를 봉헌한다. 그는 이 미사를 세상에서, 그의 생애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사였다고 한다. 그리고 성체를 담뱃갑에 넣어 가슴에 품고 수시로 성체조배를 하는 장면도 성체를 매일 모시고 너무도 가까이서 조배할 수 있는 우리의 마음자세를 돌아보게 한다.

그의 감옥에서의 놀라운 사랑의 삶은 간수들까지 변화시켜서 그를 감시하는 간수의 수를 제한하기도 했으니 모든 간수가 감화될까 두려운 까닭이었다. 가톨릭을 견제하고 감시하기 위해 교리 용어를 배우고 라틴어와 불어와 영어를 배우길 청하는 간수들에게 기꺼이 가르쳐주기도 하였는데 간수들은 라틴어 노래를 통해 쉽게 배우길 원했다. 그들이 여러 노래 중에서 “임하소서, 성령이여”를 선택했는데 이 성령송가를 부르며 계단을 오르내리는 간수들을 보면서 가슴 벅찬 감동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톨스토이를 비롯하여 많은 현인들이 현재,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중요한 시간이라고 말했다. 이 책은 ‘지금 이 순간’을 가장 아름답게 사는 비결을 발견할 수 있게 해주는 작지만 큰 책이다. 이 책은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 중에 이 책을 보고 극복할 수 있었다고, 미지근한 신앙을 깊게 뜨겁게 해주었다고, 그리고 살아가면서 가장 감동 깊게 읽은 책이었다고 고백하게 한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큰 기적을 이루신 예수님을 통해 그의 백성에게 절망에서 일어나 기적적인 희망의 길을 걷기를 초대한다. 새해에는 우리도 매일을, 지금 이 순간을 사랑으로 채우며 살기를, 하느님의 일이 아닌 하느님을 선택하기를 희망한다.

[월간빛, 2012년 1월호, 
김계선(에반젤리나 · 성바오로딸수도회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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