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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부활 제7주간 토요일 이 제자가 이 일들을 기록한 사람이다. 그의 증언은 참되다.

종교철학ㅣ사상

종이책 읽기: 흑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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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02-27 ㅣ No.91

[김계선 수녀의 종이책 읽기] 흑산


김훈의《흑산》을 읽었다. 문장이 날카롭고 명료하고 짧고 그러면서도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김훈의 특유의 문체가 살아있는 책이었다. 지난해 순교자성월 즈음 김훈이 쓴 천주교 박해를 주제로 한 소설이 곧 나온다기에 꼭 읽어보고 싶었다. 여러 복잡한 현실에서 407쪽이나 되는 장편소설을 읽어낸다는 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드디어 날을 잡아서 한 나절 만에 단숨에 읽어버렸다. 현재에서 과거로 다시 현재로 다시 과거로 옮겨가면서 한 인물과 그 배경과 그 시대와 그 시대의 민초들과 얽히고설킨 인연들이 책을 놓으면 더 헝클어져 실마리를 놓치고 말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만큼 많은 등장인물들이 엮어내는 이야기들이니 인물들의 상황묘사에 들인 공도 만만치 않았겠고 정교한 심리묘사를 풀어내는 것이 그리 녹록치만은 않았을 것을 짐작하고도 남았다. 뜬금없이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이 주인공이라 여겨지는 황사영과 정약전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를 생각하다보면 연결고리의 접점이 헐겁고 매끄럽지 못한 것을 여러 번 느꼈는데 각 개인이 처한 다양한 현실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정작 서사구조가 흔들리지는 않았나 싶다. 그리고 읽고 나서는 아직 끝나지 말아야 하는데 끝난 느낌이랄까, 일부러 열린 결말의 미완성을 택한 것일까 하는 아쉬움이 짙게 남았는데 아마도 이 책을 읽으면서 다산 정약용을 그린 한무숙의 소설 《만남》의 씨줄날줄이 잘 엮인 인과율과 꽤나 탄탄한 서사구조나, 순교와 배교의 상황에서 내면의 깊은 갈등과 심리적 상황을 너무도 잘 묘사한 엔도 슈사쿠의 《침묵》의 분위기를 기대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 아쉬움은 적나라하게 하느님의 자비를 표현하지 않아도, 배교자마저도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측은지심을 표현하지 않아도 이 세상에서 지난했던 영혼들이 쉴 곳이 있구나 하는 희망을 끌어내게 하는 묘한 매력으로 곧 넘어가게 한다.

이 책은 황사영과 정약전이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세상을 향해 목숨을 기꺼이 내어놓았던 사람들과 세상으로 돌아간 사람들, 그리고 그 당시의 시대상을 잘 그려놓은 역사소설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점점 쇠락해가는 나라 조선의 세기말적인 정치부패와 이에 따른 여러 가지 폐단들, 그 폐해는 고스란히 하층계급인 민초들에게 안겨지고 그들이 집을 떠나 유랑걸식을 할 수밖에 없는 단초가 된다. 극도로 가난하고 고단한 삶, 빈부는 물론 신분과 계급의 차이가 낳은 인간이하의 삶을 살아온 천민과 노복들의 생활에서 정말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는, 듣도 보도 못한 참으로 인간적인 종교인 천주교가 그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지고 목숨까지도 결연히 바치도록 하는 그 현실이 참으로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역사적으로 기득권이었던 노론의 정권유지를 위해 남인들을 몰아세우는 과정에서 화살받이가 된 천주교인들의 박해와 순교 등이 그들의 초월적인 신앙의 자세보다도 매 맞는 태형의 장면 묘사, 죽임을 당하는 장면의 묘사 등으로 더욱 현실적이면서 객관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또 정약용의 형제들과 그 가족들의 이야기와 함께 전개되지만 그동안 여러 소설에서 정약용이 주인공이었다면 이 책에서는 그의 둘째형 정약전과 조카사위 황사영이 주인공이라 하겠다. 그런데 흑산을 제목으로 뽑았다면 응당 정약전이 주인공이어야 하는데 오히려 황사영이 더 비중이 높게 다뤄진 것처럼 보인다.

어쩌면 그의 맑은 영혼에 매료된 작가의 변을 보아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고립무원 상태의 토굴에서 인간이 자기의 영성을 끝까지 지켜냈다는 것이 너무도 두렵고 놀라웠다.”고 말하는 작가처럼 황사영이 처음 학문에 정진하면서 정약전으로부터 천주교의 교리를 받아들일 때부터 죽기까지 일관된 자세로 자신이 믿는 종교를 삶으로 살아내는 모습에서 감명을 받지 않을 수 없었고 비록 소설이지만 황사영 알렉시오의 모습에서 참된 신앙인의 희망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새로운 수확이었다. 그런데 왜 자꾸 정약전이 마음에서 사라지지 않고 투명한 바다의 물고기들처럼 살아 움직이는 것일까?

흑산은 정약전이 두 번째로 유배되어 간 섬, 흑산도를 가리킨다. 흑산은 그러나 정약전에게 단순한 지명이 아니었다. 흑, 즉 검정이 지니는 그 막막한 어두움과 까마득함을 동시에 느끼는 희망이라곤 없는 세상의 끝에서 맞닥트린 절망감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정약전은 자신이 결코 흑산도를 벗어나지 못하고 죽을 거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정약종의 순교와 정약용의 배교 사이에서 이도저도 아닌 자신의 상황을 기교(棄敎)라고 에둘러 말하는 것에서도 그 어쩔 수 없는 마음이 느껴진다. 어디서도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는 그래서 믿을 수 없는 한계상황에서 그냥 놓아버릴 수밖에 없는 그의 심중이 점점 무겁게 자리를 차지하는 이 이상한 현상은, 내면 깊이 소용돌이치는 복잡하고 어려운 마음의 갈등을 아주 단순하게 극도의 절제를 보이며 아예 표현하지도 않은 그 이면이 점점 더 보여졌기 때문이 아니던가.

그러고 보면 역시 주인공은 정약전이기도 한 것이 자명하다. 그렇다고 그가 희망을 놓아버린 것은 아니다. 그는 흑산의 깊고 투명한 바다에서 수많은 종류의 물고기들에게 이름에 걸맞는 펄펄 살아있는 생명력을 섬세하게 부여하면서 제자 창대에게 그토록 두려워하던 흑과 자의 차이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에서도 느껴진다. “같지 않다. 자(玆)는 흐리고 어둡고 깊다는 뜻이다. 흑(黑)은 너무 캄캄하다. 자는 또 지금, 이제, 여기라는 뜻도 있으니 좋지 않으냐. 너와 내가 지금 여기에서 사는 섬이 자산이다.” 그래서 그는 날 것의 물고기들과 날 것 이상의 끈질긴 생명으로 하루하루를 모질게 살아내는 고단한 백성들 곁에서 살아남아 아직도 구원을 희망하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황사영, 그는 아마도 하느님이 지어내신 작은 들꽃 하나도 소중하게 여기고 사랑했을 섬세한 마음을 지니고 있었을 것 같다. 그가 함께 살던 종 육손이를 면천하고 사행마부 마노리에게 사람이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단순명료하게 설명하여 그들이 생전 처음으로 인간으로 대접받고 존중받았다는 체험을 하게하고 그것이 바로 캄캄하던 이 세상에서 그토록 갈망하던 자유를 살게 하는, 곧 누군가 와서 해방을 가져다주고 그네들을 행복하게 해주리라는 희망을 이 세상에서 살게 해준 사람이다. 그리고 백서에 담아 실천하던 사람이다.

노비였던 육손이, 김개동, 궁녀 길갈녀, 주막집 강사녀, 옹기장수 최노인 등이 사랑을 직접 살면서 이웃에게 베풀고 나누는 삶을 사는 것에 매료되었던 박차돌, 그렇지만 폭력과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배교하고 교우들을 밀고하는 끄나풀이 되었다고 손가락질도 할 수 없게 만든다. 얼마나 어렵고 힘든 삶이었는지 그들이 만들어서 기도했던 기도문은 아주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십사고 청한다. 그들은 신앙의 힘으로 세속의 문제를 해결하고 세속을 천당과 조금이라도 가까운 곳으로 만들려고 애쓰다 박해받고 숨진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라고 작가는 말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사학죄인을 처단하라는 정순왕후 대왕대비는 괴수들의 우두머리인 야소더러 천년만년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고, 그 어미는 발을 땅에다 딛지 않고 둥둥 하늘을 떠다니는 이상한 여인네로 칭하며 번다하고 듣기에 민망한 말로 교지를 내리는데 신앙인들은 이마저도 신앙고백으로 들릴 것 같다. 《흑산》 속의 다양한 인물들이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말을 건네고 있다. 당신들이 사는 지금의 세상에서 행복하냐고, 서로 나누고 위해주고 존중해주며 무가치하다는 것도 소중하게 감싸는 사랑이 있느냐고, ‘지금 여기’가 천국이냐고….

[월간빛, 2012년 2월호,
김계선(에반젤리나 · 성바오로딸수도회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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