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1일 (토)
(백) 부활 제6주간 토요일 아버지께서는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믿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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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복음으로 세상 보기: 주변부로 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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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10-10 ㅣ No.1594

[복음으로 세상 보기] 주변부로 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청년들을 위한 밝고 정갈한 방이 필요합니다.

 

청년들을 위한 방은 준비되지 않았습니다. 흔히들 외국, 특히 선진국의 예를 들면서 성인만 되면 독립을 한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물론 일반화할 수 없지만 대체적으로 나이가 차면 부모의 곁을 떠나 스스로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혼자 사는 아파트를 얻던 맘에 맞는 사람끼리 함께 방을 얻어 살아가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학교를 졸업하고 취직을 하고도 부모님 곁에 꼭 붙어 청년들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나이가 들어서도 부모님과 함께 사는 사람들을 캥거루족이라고 빗대어 말합니다. 그러나 정작 독립을 해야 할 청년들이 스스로 독립을 할 처지가 되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증명 없이 그저 현상만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한마디로 방 하나 얻기에 너무 비싼 방값이 문제입니다. 특히 다니는 학교나 직장에서 가까운 곳은 터무니없는 고가입니다. 그래서 한 시간 두 시간 걸리는 통학 및 통근시간을 할애해야 합니다. 대학생 기숙사는 대부분 민자 기숙사로 바뀌어갑니다. 그만큼 기숙사비도 비쌉니다. 하숙비도 이와 비슷한 수준입니다. 그래서 집으로 향하는 청년들의 발걸음은, 특히 진학 및 취업 때문에 살던 곳을 옮길 수밖에 없는 이들의 그것은 무겁기만 합니다.

 

점점 밀려만 갑니다. 도심 외곽에 가서야 겨우 몸을 뉘일 곳을 마련할 수 있습니다. 허름한 건물 지하방이나 옥탑방이 이들에게 허락된 곳입니다. 계단을 내려가 컴컴한 지하방에 들어가면 먼저 환풍기의 스위치를 눌러야 합니다. 햇볕조차 들지 않고 환기도 되지 않기에 환풍기를 켜도 장마철이면 꽃처럼 피어나는 곰팡이와 함께 합니다. 그렇다고 아주 저렴하지도 않습니다. 월세를 낼 때가 되면 허리가 휩니다. 언제 이곳을 벗어날 수 있을까? 언제 맑고 밝은 스위트 홈을 가질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 더 참담해집니다. 도무지 그런 날이 올 것 같지 않은 불안감이 엄습해옵니다.

 

1인 청년가구가 많이 살고 있는 곳은 최저주거기준에 훨씬 못 미치는 곳입니다. 전국의 청년가구 중에 주거빈곤에 해당하는 이들은 17.6%이고 서울의 경우 30%에 이릅니다. 그렇다면 왜 이들은 최저 주거기준에 미달하는 집을 택하게 되는 것일까? 당연히 너무 비싼 방값 때문인데 이는 삶의 자리를 상품으로 규정하고 투기하는 일 때문입니다. 도무지 세입자를 돌보는 정책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일정한 재산이 없는 청년들에게 보증금은 넘을 수 없는 벽입니다. 그래서 비싼 월세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청년들을 위한 주택을 마련한다고 하지만 형편없이 부족하기만 합니다. 악순환은 계속됩니다. 소득은 늘지 않는데 월세는 올라가니 소득대비 주거비용 부담이 무거워집니다.

 

빈민사목위원회에서는 아주 작은 시도이지만 보증금과 월세의 부담이 너무 무거워 살아가기 힘든 이들에게 삶의 자리를 제공해주고 싶습니다. 지역에 있는 선교본당 중에서 이런 일이 가능한 곳에서 전셋집 하나를 구해서 몇몇 청년들과 함께 살아갈 공간을 함께 꾸미는 것입니다. 비록 화장실 부엌 등의 공동공간을 함께 사용해야 하는 불편함이 있지만 보다 저렴하게 청년들의 등을 기댈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는 것입니다. 물론 지금의 세입자 정책이 지속되는 한 어렵기만 합니다. 2년에 한 번씩 이사를 고민해야 하고 이런 조건을 갖춘 집을 찾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이 일이 교구의 모든 본당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들이 많아져서 소유하고 있는 집을 청년들에게 제공하여 이들이 자립하여 독립하는 데 조금 더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머리 둘 곳조차 없는 사람의 아들 예수님께서 금수저 흙수저 논쟁에 빠져 젊은 날의 정기를 잃지 않고 곧고 맑게 성장하도록 말입니다.

 

 

장애인들이 이웃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지역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장애인들 또한 독립적인 주거 공간이 보장되고 있지 않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장애인은 거주시설에서 평생을 살거나, 지역사회에서 높은 주거비를 부담하면서 살거나, 편의시설이 부족한 집에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까지 장애인들에 대한 최선의 복지는 안락하고 편안한 복지시설에 살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본인도 편하고 가족도 편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지역사회와 분리되어 장애인 거주시설에 거주하는 장애인은 3만 명이 넘습니다. 정신의료기관에 수용된 정신 장애인은 7만 8천명에 이릅니다.

 

그러나 비장애인이라면 살 곳이 있는데도 시설에 살기를 원하겠습니까? 당장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질문입니다. 장애인들 역시 많은 경우 탈시설을 원하고 있습니다. 가족과 이웃과 지역사회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손상되지 않는 인권을 누리고 존중받으며 살고 싶습니다. 그러나 한국의 탈시설 정책은 서울을 비롯한 몇 개 지방자치단체의 자체 사업으로 진행되며, 그 대상도 제한적입니다. 이는 장애인이 지역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살아갈 권리가 존중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실 시설에서 봉사하시는 분들의 헌신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폭력과 방임이라는 소외를 피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인권침해의 피해를 입더라도 적절한 지원을 받기도 어렵습니다. 시설 거주인은 시설 밖 지역사회가 폭력에 대응하는 원활한 구조로 보호받을 가능성이 무척이나 적습니다. 심각한 인권침해 피해가 입증되더라도 시설 거주인들은 다른 시설로 옮겨질 뿐 지역사회에 거주할 권리를 받지 못합니다. 한국 정부는 장애인 가구 대상의 주택구입자금 저리 융자, 임대주택, 주택 개조 융자 등의 주거지원 프로그램을 마련했습니다. 하지만 장애인 가구는 해당 프로그램의 대부분을 알 수가 없어 적절한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장애인의 필요에 맞는 정책을 제공하지 못하며 정작 장애인에게 필요한 정책은 예산의 부족으로 집행되지 않습니다.

 

모든 문제는 당사자로부터 해결의 실마리가 풀립니다. 환자가 아픈 곳을 가장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해결을 당사자를 제외하고 풀어나가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아프고 슬픈 사람들은 공동체와 함께 살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으로부터 치유를 받은 사람들은 일어나 다시 공동체로 돌아갑니다. 진정한 치유는 단지 병이 낫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삶의 복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장애를 갖고 사는 분들이라도 삶의 복원이 이루어진다면, 지역사회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제도가 마련되고 이분들을 받아들일 마음이 펼쳐진다면 치유된 것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살리시고 깨우시고 보게 하시고 듣게 하시는 일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되돌리는 일입니다. 참된 인간으로 살아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삶의 형태가 변하고 있습니다.

 

1인가구가 40%에 육박한다고 합니다. 위에서 언급한 청년, 비혼자, 장애인들은 많은 경우 1인가구로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 짓고 있는 신규주택의 40%는 1인가구에 맞는 집을 지어야 합니다. 하지만 당장 눈앞에 보이는 건설현장에서 혼자 살기에 적당한 규모의 집이 지어지는 것은 찾기가 어렵습니다. 필요한 것은 작지만 충분히 안정감을 가지고 살아갈 집이건만 지어지는 것은 호화롭고 커다란 규모의 집뿐입니다. 작은 집이 작은 가격에 공급될 수 있다면 작은 사람들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비가 새끼 두는 둥지를 갖는 것처럼 모든 이들이, 특히 작고 연약한 이들이 보금자리에서 삶을 누리는 세상이 되기를 기도하고 노력합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8년 10월호, 나승구 F. 하비에르 신부(서울대교구 빈민사목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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