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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61: 루돌프 슈나켄부르크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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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10-07 ㅣ No.419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 (61) 루돌프 슈나켄부르크 (상)

개신교 학자 주류 속에서 빛난 가톨릭 성경학자



루돌프 슈나켄부르크.


20세기 성서학은

20세기 성서학자를 이야기하자면 루돌프 슈나켄부르크(Rudolf Schnackenburg, 1914~2002)로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시간적으로 20세기 초반에 태어난 인물이기도 하지만, 성경학계에서 그가 차지하는 비중에서도 역시 그렇다. 성경을 공부하지 않은 이들에겐 루돌프 슈나켄부르크는 조금 낯선 이름일지도 모른다.

슈나켄부르크를 이야기하자면 당시 분위기를 아는 것이 조금 도움이 될 듯하다. 인문학이 발달하면서 18세기부터 성경 연구에 비평적인 방법론들이 적용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세기와 20세기를 거치면서 ‘역사비평 방법론’이 성경 연구의 가장 중요한 화두로 자리 잡게 된다.

역사비평 방법론은 간단히 말하자면 성경이 어떤 과정을 통해 생성되었는지 당시의 역사적인 상황을 고려해서 연구하는 것을 일컫는다. 물론 지금 모든 이들이 이 방법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현대적인 성경 연구의 기반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이 방법론은 여전히 의미가 있다.

사실 이러한 방법론을 처음 주창하고 발전시켰던 것은 독일의 개신교 신학자들이었다. 종교개혁 이후 오직 성경을 통해 하느님 계시와 진리에 다가가고자 했던 노력의 결과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이처럼 개신교 신학자들이 성경 연구를 주도했던 시기에, 사제로서 그리고 성서학자로서 가톨릭 신학을 성경학계에 알리고 그것을 이끌었던 인물이 바로 슈나켄부르크다. 그에 대한 관심은 전임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저서인 「나자렛 예수」를 통해 더욱 부각됐다. 교황은 저서에서 슈나켄부르크에 대해 “20세기 후반 독일어권의 성경학계에서 가장 출중한 학자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슈나켄부르크 발자취 - 혼란한 시기의 삶

루돌프 슈나켄부르크는 1914년 1월 5일 실레시아 지방 카토비츠에서 태어났다. 실레시아는 지금은 폴란드에 속하지만 당시 이 지역의 일부는 독일 영토였다. 산악 기술자(산에 마을을 건설하거나 필요한 건물 혹은 장치를 설치하는)였던 아버지의 직업 때문에 실레시아의 동쪽 산악 지역에서 살았다. 그의 아버지는 1914년 전쟁에서 사망한다. 이후 어머니와 형과 함께 리그니츠(Liegnitz)라는 도시로 옮겨 살았는데 경제적인 면에서 아주 넉넉한 생활을 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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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 개신교 주석서 시리즈 중 슈나켄부르크가 쓴 에페소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주석서.


슈나켄부르크는 최고 성적으로 고등학교(Gymnasium)에 입학했고 두 반이나 월반해 졸업할 정도로 어려서부터 학업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졸업 이후 슈나켄부르크는 브레슬라우대학에서 철학과 신학 공부를 시작했다. 당시 꽤 많은 학생이 이 대학의 신학과에서 공부하기를 원했는데, 당시 이 학교에는 좋은 교수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신약을 가르치던 프리드리히 빌헬름 마이어(Friedrich Wilhelm Maier, 1883~1957) 교수의 강의는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그는 언어학적 방법론과 역사비평 방법론을 통해 성경을 해석했고 덧붙여 신학적인 정리를 해줬다고 함께 공부했던 이들은 전한다. 슈나켄부르크 역시 마이어 교수에게 논문 지도를 받았다. 그리고 1937년 ‘요한복음 안에서의 믿음’이란 제목의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논문 제목에서도 볼 수 있는 것처럼 슈나켄부르크는 이미 요한복음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논문은 이후 요한복음 주석서를 펴내는 데 큰 역할을 한다. 박사 과정을 마치던 해에 브레슬라우에서 사제로 수품한 슈나켄부르크는 1946년까지 본당 사제로 일했다. 그는 본당에서 일할 때 무엇보다 젊은이들에게 많은 관심과 열정을 가졌다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독일어를 사용하던 브레슬라우대학은 폴란드로 넘어가고 교수들은 독일로 추방되었다. 이때에 슈나켄부르크 역시 독일 뮌헨으로 추방당하고 1947년 마이어 교수에게 교수자격논문(Habilitation)을 마쳤다. 그의 논문 제목은 ‘바오로의 성사적 구원 사건’(Sakramentale Heilsgeschehen bei der Taufe nach dem Apostel Paulus)으로 1950년 「사도 바오로의 세례에서 보이는 구원 사건」이란 제목의 책으로 출간됐다. 본격적으로 학자의 길을 시작한 슈나켄부르크는 1952년 딜링엔에 있는 철학-신학대학 부교수로 임명됐고, 3년 뒤인 1955년 밤베르그의 철학-신학대학의 교수로 임명됐다. 밤베르그의 철학-신학대학이 지금은 남아 있지 않지만, 당시 바이에른 주에 새로 생겨나는 대학들의 근간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가톨릭 성서학자와 개신교 학자들의 공동작업으로 번역된 독일의 공동번역성경. 슈나켄부르크도 이 번역 작업에 참여했다.


1957년 그는 뷔르츠부르그대학 교수로 임명됐고 1982년 은퇴할 때까지 이 대학에서 가르치고 연구했다. 이곳을 근거지로 그의 동료들과 제자들은 ‘뷔르츠부르그 학파’(Wrzburg-Schule)를 형성했다. 이때가 가톨릭 신학 안에서 성경 해석과 신학이 꽃피던 시기였다. 당시 수많은 학생이 그를 찾아와 강의를 들었고, 많은 이들이 그에게 박사 논문을 썼다는 것에서 젊은이들에게 새로운 신학의 방향과 성경에 대한 관심을 고취시켰다는 사실도 간과할 수 없다.

그는 뷔르츠부르그대학에 많은 애정과 열정을 보였다. 그가 이 도시를 떠나고 싶어 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뮌스터와 뮌헨대학에서 제의한 교수직을 두 번이나 거절했다는 일화를 통해서도 잘 알려져 있다. 또한 은퇴 이후의 삶을 통해서는 학자로서의 애정과 열정을 엿볼 수 있다. 은퇴 이후 슈나켄부르크는 여전히 뷔르츠부르그에 머물면서 연구와 집필 활동을 계속했으며, 2002년 8월 28일 89세로 하느님의 부름을 받아 뷔르츠부르그 시내 묘지에 묻혔다.


슈나켄부르크의 활동

슈나켄부르크에 대해 가장 먼저 언급할 수 있는 것은 독일 「공동번역 성경」(Einheitsbersetzung)의 번역 작업이다. 1962년에 시작해 1980년에 완성된 이 성경은 가톨릭 성서학자들과 개신교 학자들의 공동 작업으로 번역된 것으로 지금도 독일어권 가톨릭 전례 안에서 공식적인 성경으로 사용되고 있다.

어느 나라에서나 모국어로 된 성경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 말 자체로 이미 성경에 대한 주석과 해석을 통해 번역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신학적인 의미가 가장 잘 담긴 성경의 번역은 모든 성서학자의 최종 목표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슈나켄부르크 역시 성경을 번역하는 과정에 참여하고 또 그 열매를 맺었다는 것은 그에게 있어 중요한 업적이라 할 수 있다.

성경 번역 작업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슈나켄부르크의 발자취 중 가장 먼저 이야기할 필요가 있는 것은 가톨릭와 개신교 사이의 공동 작업이다. 그는 신약성경 연구를 위해 개신교 학자들과 함께 학문적인 바탕을 마련하고자 했다. 이러한 결실로 이뤄진 것이 독일어권에서 출판됐고, 지금까지도 가장 자세하고 풍부한 내용이 담긴 주석서로 인정받는 「가톨릭-개신교 주석서」(EKK: Evangelisch-Katholischer Kommentar)다. 이러한 작업을 가장 먼저 계획한 것은 스위스의 에두아르트 슈바이처(Eduard Schweizer)였다. 그는 슈나켄부르크에게 자신의 계획을 제안했고 두 학자의 주도로 이 주석서 시리즈가 출판되기 시작했다.

슈나켄부르크는 가장 먼저 이 시리즈에 에페소서에 대한 주석서를 썼고, 이 주석서는 많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에페소서에 대한 주요한 참고 서적으로 꼽힌다. 그리스도교 일치(가톨릭과 개신교)라는 측면에서 찾을 수 있는 또 하나의 업적은 ‘신약성경 연구학회’(Studiorum Novi Testamenti Societas) 활동이다. 그는 1966~67년에 가톨릭에서는 두 번째로 이 학회 회장을 맡았으며, 당시 개신교의 학자들이 주를 이루던 상황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가톨릭 성경학계를 소개하고, 업적을 알리는 계기를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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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규 신부(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 1999년 사제수품(서울대교구) △ 2012년 독일 뮌헨대학 박사(성서신학)

[평화신문, 2014년 10월 5일, 허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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