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7일 (금)
(백) 부활 제7주간 금요일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내 양들을 돌보아라.

강론자료

2016-04-17.....부활 제4주일 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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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16-04-16 ㅣ No.2035

 

부활 제4주일 (다해) - 성소주일

사도행전 13,14.43-52         묵시록 7,9.14-17     요한 10,27-30

2016. 4. 17. 이태원

주제 : 성소주일에 내가 할 수 있는 일

우리는 삶에서 기도해야 한다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그때에 하는 기도가 나를 위한 것인지 혹은 남을 위한 것인지에 따라 기도에 참여하는 행동과 수량은 달라질 것입니다.

 

오늘은 2016년도 부활시기 4번째로 맞이하는 주일입니다. 부활대축일부터 셈하다가 네 번째에 다다르면 우리는 이 주일을 색다르게 부르는 소리를 듣습니다. 그것은 평소의 방법대로 부활제4주일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성소(聖召)주일이나 착한목자주일이라고 부른다는 것입니다. 이 표현의 의미는 사제나 수도자로 사는 사람들과 그 길을 준비하는 사람들을 기억해서 신앙인인 사람들이 특별하게 행동하자고 권고하는 날이고, 그 길을 따라 사는 사람들에게 신앙인으로서 나는 얼마나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있는지 돌이켜보자는 뜻이기도 합니다.

 

성소주일(聖召主日)은 하느님의 부르심이라는 아주 큰일에 초점을 두고 우리들 각자는 그 부르심을 어떻게 대하는지 내 삶의 응답을 살피자는 의도가 있는 표현이고, 착한목자주일이라는 표현은 당신의 목숨을 내놓은 구원자요, 착한목자로 사신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범을 따라 세상에서 그 역할을 하는 사제와 그 일에 협조하는 수도자의 삶을, 양의 입장에 있다고 하는 사람은 어떻게 해석하고 따르는지 함께 돌이키자고 권고하는 표현입니다.

 

삶의 주도권은 나에게 있다고 하면서 앞에 나서고 싶은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오늘을 어떻게 부르든지 아쉬운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에서는 세상을 채운 사람들에게 세상 삶의 주도권이 있다고 말하지 않고 하느님에게 있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이렇게 해석할 수 있는 삶의 주도권을 쥐고 움직이면 내 맘대로 모든 것을 다 이룰 것처럼 살지만, 실제로 삶의 주도권을 갖는 것은 아주 힘든 일이고, 다른 사람의 삶에 대한 것까지도 내가 돌봐야 하는 힘겨운 일의 한 가지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오늘 사도행전독서의 말씀은 지금의 터키의 한 가운데쯤에 있는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서 복음을 선포한 바오로의 일행에게 유대인들 몇 명이 훼방을 놓은 내용입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소식을 전하는 바오로와 사도들에게 그들의 일을 왜 훼방했을까요? 사도행전은 그 유대인들이 가졌을 삶의 의도를 전하지 않으니 우리가 그 자세한 내용을 알 수는 없습니다만, 우리의 현실 삶을 거기에 비추어 생각한다면, 과거에 살았던 그들이지만, 그들이 어떤 마음을 갖고 그렇게 행동했을지도 짐작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도들은 복음을 선포하다가 그 도시와 마을에서 쫓겨났으면서도 자기들의 현실을 기쁜 자세로 대했다는 것이 오늘날의 우리로서는 알아듣기가 어려운 일입니다. 세상의 삶은 분명히 고통이고 어려움인데, 어떻게 그럴 수 있겠습니까? 인간적으로 해석하면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이지만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리고 응답한 성소자(聖召))의 현실이라면, 어떻게 하면 그렇게 살 수 있는지도 우리가 배워야 합니다. 배워야 한다는 것을 먼저 생각하면서도 우리가 사도들의 행동을 이해하기가 힘들다면, 우리가 판단할 수 있는 사도들에 대한 것은 둘 중의 한가지일 것입니다. 기쁨을 잘못 드러내고 지치거나 실망하지 않은 사도들의 정신상태가 잘못된 것이거나 아니면 그들을 박해하던 사람들이 드러내던 자세가 잘못된 사실에 근거한 것이라는 얘기가 될 것입니다. 이렇게 두 가지를 말씀드리면 여러분은 둘 중에 어떤 것이 옳은 판단이라고 하겠습니까?

 

세상에 사는 우리는 하느님의 축복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참여할까 하고 중요하지 않은 일에 목숨을 거는 때가 있습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축복에 참여할 사람의 숫자가 많거나 적은 것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그 축복에 참여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의 귀를 울리는 많은 소리들 가운데서,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어떻게 구별해서 듣겠습니까? 예수님은 지금 내가 사는 세상에 계시지 않으니 내가 그분의 말씀을 들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요? 그 사실에 관한 것을 올바르게 구별할 수 있다면 나는 영원한 생명에 가까이 있다고 말해도 좋을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유목민의 사회도 아니고, 우리나라의 사람들이 가까이하는 동물들에 양은 포함하지 않기 때문에 유대인사회의 풍습을 이용하여 우리에게 특별한 가르침을 주시는 예수님을 온전하게 알 수는 없다고 하지만, 목자와 양의 관계를 통해서 표현하는 하느님의 사랑과 그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잘 판단해야 하는 중요한 일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이라고 풀이하는 성소(聖召)는 세상에 사는 사람들 누구에게나 해당하는 소리입니다. 그 큰 범위를 좁혀서 사제와 수도자로 사는 사람 그리고 그 길을 준비하는 길에 들어서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날이라고 알려주면 여러분은 그들을 위해서 어떤 행동을 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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