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9일 (일)
(홍) 성령 강림 대축일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성령을 받아라.

종교철학ㅣ사상

부활과 희망: 우리는 죽지 않고 모두 변화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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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04-23 ㅣ No.102

[경향 돋보기 - 부활과 희망] 우리는 죽지 않고 모두 변화할 것입니다


고통스러운 항암치료를 하면서 느낄 수 있는 유일한 위로는 오전 10시 30분 성모병원 성당에서 열리는 미사 참례와 거의 날마다 병실로 찾아와 거행해 주시는 신부님과 수녀님들의 영성체였다.

어느 날 주사바늘을 꽂은 채 기진하여 간신히 미사에 참석했을 때, 젊은 신부님이 했던 말이 가슴에 와닿았다. 그 내용은 잊었지만 한 마디의 말은 뇌리에 화살처럼 박혔다.

“머지않아 그분의 뜻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나는 순간 그 말을 주님께서 내게 주신 메시지라고 생각했다.

주님께서는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마태 16,24: 이하 성경 인용은 공동번역)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내가 태어나서 맞이한 제일 큰 고통, 벼랑 끝의 이 병이야말로 주님께서 주신 ‘제 십자가’가 아닐 것인가. 지금까지 명색이 주님을 따른다는 가톨릭 신자로서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른 적이 있었던가. 지금껏 내가 따른 주님이야말로 ‘십자가 없는 예수’가 아니었던가.

십자가 없는 예수를 따르는 일은 얼마나 매혹적인 일인가. 스승 예수는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일 수 있으며, 데이비드 카퍼필드 같은 마법의 술수 없이 순수한 기적으로 죽은 사람을 “나오너라.” 한마디로 살리셨다. 나는 스승으로 인해 ‘세상의 모든 나라와 화려한 도시’의 총독으로 임명될 것이다. 스승님 만세, 호산나, 주님은 찬미받으소서, 높은 데서 호산나.

거기까지가 아니었던가. 주님을 향한 나의 따름은 새벽닭이 울기 전까지가 아니었던가. 베드로는 울었지만 나는 뒷걸음질 쳐서 ‘제 십자가’를 버리고 도망쳐버릴 것이다. 이방인이 되어 ‘피의 밭’을 서성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이 병은 하느님이 주신 ‘더 좋은 십자가’일 것이다. “나는 너희를 은처럼 불 속에서 녹여내고 고생의 도가니 속에서 너희를 단련시켰다.”(이사 48,10)라는 말씀처럼 하느님이 주신 ‘고난의 용광로’일 것이다.


나의 본래 모습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때 떠오른 생각은 뜻밖에도 불교적 화두였다. 1987년 여름, 나는 세례를 받고 가톨릭에 귀의했었다. 그 직후 불교에 심취하여 3년 동안 한 신문에 「길 없는 길」이란 소설을 집필하였고, 1993년 봄 전 4권짜리 장편소설을 펴낸 적이 있었다. 내가 불교에 깊은 관심을 갖고 집중할 수 있었던 것도 가톨릭에 입문한 뒤 느꼈던 충격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 놀라운 충격은 불교에 대한 관심으로 확대되어 3년 동안 운수승처럼 전국의 사찰을 행각(行脚)하며 ‘길 없는 길’을 집필했는데, 그때 공부했던 불교 중에 지금도 선명히 기억되는 공안(公案)이 있다.

당나라 때에 향엄이라는 선사가 있었다. 등주 사람으로 법명은 지한이었다.

향엄이 어느 날 스승 위산영우를 찾아가 불법에 대해 묻자 위산은 이렇게 답하였다.

“그대가 터득한 지식은 전부 부처께서 말씀하신 삼장십이부경(三藏十二部經)의 뜻을 의지하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그것을 묻지 않겠다. 아직 어머니의 배 안에서 태어나기 전의 본래면목(本來面目)에 대해서 한마디 일러보아라. 그것으로 그대의 공부를 가늠하겠노라.”

향엄은 여러 가지로 대답했으나 위산은 인정해 주지 않았다. 이에 향엄은 자기가 읽던 모든 책을 불살라버린 뒤 눈물을 흘리며 스승과 작별하고 암자에 들어가 수행을 하였다.

그러다가 하루는 마당의 풀을 베면서 무심코 던진 기왓장 한 조각이 대나무에 부딪치는 ‘딱’ 하는 소리를 듣고 순간 크게 깨달았다. 향엄은 스승에게 돌아가 깨달음을 인정받고 오도송(悟道頌)을 읊었다.

“작년 가난은 가난이 아니요 / 금년 가난이 비로소 가난이로다. / 작년에는 송곳 꽂을 땅이 없더니 / 금년에는 송곳조차 없더라.”

이 선화에서 나온 것이 그 유명한 화두, 곧 ‘그대가 아직 어머니의 배에서 태어나기 전의 본래 얼굴[父母未生前 本來面目]’이란 공안인 것이다.

주님께서 허락하신 병이 ‘치워질 수 없는 잔’이며 ‘제 십자가’라는 숨은 뜻인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느낀 순간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질문은 바로 그것이었다. 그렇다면 부모에게서 태어나기 전 나의 본래 모습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하는 불교적 화두였다.

나는 안다. 나는 지금 바로 이곳 성모병원에 누워있다. 내 이름은 최인호이고, 나를 간호하는 저 여인은 나의 아내라고 불리는 황정숙이다. 그러면 나는 어디서 왔는가.

내 아버지 최태원과 어머니 손복녀가 나를 낳았다. 그리고 내 아버지와 어머니도 할아버지와 할머니로부터 왔음을 나는 안다. 그 할아버지도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왔으며, 독생자(獨生子)가 있을 수 없는 한 그 아버지는 또한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태어났다. 나는 그 아버지의 아버지의 그 아버지를 본 적도 없고 알지도 못한다. 그러나 그 아버지의 아버지가 있음으로 내가 바로 지금 여기에 있음을 나는 안다.

그것은 아내 역시 마찬가지다. 황정숙은 어머니로부터 왔고, 그 어머니는 또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를 통해 왔다. 황정숙은 그 어머니의 어머니를 모르지만 그녀가 내 곁에 있기 위해서는 수천 년, 아니 수만 년의 계주경기에서 생의 바통을 건네받아 지금 여기 내 곁에 아내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 최인호는 창세기의 첫 구절인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지어내셨다.”는 내용의 ‘한처음’에서 비롯된 것은 명백하다. 나는 ‘진흙으로 빚어내신 후 입김을 불어넣으니 비로소 사람이 되어 숨을 쉰 한처음’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이 최초의 인간은 ‘당신의 모습대로 지어내신 하느님의 복제품이자 사람의 원형’이다. 우리는 ‘한처음’으로부터 온 존재이며, 곧 ‘천지가 창조되기 전’(요한 1,1) 말씀을 통해서 생명을 얻은 절대적 존재인 것이다.

이것이 환상인가, 허구인가, 신화인가. 아니다. 나 최인호가 바로 지금 여기 병실에 있다는 것은 ‘부모가 태어나기 전부터의 본래면목’, 곧 ‘참나[眞我]’가 있었음을 입증한다.


선악과를 따먹기 전의 ‘참나’

그때 내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였다. 내가 성경을 제일 처음 접한 것은 초등학교 입학할 무렵 피난 간 부산의 바닷가 교회에서였다. 성경의 첫머리가 누가 누구를 낳고, 누가 누구를 낳았다는 지루한 족보였다.

신약성경의 첫 장은 어릴 때의 기억대로 ‘나코(낳고) 복음’이다. 아브라함에서부터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할 때까지 42대의 족보를 상세하게 적어놓은 기록이다. 아마도 이는 예수가 유다 민족의 조상이자 하느님을 유일신으로 섬기는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적손(嫡孫)임을 증거하려는 뚜렷한 목적을 가진 의도이며, 또한 하느님으로부터 약속된 “세상 만민이 네 후손의 덕을 입을 것이다.”(창세 22,18)라는 맹세처럼 아브라함의 후손인 예수야말로 세상 만민을 구할 구세주, 곧 그리스도임을 만천하에 공포하려는 선언문이다.

루카도 역시 예수의 족보를 기록하고 있지만 마태오와 달리 예수를 아브라함을 뛰어넘어 “아담, 그리고 마침내 하느님께 이른다.”(루카 3,38)고 기록하고 있다. 마태오가 예수를 유다인의 시조인 아브라함의 적손임을 증거하려고 족보를 기재하였다면, 루카는 예수를 인류의 조상인 아담을 만든 하느님의 외아들임을 증거하려고 족보를 기재했던 것이다.

그 목적이야 어떻듯 예수 역시 아버지인 요셉과 요셉은 그의 아버지인 야곱, 야곱은 그의 아버지인 마탄을 통해 왔으며, 다윗 왕과 아브라함을 거쳐 결국 부모들이 태어나기 전, 곧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의 한처음에서부터 온 것임은 움직일 수 없는 진리다.

물론 예수는 우리 사람들처럼 죄 중에 태어나신 것이 아니라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힘이 감싸주시는 성령의 잉태’로 하느님의 아들에서 ‘사람의 아들’로 인류 속에 뛰어드셨다. 이는 바오로 사도의 말처럼 ‘일찍이 하느님께서 당신의 예언자들을 통하여 약속하신 구세주를 인류사회에 구현시킨 것’이며, 이는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시어 그분을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시려는 사랑’(요한 3,16 참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정말 잘 들어두어라.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요한 8,58)라고 말씀하셨을 때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이 돌을 들어 주님을 치려고 했던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또한 주님께서 “그리스도가 누구의 자손이겠느냐?” 하고 물으셨을 때 사람들이 ‘다윗의 자손’이라고 대답하자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불렀는데 그리스도가 어떻게 다윗의 자손이 되겠느냐?”(마태22,41-45 참조)라고 꾸짖고 자신은 비록 ‘사람의 아들’이지만 ‘그들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이사악의 주님’임을 암시하고 있다.

나의 죄는 인류의 조상인 아담이 지은 원죄에서 비롯된다.

아담과 하와는 창조주인 하느님께서 에덴동산의 한가운데 있는 선악과만은 절대 따먹지도 만지지도 말라고 하셨으나 뱀의 유혹에 넘어가 그것을 따먹는다. 그러자 ‘두 사람은 눈이 밝아져서 자기들이 알몸인 것을 알고 무화과 나뭇잎을 엮어 앞을 가린다.’ 이렇게 성적 수치를 알게 되었고, 선과 악을 알게 되었으며, 자아(自我)가 생김과 동시에 자신의 죄를 남에게 전가하는 핑계와 죄의식에 따른 변명과 악의 상징인 거짓의 어둠을 알게 되어 마침내 에덴의 동산에서 추방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모가 태어나기 전의 본래면목’은 인류의 시조인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기 전의 ‘참나’를 가리키는 원형의 모습일 것이다.

이 본래면목의 ‘참나’는 한때 우리 자신의 원형이었다.


주님의 눈과 마주칠 수 있다면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하려고 ‘사람의 아들’로 육화되어 오셨다면 우리는 ‘사람의 아들’에서 ‘하느님의 아들’로 영적으로 거듭나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이 오직 ‘자기[自我]’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길이며 생명이 지닌 전인적 존재로서 인간이 추구해야 할 최고의 가치이며 부활의 참의미가 아닐 것인가.

향엄 스님은 ‘이번 생에는 불법을 깨닫지 못하겠다.’고 절망했지만 용맹정진 끝에 무심코 던진 기왓장 한 조각이 대나무에 부딪치는 ‘딱’ 소리에 크게 깨닫고 부모가 태어나기 전의 참나, 곧 ‘본래면목’을 견성하였다.

주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실 때 첫 일성으로 ‘하늘나라가 다가왔다.’고 선언하셨다면 하늘나라는 이미 와있다.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른다면 어느 날 문득 하느님이 ‘빚어 만드신 최초의 참사람’으로 돌아가 하늘나라의 원죄 없는 원형인간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 아니겠는가.

철학자 스피노자는 말하였다.

“지금 이 순간을 영원의 눈에서 바라보십시오.”

심학규는 공양미 삼백 석이 있어야만 눈을 뜨는 줄 알았다. 그러나 심봉사의 눈을 뜨게 한 것은 바로 눈앞에 있는 자신을 위해 죽었던 심청이를 보고 싶다는 참사랑의 열망 때문이었다. 스피노자의 말처럼 지금 이 순간을 시작도 끝도 없는 ‘이제와 항상 영원한 시선’에서 바라본다면 우리는 우리를 위하여 치마를 뒤집어쓰고 임당수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심청이의 본래면목을 볼 수 있을 것이며 나의 참모습을 견성할 수 있게 될 것이 아니겠는가.

눈을 뜨는 데는 공양미 삼백 석과 같은 수천 년 세월이 걸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보는 것은 ‘심청가’에 나오듯 ‘휘번쩍’ 눈을 뜨는 한순간이다.

주님은 지금 이 순간에도 ‘몸을 돌려 우리를 똑바로 보고 계신다’(루카 22,61 참조). 여전히 닭은 한 번, 두 번, 세 번, 울고 있다. 베드로가 주님의 곁에 그렇게 있었지만 주님과 눈이 마주치는 것은 그때가 처음이다. 주님의 눈과 마주칠 수 있다면 나는 베드로처럼 밖으로 나가 슬피 울며 회개할 수 있을 것이며 본래면목, 곧 ‘참나’의 새 인간으로 거듭나 부활할 수 있을 것이 아니겠는가.

아아, 이제야 나는 알겠다. “머지않아 그분의 뜻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라는 젊은 신부님의 메시지를. 젊은 신부님을 통해 말씀하신 주님의 숨은 뜻을. “우리는 죽지 않고 모두 변화할 것입니다.”(1코린 15,51)라고 말한 바오로적 부활의 참의미를.

우리도 주님처럼 얼굴은 태양처럼 빛나고 옷은 세상의 어떤 마전장이도 그보다 더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고 눈부시게 변화할 것이다.

* 최인호 베드로 - 소설가. 1945년 서울 출생, 고등학교 2학년 때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입선하였고, 등단 이후 수많은 작품을 내놓았다. 「길 없는 길」로 불교출판문화상을 받았으며, 1998년 제1회 한국가톨릭문학상을 받았다. 지난해 투병 중에 장편소설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를 펴냈다.

[경향잡지, 2012년 4월호, 최인호 베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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