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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복음으로 세상 보기: 밥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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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11-07 ㅣ No.1601

[복음으로 세상 보기] 밥줄

 

 

아침 출근길에 상쾌한 기운을 맡으며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습니다. 청와대에서 경복궁으로 내려가는 길가에 허름한 자리가 마련되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국민 먹거리의 위기·농정 적폐 청산과 대개혁 촉구”를 요구하는 농민들의 단식농성장입니다. 한동안 잊고 살았던 농업의 문제를 다시 만나게 됩니다.

 

해마다 수확의 때가 되면 기쁨을 누려야 할 농부들의 시름은 깊어만 갑니다. 봄이 되면 씨를 뿌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고민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스팔트 농사라는 상경투쟁이 매년 있었습니다. 3년 전 이맘때 전남 보성군 웅치면에서 농사를 짓던 백남기 임마누엘 농민이 그 처절한 호소를 온 몸으로 하다가 물대포의 물줄기를 정면으로 맞고 쓰러져 1년에 가까운 투병 끝에 재작년 9월25일 숨을 거두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농가인구, 즉 농민들의 숫자가 감소함에 따라 그 목소리까지도 작아져서 들리지도 않을 지경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농민들의 요구에 ‘국민 먹거리의 위기’가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농민들은 자신들이 먹고 살기 힘들어졌음만 호소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매일 먹고 살아야 하는 곡식을 책임지는 사람들로서 지금 국민들이 무엇을 먹고 있는지를 너무도 잘 아는 사람들이 보는 관점에서 오늘날 먹을거리들이 과연 제대로 된 것이냐는 고민도 함께 하고 있습니다. 농부의 마음은 부모의 마음과 같아 국민들의 건강 걱정도 함께 하는 것입니다. 표시조차도 되지 않는 GMO, 곧 더 많은 생산과 편리한 관리를 위하여 유전자 변형마저 거리낌 없이 행하여 근본을 알 수 없는 농산물들이 시중의 먹을거리들로 버젓이 유통되고 있습니다.

 

 

농업은 생명, 경제적 이득만 따질 수는 없어

 

도시빈민에 대한 고민을 하면서 그 고민의 시작은 도시화, 산업화였습니다. 제조업에 일손이 부족하자 농민들을 도시로 불러들였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도시로 유입되어 판자촌을 이루어 살게 되었습니다. 농작물을 가꾸는 손이 도시노동자의 손으로 바뀌었습니다. 근대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더 많은 공장이 이익을 내야하고, 이를 위해서 노동자들의 몫은 많을 수 없었습니다. 적은 임금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적은 생활비를 유지하여야 했고, 적은 생활비로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매일 먹는 밥을 짓는 쌀값을 올리면 안 됐습니다. 결국 낮은 쌀값을 유지하기 위해 수매가는 매년 같은 낮은 가격을 지속하고, 농민들은 살기 힘이 들어 다시 도시로 발길을 옮기는 이농이 지속된 것입니다.

 

농민들이 줄어들어 이제는 농업의 앞날을 기대하기 힘들게 되었다고 걱정들입니다. 아랫돌을 빼서 윗돌을 괴는 정책 없는 농정입니다. 23%로 하락한 낮은 식량자급률에도 불구하고 농업은, 농민은 계속해서 희생을 요구받고 있습니다. 농가 평균소득 1,005만원이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40대 미만의 농가는 1%도 되지 않습니다. 귀농의 바람이 분다 하지만 밥 한 그릇 300원 가치를 요구하는 농촌은 여전히 살아가기 곤궁한 곳이며 자연이 주는 혜택을 제외한다면 그야말로 살기 힘든 지옥이 되었습니다. 하루라도 거를 수 없는 밥상을 책임지는 가장 기초적인 축대가 무너져버렸습니다.

 

가톨릭 대학생연합회에서는 여름이 되면 당시로서도 퇴물이 되어버린 농촌활동이라는 것을 하였습니다. 학생들이 각 마을로 들어가서 열흘 정도의 기간을 함께 살아가는 체험 프로그램이었습니다. 딱히 일머리가 없는 학생들을 받는 농촌 가정으로서는 오히려 골칫덩이일 수도 있었겠지만 농민들은 엄마의 마음과 아빠의 너그러움으로 반겨주었습니다. 학생들은 농촌을 체험하면서 자신들의 밥상이 마트의 진열대로부터 시작되지 않고 땅에서 시작되었음을 배웠습니다. 공장의 제조과정으로 생산되는 제품이 아니라 씨를 뿌리고 정성을 다하여 돌보는 수많은 과정을 거친 살아있는 생물이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렇게 살아 있는 것을 먹고 사람도 살아간다는 것을 온 몸으로 체험한 것입니다.

 

그 후로 몇몇 학생들은 지역의 농부들과 지속적으로 연락하며 지냈고, 농민들의 삶을 연구하는 농촌사회연구가가 되기도 하고, 지금도 농촌에 대한 애정을 갖고 걱정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관계없던 농촌이 내가 아는 사람이 살고 있고, 내 생활과 깊은 관계가 있음을 늘 마음에 두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당시에 학생들이 농활을 가던 곳은 생명을 살리는 유기농을 하는 곳들이었습니다. 힘이 들더라도, 수확이 적더라도 생명을 살리는 농업이라는 자부심이 있던 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수는 점점 줄어들어 갑니다. 도시는 끊임없이 원가 절감을 따지고, 유통은 그 단계가 늘어감에 따라 마진을 떼어가 아무리 선한 일이라도 버티는 데 한계가 온 것입니다. 농업은 생명을 이야기하는 곳인데 이 자리에서 경제적 이득만을 생각하게 한다면 생명은 뒷자리로 밀릴 수밖에 없습니다.

 

 

농촌은 생명 공동체의 시작이자 바탕

 

예수님께서는 “나는 참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요한 15,1)라고 당신과 하느님 아버지를 설명하십니다. 아버지이신 농부는 모든 피조물이 당신이 가꾸시는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것을 바라십니다.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것은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삶의 방식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가꾸고 돌보는 하느님의 창조의지가 지속적으로 펼쳐지는 것입니다. 포도나무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은 생명의 원리를 저버리는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이익이 되는 것에 마음을 두어 자신의 생명마저 소홀히 하는 것입니다.

 

밀양에 송전탑이 들어섰을 때 정부와 한국전력공사는 도시로 전기를 운반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했습니다. 결국 도시를 위해서 땅에 씨를 뿌리고 열매를 가꾸는 사람들은 소외된 것입니다. 밀양의 활동가들은 이를 한 문장으로 표현했습니다. “도시의 불빛은 밀양 할매들의 눈물입니다.” 농촌과 도시는 한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농촌과 농부와 농업을 이처럼 옥죈다면 결국 도시도 그 삶의 뿌리를 잃게 될 것입니다. 뿌리를 잃은 나무는 생명을 마치게 됩니다. 이를 막기 위해서라도 농촌을 바라보는 시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곧 회개가 필요한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향한 회개는 인간의 정신적인 차원에서만 이루어지는 뉘우침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세우신 생태계 전체의 질서와 공식을 훼손해 온 우리의 오만과 남용과 방관을 근원적으로 성찰하고 회심하는 것을 모두 포함합니다. 우리의 미온적인 태도가 하느님의 피조물에 어떻게 해를 끼쳐 왔는지를 성찰하고, 우리가 생명으로 더 가까이 가고자 어떤 마음을 지녀야 하며 어떻게 삶을 변화시켜 나아가야 할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그 가운데에서도 생명을 돌보고 가꾸는 농업과 농촌 그리고 밥상을 살리는 것은, 우리가 무엇보다도 먼저 해야 하는 생태적 성찰의 시작입니다. 우리의 생태적 성찰은 세상의 다른 존재들과 함께 보편적 친교를 이루고 있는 사랑의 공동체를 향하고 있습니다. 이 친교는 다른 존재들에 대한 근본적인 관심과 생명을 살리고 건네는 상생의 생명 공동체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농촌은 생명 공동체의 시작이자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바탕입니다. 농촌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우리가 목표로 하는 생명 공동체를 잃어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2018년 제23회 농민주일 담화 중에서) 농촌은 우리를 살리는 밥줄입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8년 11월호, 나승구 F. 하비에르 신부(서울대교구 빈민사목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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