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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68: 샤를르 페로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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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11-22 ㅣ No.428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 (68) 샤를르 페로 (중)

예수의 말과 행위가 기억 · 선포되는 최고의 자리는 성찬



예수와 역사

페로 신부는 1979년 출간한 「예수와 역사」(박상래 옮김, 가톨릭출판사)에서 개신교 성서 학계를 중심으로 연구돼 온 역사적 예수 문제를 새로운 시각에서 제기했다.

페로 신부는 신앙과 교의의 껍질을 벗겨낸 순수한 역사적 예수를 학문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았던 19세기 역사주의를 비판한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고고학적인 차원에서 이해된 예수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해 주지 않는다. 그들은 예수를 그리스도요 주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었던 부활 신앙으로부터 예수의 삶과 메시지를 회상했고 또 세상 종말에 오실 분으로 그렸다.

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회고적 선포이다. 여기서 회고 혹은 회상은 오늘을 꿰뚫는 옛날에 대한 거리와 함께 이 둘 사이의 근원적인 일치를 동시에 드러낸다. 마르코 복음서 16장 6절에서 ‘되살아나셨다’를 뜻하는 ‘아니스테미’(anistemi)라는 그리스어 동사가 암시하듯이 마르코 복음서는 부활의 관점에서 예수 이야기를 회상한다. 이처럼 교회의 시간에서 다시 현존하게 된 역사의 예수는 신앙의 그리스도로 되살아난다.

그러기에 페로 신부는 역사의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를 분리해 전자에서 후자로 연결되는 발전적 전개 과정을 소상히 파악할 수 있다는 주장을 ‘원초의 신화’(Le mythe de l’originaire)라 부르며 이를 비판한다. 하지만 페로는 복음서가 신앙의 관점에서 쓰였다는 이유로 예수에 대해 역사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예 없다고 보는 불트만 식의 극단적 회의론도 거부한다. 이와 반대로 나자렛 ‘예수 자신의 말씀’(ipsissima verba Jesu)이나 ‘예수 자신의 의도’(ipsissima intentio Jesu)를 알 수 있다고 주장한 예레미아스(Joachim Jeremias)나 쉬르만(Heinz Schrmann)의 역사주의적 관점과도 일정한 거리를 둔다. 역사가는 예수의 자의식 수준에서 예수의 말씀이나 의도를 파악하고 있다는 지시적 착각에 빠져서는 안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샤를르 페로는 예수의 말과 행위가 기억되고 선포되는 탁월한 자리가 바로 식사였다고 말했다. 초대 교회의 성찬은 십자가의 역사를 재현하면서 그리스도교적 역사를 창설하는 원형의 자리가 됐다. 그림은 렘브란트의 ‘엠마오의 저녁식사’, 캔버스에 유채, 런던내셔널갤러리, 1601년.


그러기에 페로는 초대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회상하고 고백한 예수의 말씀과 행위가 결코 불가지론의 대상도 아니고 예수 자신의 이야기로 동일시되는 역사주의의 산물도 아니라는 이중의 부정을 바탕으로 예수와 역사라는 비판적 거리를 유지한다. 그것은 본문이 반향하는 세계를 살펴보는 소위 ‘거리두기 해석학’으로 나타난다.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의 눈에 비친 예수의 모습은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의 눈에 비친 예수의 모습과 다를 수 있으며 나아가 나자렛 예수 자신의 모습과도 다를 수 있으나 신앙과 역사의 행위 안에서 연결되고 살아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언어와 신앙 공동체라는 이중의 매개로 전해진 복음서의 예수 특징이기에 페로는 ‘역사의 예수’도 아니요 ‘역사 앞에서의 예수’도 아니며 ‘역사 안의 예수’도 아닌 「예수와 역사」로 자신의 저서를 명명했다.

페로가 예수 전승의 역사성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높이 평가한 것은 케제만(Ernst Ksemann)의 ‘비유사성의 기준’이다. 하지만 페로는 이 기준이 비유다적 예수를 지나치게 강조할 수 있다는 한계 때문에 예수를 오히려 유다교의 배경에서 조명하는 소위 유다인으로서의 예수를 강조해 역사적 균형을 바로 잡고자 했다.


나자렛 예수에 대한 회상

페로는 예수의 메시지와 사명에 요한 세례자의 세례 운동과 종말론적 메시지가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고 봤다. 보다 광범위하게 말해서 기원후 1세기 유다교 내부의 쇄신 활동으로 전개된 침례 운동 안에 예수의 삶의 자리가 있다는 것이다.

예수는 요한에게 침례를 받고 정과 부정의 기준에 따라 사람들을 죄인으로 몰고 가는 종교적 분열 대신에 모든 사람을 침례 안에서 일치시키는 구원의 보편주의를 수용했다. 예수는 침례주의자로 활동을 시작했지만, 공생활의 어느 시점에서 침례를 그만두고 자신의 말과 행동으로 죄의 용서를 현실화했다. 또한 요한 세례자가 설교한 임박한 심판의 가혹함보다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자신의 인격과 행위에 밀착시켜 선포했다. 페로가 그리는 예수는 1세기 유다교의 묵시주의적 토양에서 하느님의 현재적 다스림을 자신의 말과 행동으로 중개한 종말론적 예언자의 모습이다.

예수는 침례 운동이 함축하는 성전과 율법에 대한 비판을 더욱 선명하게 부각했다. 그리고 죄인들과 친교의 식사, 안식일의 치유 행위 그리고 열두 지파의 쇄신을 도모했다. 다가오는 하느님 나라의 전망 안에서 율법과 성전을 비판하고 재해석한 예수에게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가(마르 11,28 참조) 라는 질문이 제기된다. 페로는 예수의 전권 주장이 매우 특별한 자기표현에서 비롯한다고 본다.

예수에 대한 다양한 호칭 가운데 예수 자신이 사용하거나 수용한 것은 ‘예언자’와 ‘인자’(人子) 그리고 ‘아들’ 표현으로 한정된다. 종말론적 예언자와 메시아에 대한 기대가 뒤섞여 있는 당대의 상황에서 예수는 스스로를 타자화하여 3인칭으로 말하는 ‘사람의 아들’(人子) 표현을 자신에게 즐겨 사용하였다. 사람의 아들 표현은 다니엘서 7장 13절 이하에 나타나는 바와 같이 하느님께 전권을 물려받은 권능의 인자라는 측면과 이사야서 53장에서처럼 사람들 손에 넘겨져 수난하고 죽는다는 무력의 인자의 양면성을 포괄한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은 부활하여 마침내 종말론적 심판관으로 도래할 것이라는 예언으로 자신의 종말론적 운명을 드러낸다.

한편 예수는 하느님을 아바(Abba)로 부른 체험에 근거해, 아버지 앞에 선 아들의 모습을 그려 주고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배타적 지식을 바탕으로 “모든 것을 넘겨받았다”(마태 11,27;루카 10,22)는 전권을 선언한다. ‘아들’은 예수와 그의 아버지 사이의 유일무이한 친교와 상호 인식을 드러내는 깊은 일치를 드러내는 표현이다.

페로는 예수의 말과 행위가 기억되고 선포되는 탁월한 자리가 바로 식사였다고 말한다. 바오로가 말하듯(1코린11,24-26) 주님 만찬은 공동체를 모으는 부활하신 분의 현존 장소이자 동시에 부재의 장소이기도 하다. 초대 교회는 주님의 빵을 나누면서 주님의 말씀을 회상하는 가운데 주님과 일치하고 서로 나누며 형제적 일치를 돈독히 했다. 초대 교회의 성찬은 십자가의 역사를 재현하면서 회상, 나눔, 일치, 선포라는 그리스도교적 역사를 창설하는 원형의 자리가 된 것이다.

[평화신문, 2014년 11월 23일,
백운철 신부(가톨릭대 신학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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