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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체성사] 성체성사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실재적 현존(Q&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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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5-04-13 ㅣ No.95

성체성사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실재적 현존(Q&A)

 

 

Q 왜 예수님께서는 당신 스스로를 음식과 음료로 우리에게 주시는가? 

 

A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영적 양식인 성체 안에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주신다. 이 생명의 나눔은 우리의 세례에서 시작되는데, 성령의 힘에 의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결합하고, 그리하여 아버지의 자녀가 된다. 또한 이것은 견진성사로 강해지고 증가되며, 성체성사에 지속적으로 참여함으로써 더욱 성장하고 깊어진다. 성체성사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먹고 피를 마심으로써 우리는 그분의 인성을 통해 그리스도의 인격과 결합한다(요한 6,56). 그리스도의 인성에 결합해서 우리는 동시에 그분의 신성과 결합한다. 

 

우리 안에 머무르시는 성령의 능력을 통해 그리스도와 일치함으로써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누리시는 영원한 사랑의 관계 안으로 들어간다. 예수님은 본래 하느님의 영원한 아드님이셨기 때문에, 우리는 세례성사를 통한 입양에 의해 하느님의 아들과 딸이 된다. 세례와 견진성사를 통해 우리는 성령의 성전이 되며 그분이 우리 안에 머무르심으로써 우리는 성화은총으로 거룩해진다. 

 

복음의 궁극적 약속은 우리를 성삼위의 생명에 참여하게 하는 것이다. 교회의 교부들은 이런 신적 생명의 참여를 신화(神化, theosis)라고 불렀다. 여기서 하느님께서는 단지 높은 곳에서 우리에게 좋은 것을 보내시는 분이 아니라, 하느님의 내적 생명,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이루시는 친교로 우리를 인도하신다. (감사를 의미하는) 성찬례의 거행에서 우리는 이 탁월한 선물에 대해서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린다. 

 

 

Q 왜 성찬례를 희생제사라고 하는가? 

 

A 우리의 죄는 우리가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장애를 제거해 주셨다. 그분의 죽음은 우리의 죄를 위한 희생제사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요한 1,29)이시다.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그분은 죄와 죽음을 정복하시고 우리를 하느님과 화해시켜 주셨다. 성찬례는 이 희생제사를 기념하는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희생제사를 기억하고 재현하고자 모이는데, 사제의 행위와 성령의 능력을 통해 교회는 여기에 참여한다. 

 

히브리서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늘 성부 앞에서 인류를 위해 중개 역할을 하시는 영원한 대사제이시다. 여기서 그분은 수세기 동안 예루살렘 성전에서 죄인을 위한 희생제사를 바치던 많은 대사제들을 능가하신다. 영원한 대사제이신 예수님께서는 다름 아닌 바로 당신 자신을 영원한 희생제물로 바치신다(히브 9,12). 그분은 참으로 인간이 되시어 역사 안에 들어오셨기에 예수님의 행위는 인류의 역사에 속한다. 그러나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삼위의 두 번째 위격이시다. 곧 그분은 시간이나 역사 안에 한정되지 않으시는 영원한 성자이시다. 그분의 행위는 창조의 일부인 시간을 초월한다(히브 9,11).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시려고 하늘나라를 떠날 필요는 없으시다. 오히려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히 우리를 위해 성부께 중재하고 계시면서 당신의 희생제사를 바치시며, 천사와 성인들이 지속적으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고 그분의 모든 은혜에 감사하는 천상 전례에 우리를 초대하신다(묵시 5,13). 더군다나 성부 앞에서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의 영원한 희생제사의 재현에서 우리는 단순한 관객이 아니다. 사제와 예배 공동체는 여러 방식으로 성찬의 희생제사를 행한다. 제대에 있는 사제는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대신한다.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인 세례 받은 모든 신자는 사제이며 동시에 희생제물이신 그분의 사제직에 참여한다. 성찬례는 또한 교회의 희생제사이다. 

 

그리스도의 몸이며 신부인 교회는 당신의 머리이고 신랑인 분의 희생제사의 제물에 참여한다. 성찬례에서 그리스도의 희생제사는 하나의 희생제물을 이루는 그리스도와 결합된 그분 몸의 지체들의 제사가 된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368항). 그리스도의 희생제사가 성사적으로 표현된 것처럼, 그리스도와 결합된 우리는 성부께 하나의 희생제물로 스스로를 봉헌한다.

 

 

Q 언제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며, 왜 빵과 포도주는 여전히 그렇게 보이고 그 맛을 내는 것일까? 

 

A 성찬례의 거행에서 영광스럽게 되신 그리스도는 독특한 방식, 성찬례에 적합한 방식으로 빵과 포도주의 형상 아래 현존하신다. 교회의 전통적인 신학 언어에 따르면, 성체의 축성에서 빵과 포도주의 “실체”는 성령의 힘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실체”로 변화된다. 동시에 빵과 포도주의 외양이나 형상은 여전히 남아있다. 여기서 “실체(實體, substantia)”와 “우유(偶有, accidens)”라는 철학 용어는 성 토마스 데 아퀴노를 비롯한 중세 신학자들이 신앙을 이해하고 설명하기 위해 빌려온 것이다. 

 

이 단어는 여러 측면에서 빵과 포도주로 보이는 것이 이제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었다는 사실을 전하는 데 사용된다. 빵과 포도주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하는 이런 실체 수준에서의 변화를 우리는 실체 변화(transsubstantiatio)라고 부른다. 가톨릭 신앙에 따르면, 이 실체 변화가 일어나기 때문에 우리는 성체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참된 현존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우리 신앙의 커다란 신비이다. 우리는 교회의 성전과 성서로 우리에게 주어진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통해 이를 알 수 있다. 세상 안에 일어나는 다양한 변화는 우유성이나 특징들의 변화를 포함한다. 때때로 실체가 그대로 있는 동안에도 우유적인 것은 변한다. 예를 들어 한 아이가 성인이 되었을 때 그 사람의 특징들은 여러 가지로 변하지만 그 사람의 실체는 동일하다. 

 

어떤 경우에는 실체와 우유가 모두 변화한다. 예를 들면 사람이 사과를 먹을 때 그 사과는 사람의 몸 안으로 결합되어 그 사람의 몸으로 변화된다. 그러나 이런 실체의 변화가 일어났을 때 그 사과의 우유나 특징들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 사과가 사람의 몸으로 변화할 때, 그것은 그 사람의 몸의 우유나 특징들을 띠게 된다. 성체 안에서 그리스도의 현존은 독특한 것인데, 비록 축성된 빵과 포도주가 실체에서는 참으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지만 단지 빵과 포도주의 우유성이나 특징들을 가진 반면에 인간 몸의 우유성이나 특징들은 전혀 갖고 있지 않다. 

 

 

Q 빵은 빵으로 지속하기를 멈추고 포도주는 포도주로 지속하기를 멈추는가? 

 

A 그렇다. 온전한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시고자 빵과 포도주는 남아있지 않고 그분의 거룩한 몸과 피가 현존한다. 그러므로 성찬례에서 그 빵은 빵의 실체로서 지속하기를 멈추고 그리스도의 몸이 되며, 포도주도 실체로서 포도주이기를 멈추고 그리스도의 피가 된다. 성 토마스 데 아퀴노가 말한 바대로, 그리스도께서는 “이것은 나의 몸이다.”라고 하셨지 “이 빵은 내 몸이다.”라고 하지 않으셨다(Summa Theologiae, III q. 78, a. 5). 

 

 

Q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성체 안에 현존하신다는 것은 적절한 것인가? 

 

A 그렇다. 왜냐하면 이런 현존의 방식이 성찬례의 성사적 거행에 온전히 부합하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빵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는 본래적인 상징성을 이용한 형식 안에서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주신다. 더욱이 빵과 포도주의 형상 안에서 현존하신다는 것은 먹고 마시는 사람에게 적절한 형식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현존은 오직 신앙에 의해서만 발견되거나 식별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현존은 신앙의 덕에 부합한다. 

 

보나벤투라는 말했다. “상징으로서 성사 안에서의 그리스도의 현존에 대해서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 가장 큰 어려움은 그분이 하늘에 계신 것처럼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다는 사실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이것을 믿는 것은 특별히 가치있는 것이다”(In IV Sent., dist. X, P. I, art. un., qu. I).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느님의 권위로 신앙에 의해 우리는 그것이 인간 능력으로는 파악될 수 없다고 믿는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381항). 

 

 

Q 축성된 빵과 포도주는 “단지 상징”일 뿐인가? 

 

A 일상 언어 사용에서 우리는 그 자신을 넘어서 다른 어떤 것, 때로는 동시에 수십 개의 다른 실재들을 가리킬 때 “상징(symbol)”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된 빵과 포도주는 참으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이기 때문에 단지 상징이 아니다. 곧 그리스도는 빵과 포도주의 형상 아래 현존하신다. 빵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는 행위는 여러 가지 면에서 성찬례의 의미를 드러낸다. 예를 들면 자연 식품이 몸에 영양분을 주는 것처럼 성찬의 음식은 우리에게 영적 자양분을 제공한다. 

 

나아가, 일반적으로 식사를 함께하는 것은 거기에 참여하는 사람들 사이의 친교를 이룩한다. 곧 성찬례에서 하느님 백성은 서로에게뿐 아니라 성부와 성자와 성령과 함께 누리는 친교 안으로 인도하는 식사에 참여한다. 마찬가지로 바오로 성인이 말한 것처럼 성찬례 동안에 많은 사람들이 함께 나누어 먹는 한 덩어리의 빵은 그리스도의 몸, 하나의 몸으로서 성령에 의해 함께 모인 사람들의 일치를 가리킨다(1고린 10,17). 

 

또 다른 예를 보면, 포도알 하나하나와 밀알 하나하나는 각기 빵과 포도주가 되기 전에 먼저 수확되어야 하고 으깨어지고 깨어지는 과정을 겪어야 한다. 이 때문에 빵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일어난 많은 이들의 일치와 그리스도 때문에 겪게 되는 고통, 당신의 제자들 역시 감당해야 하는 고통을 가리킨다. 상징은 여러 다양한 의미와 함축을 동반하기 때문에, 빵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는 행위는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위해 하신 것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아주 많이 말할 수 있다. 

 

 

Q 미사가 끝났을 때 축성된 빵과 포도주는 더 이상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아닌가? 

 

A 아니다. 성찬 예식 동안 빵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고 이것은 그대로 남는다. 성체는 더 이상 빵과 포도주일 수 없기 때문에 다시 빵과 포도주가 될 수는 없다. 그러므로 미사의 특수 상황이 끝난 후에 이른바 “정상” 상황으로 돌아갈 이유는 없다. 일단 실체가 정말로 변화했으면, 그리스도의 몸과 피는 “성체의 형상이 존속하는 동안 계속 그 안에 현존하신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377항). 

 

축성된 빵이 그 다음날까지 남아있다면 거기에는 더 이상 성화의 힘이 없다는 주장에 대해서 알렉산드리아의 성 치릴로는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그리스도는 변하시지도 않으며, 그분의 거룩한 몸도 변화되지 않고 축복의 권능과 생명을 주는 은총이 그 몸 안에 영원히 존속하기 때문이다”(Letter 83, to Calosyrius, Bishop of Arsinoe [PG 76, 1076]). 교회는 빵과 포도주의 형상이 있는 한 그리스도께서는 빵과 포도주의 형상 아래 현존하신다고 가르치고 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377항).

 

 

Q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대한 적절한 흠숭의 표현은 무엇인가? 

 

A 빵과 포도주의 형상 안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는 성찬례 동안이나 후에도 장엄한 흠숭을 받아야 한다(『신앙의 신비』, 56-61항 참조). 예를 들면 성체가 보존되는 감실은 “성당이나 경당 안에서 눈에 잘 뜨이는 뛰어난 곳에 아름답게 꾸며져 기도하기에 적합하게 설치되어야 한다”(교회법 제198조 2항). 라틴 교회의 전통에 따르면, 신자들은 성체가 모셔져 있는 감실 앞에서 무릎을 꿇어야 한다. 동방 가톨릭 교회에서는 전통적으로 감실 앞에서 십자성호를 긋고 몸을 깊이 굽혔다.

 

라틴 교회와 동방 가톨릭 교회의 전례 전통은 모두 공경, 존중, 흠숭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신자들은 감실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시기 때문에 성당 안에서 큰 소리를 내거나 거친 소리로 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보았다. 또한 교회는 흠숭과 기억의 표지로서 병중에 있지 않은 이상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기 전에 금식할 것을 요구한다. 라틴 교회에서는 일반적으로 영성체를 하기 최소한 한 시간 전부터는 공복재를 지켜야 한다. 

 

 

Q 어떤 사람이 신앙 없이 성체를 영했다면, 그때에도 여전히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인가? 

 

A 그리스도의 피를 먹고 마신 사람에게 신앙이 없다는 것이 성체의 본질을 변화시킬 수는 없지만, 그리스도와 친교를 나누는 영적 은혜는 얻지 못한다. 만일 고의적으로 그랬다면 이런 영성체는 헛된 것이고 심판을 받을 것이다(1고린 11,29). 영성체는 자동적인 치료약이 아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친교를 원하지 않으면 하느님은 이것을 우리에게 강제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우리는 신앙으로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의 친교에 대한 하느님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우리의 마음과 정신이 변화되고 하느님께 대한 신앙과 사랑을 더 크게 갖고자 하느님의 은총에 협력해야 한다. 

 

 

Q 대죄를 범했다고 의식하는 신자가 성체를 영했다면 그 사람이 모신 것도 여전히 그리스도의 몸과 피인가? 

 

A 그렇다. 영성체하는 사람의 태도나 처지가 성체의 본질을 변화시킬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질문은 본래 참된 현존의 본질에 대한 것이 아니라 개인과 주님 사이에 죄가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한 것이다. 영성체를 하러 나가기 전에 우리는 주님과 또 그분의 신비체인 교회와 올바른 관계, 곧 은총의 상태, 모든 대죄에서 자유로운 상태에 있을 필요가 있다. 

 

죄가 상처를 주고 심지어 그 관계를 파괴할 수도 있지만 참회의 성사는 그것을 회복시킬 수 있다. 대죄를 범했다고 의식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모시기 전에 참회의 성사를 통해 화해해야 한다. 이 경우에 그 사람은 “하느님을 모든 것 위에서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오는”(『가톨릭 교회 교리서』, 1452항) 완전한 통회를 할 의무가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이 완전한 통회는 가능한 한 곧 고해성사를 받겠다는 굳은 결심을 동반해야 한다. 

 

 

Q 성체나 성혈의 어느 한 형식으로만 영성체를 해도 그것은 온전한 그리스도를 모시게 되는 것인가? 

 

A 그렇다.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찬례 안에서 빵이나 포도주의 형상 안에 온전히 현존하신다. 나아가 그리스도께서는 축성된 제병의 조각 어디에나 또는 귀한 성혈의 방울마다 온전히 현존하신다. 그럼에도 성찬례 동안 빵과 포도주의 두 형상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받아 모시는 것은 특별한 일이다. 이것은 하느님 나라가 충만함 속에서 완성될 세말에 주님과 함께 거행될 축제의 전조인 잔치로서 성찬례를 완벽하게 보이게 한다(「성체신비 공경에 관한 예부성성 훈련」, 32항 참조). 

 

 

Q 성체 안에서의 실재적 현존 이외에 다른 방식으로도 성찬례 동안에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시는가? 

 

A 그렇다. 그리스도께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성찬례에 현존하신다. 그분은 미사의 희생제사를 봉헌하는 사제의 인격 안에 현존하신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헌장(7항)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당신 말씀 안에 현존하시어, 교회에서 성서를 읽을 때에 당신 친히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교회가 기도하고 찬양할 때에, “단 두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겠다.”(마태 18,20)고 약속하신 바로 그분께서 현존하신다. 더욱이 그분은 다른 성사들에도 이와 같이 현존하신다. 예를 들면 누가 세례를 줄 때에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세례를 주시는 것이다. 

 

우리는 그 현존의 특별한 본성을 강조하려고 “실재적”이라는 말로 빵과 포도주의 형상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현존에 대해서 말한다. 빵과 포도주로 보이는 것은 바로 그 실체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다. 하느님과 인간, 몸과 피, 영혼과 신성의 온전한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신다. 

 

그리스도께서 성찬례에서 현존하시는 다른 방식들이 정말로 비실재적인 것은 아니지만, 이 방법은 다른 것들을 훨씬 능가한다. “성체 안에서의 현존이 ‘실재적인 것’이라 불리는 것은 마치 다른 현존 방식이 ‘실재적’이 아닌 것처럼 배타적 의미로서가 아니라 그것이 탁월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의심없이 총체적으로 또 온전하게 하느님이요 인간으로서 현존하시게 되는 곧 본체적 현존 방식이다”(『신앙의 신비』, 39항).

 

 

Q 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여러 가지 의미에 대해 말하는가?

 

A 먼저, 그리스도의 몸은 인간이 되신 하느님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 몸에 대해 말한다. 성찬례 동안에 빵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된다. 인간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몸, 성찬례에서 빵과 포도주의 형상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부활하시고 영광스럽게 되신 몸을 갖고 있다. 

 

두 번째로, 바오로 사도가 그의 서한에서 가르친 것처럼 인간 몸을 유비적으로 이용하여 말한다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교회의 많은 지체들은 그들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결합되어 있다(1고린 10,16-17; 12,12-31; 로마 12,4-8). 이 사실은 종종 그리스도의 신비체와도 연관된다. 산 사람과 죽은 사람 모두가 그리스도와 결합되어 있고, 그리스도의 몸에 함께 참여한다. 이것은 성령의 힘으로 가능한 신비적 일치이기 때문에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신비체와 그리스도의 성체는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다. 세례를 통해 우리는 교회의 신비체인 교회에 들어가고, 성체를 받아 모심으로써 우리는 강해지고 그리스도의 신비체로 건설된다. 교회의 중심 행위는 성체성사의 거행이다. 곧 모든 신자는 성찬례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받아 모심으로써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의 지체로 살아가게 된다. 

 

성찬례에서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그리스도의 몸”의 두 가지 의미에 부응하는 방식으로 두 가지다. 한편,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그분의 희생제사가 바쳐지는 것은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이다. 감사기도의 성령 청원 기도(epiclesis)에서 사제는 성령을 보내시어 이 빵과 포도주의 예물이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게 해달라고 성부께 청한다. 동시에 사제는 성령께서 “성찬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오직 한 마음 한 몸이 되게”(『가톨릭 교회 교리서』, 1353항) 해주시도록 성령을 보내주실 것을 성부께 청원한다. 그리스도의 성체의 선물이 우리에게 오고, 그리스도 신비체의 일원으로서 서로 일치하고 그리스와 일치하는 것은 모두 성령을 통해서이다. 

 

이에 따라서 우리는 성찬례가 서로 고립된 고독한 개인으로 하느님과 결합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우리는 그리스도 신비체의 다른 지체들과 함께 그리스도께 결합된다. 그러므로 성찬례의 거행은 서로에 대한 사랑을 증가시키고 서로에 대한 책임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어야 한다. 나아가, 그 신비체의 일원으로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신하고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모셔올 의무가 있다. 우리는 말로만이 아니라 어떻게 우리의 삶을 살 것인지에 따라 그리스도의 복음에 참여할 책무를 갖고 있다. 

 

우리는 또한 모든 불의를 포함해서 복음에 반대되는 우리 세계의 모든 힘에 대항해서 싸울 의무가 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우리에게 “성체성사는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투신하게 한다. 우리를 위해 내어주신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참되게 받기 위해서는 그분의 형제들인 가장 가난한 사람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알아보아야 한다.”(1397항)라고 가르치고 있다. 

 

 

Q 왜 우리는 성체 안에서의 그리스도의 현존을 “신비”라고 부르는가? 

 

A 성체성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와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인류 구원계획에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에 신비이다. 우리는 이해하기에 쉽지 않은 성체성사의 여러 모습에 놀라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세상을 위한 하느님의 계획은 계속해서 인간의 기대나 이해를 넘어서기 때문이다(요한 6,60-66). 예를 들어, 제자들이 처음에 메시아는 죽은 후 죽음으로부터 부활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처럼 말이다(마르 8,31-33; 9:31-32; 10,32-34; 마태 16,21-23; 17,22-23; 20,17-19; 루가 9,22; 9,43-45; 18,31-34 참조). 더욱이, 하느님에 대해서 말할 때 언제나 우리는 인간적 개념으로 결코 전체적으로 하느님을 파악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이해를 제한하려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계시에 의해서 인간 이해의 정상적 한계를 넘어서 나아가길 바라신다. 

 

* 원문 : Committee on Doctrine of the United States Conference of Catholic Bishops, “The Real Presence of Jesus Christ in the Sacrament of the Eucharist: Basic Questions and Answers”, 2001년, 엄재중 편역.

 

[사목, 2005년 2월호, 미국 주교회의 교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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