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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 목숨을 끊는 이들과 남겨진 이들: 자살자와 유가족에 대한 교회의 역할과 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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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11-18 ㅣ No.1608

[경향 돋보기 - 목숨을 끊는 이들과 남겨진 이들] 자살자와 유가족에 대한 교회의 역할과 고민

 

 

죽은 이의 영혼을 위로하는 신심 기간

 

가톨릭교회는 전례력에 따라 11월을 위령 성월(慰靈聖月)로 보낸다. 위령 성월은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죽은 이의 영혼을 위로하는 특별한 신심 기간’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위로’는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한 기도를 먼저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특히 연옥에서 고통받는 영혼들이 정화되어 하느님 나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살아 있는 이들이 희생하고 선행을 베푸는 행위를 뜻하기도 한다.

 

위령의 날을 통상 11월 2일에 지키는 것과 바로 전날인 11월 1일을 모든 성인 대축일로 지키는 것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가톨릭 신자들이 미사 때마다 바치는 사도 신경에서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로 표현되는 통공 교리는 교회를 이루는 세 구성원, 곧 세상에 살아 있는 신자들, 하느님 나라에서 복락을 누리는 성인들, 그리고 아직 고통을 겪는 연옥 영혼들이 하느님 안에서는 하나로 연결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이것은 위령 성월 기간 동안, 살아 있는 이들이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 기도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하느님 나라에 먼저 간 모든 성인이 현세를 사는 이들을 위해서도 기도하고 있음을 믿고 기억해야 한다는 교회의 가르침이다.

 

또한 신자들이 살아생전 하느님과 맺은 친교는 죽어서도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 곧 하느님의 백성은 죽음이 끝이 아닌, 생과 사를 초월한다는 진리를 보여 준다. 이처럼 죽음은 그리스도인에게는 또 다른 삶의 시작이기도 하다. 그러나 인간 실존의 본능은 죽음에 대한 공포와 슬픔을 가지고 살기에 교회에서 산 이들이 바치는 이 시기의 기도는 큰 위로와 힘이 될 것이다.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이들

 

현대를 살아가는 이들 가운데는 죽음의 공포보다 더한 생의 두려움 속에서, 삶이 아닌 죽음을 스스로 선택한다. 9월 10일은 ‘세계 자살 예방의 날’이다. 이날은 2003년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세계보건기구(WHO)와 국제자살예방협회(IASP)가 전 세계에 생명의 소중함을 알리고 자살 문제에 대응하려고 공동으로 제정했다. 이에 한국자살예방협회는 2007년 이후 해마다 9월 10일 기념식과 학술 대회, 자살 예방 캠페인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친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자살률은 14년 동안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1위를 벗어나지 못한 채 지난 2017년 한 해 동안 1만 2463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자살로 가족을 잃은 이들, 곧 유가족은 4인 가족을 기준으로 할 때 한 해 50만 명 이상 생기는 것이다.

 

자료에 따르면 자살 사별자는 일반인보다 우울증에 걸릴 위험이 7배, 자살 위험은 8.3배나 된다. 자살 사별자에게는 가까운 사람을 예상치 못하게 잃은 슬픔뿐 아니라 자살을 막지 못했다는 자책감과 무력감, 고인에 대한 분노와 원망, 생전의 일에 대한 죄책감과 그리움 등 복합적인 감정이 순차적으로 또는 동시에 일어난다. 더불어 고인이 남긴 경제적 부채를 해결하거나 함께 지던 책임을 혼자 감당해야 하는 경우도 생긴다.

 

따라서 자살을 예방하고, 자살을 시도한 자에 대한 지원과 더불어 자살 사별자에 대한 사회적 지원과 교회적 돌봄이 반드시 필요한 현실이다.

 

 

하느님의 선물로 받은 생명

 

자살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은 무엇인가? 성경에서 자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더라도 이를 죄로 판결한 부분은 나타나지 않는다(판관 9,54; 16,30; 2마카 14,41-46 참조). 또한 자살을 금지한 적도 없다. 부분적으로 나라나 민족을 위한 희생으로 나타나기도 하고(판관 16,30 참조), 죄책감으로 말미암은 자살(마태 27,5 참조)에 대해 언급하지만 자살에 대한 윤리를 언급한 것은 아니다.

 

성경에 나타난 자살은 책임감이나 죄책감 그리고 수치심을 견디지 못해 발생한다. 더욱이 눈여겨봐야 할 부분은 이들은 자살을 문제 해결 방법으로 선택하며, 많은 부분에서 자살은 죄와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가톨릭교회는 ‘생명의 복음’을 믿고 실천하려는 ‘생명의 백성’으로 구성된 신앙 공동체라는 정체성을 지닌다. 인간의 생명을 위시한 일체의 생명체가 생명의 원천으로 여기는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창조된 피조물이라는 신앙에 의거하여 생명 일반의 신성성을 확신한다. 그러기에 생명을 존중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런 맥락에서 가톨릭교회는 하느님의 선물로 주어진 생명을 위협하는 모든 요인에 대하여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한다.

 

가톨릭교회에서는 인간의 생명이 존중되고 실현되는 가치와 목적은 자연법과 절대적 진리(계시)를 따라 살아갈 때 가능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때문에 인간이 자유 의지를 남용하여 자신의 생명을 마음대로 결론짓는 결과로 드러난 자살은 가장 큰 죄악으로 판단한다.

 

가톨릭교회 교리의 정통 가르침과 핵심을 담은 「가톨릭교회 교리서」에서는 자살을 다음과 같이 다룬다.

 

“2258 인간의 생명은 신성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 생성 시초부터 하느님의 창조 행위에 연결되며 또한 모든 생명의 목적이기도 한 창조주와 영원히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만이 그 시작부터 끝까지 생명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어떤 경우에도 무죄한 인간의 목숨을 직접 해칠 권리를 주장하지 못한다.

 

2280 사람은 저마다 자기에게 생명을 주신 하느님 앞에서 자기 생명에 책임을 져야 한다. 생명의 최고 주권자는 바로 하느님이시다. 우리는 생명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 하느님의 영광과 우리 영혼의 구원을 위해 보존할 의무가 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생명의 관리자이지 소유주가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명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없다.

 

2281 자살은 자기 생명을 보존하고 영속시키고자 하는 인간의 본성적 경향에 상반되는 것이다. 또 올바른 자기 사랑에도 크게 어긋난다. 그와 동시에 자살은 이웃 사랑도 어기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살은 우리가 고맙게 생각해야 하는 가정, 국가, 인류 사회와 맺는 연대 관계를 부당하게 파괴하기 때문이다. 자살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사랑에 어긋나는 것이다.”

 

 

유효한 회개의 길을 줄 수 있기에

 

가톨릭교회가 자살에 대해 이처럼 강력하게 반대하는 이유는 한 마디로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직접적으로 거부한다는 데에 있다. 하지만, 자살의 여러 형태들에는 고귀한 생명을 의도적으로 거부하는 형태로만 이해되지 않는 자살도 있다는 것도 언급해야 한다. 자살이 비록 결과적으로 매우 충격적이고 극단적인 형태로 드러나는 것이긴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가 중대한 범죄로 판단하는 형태가 아닌 자살의 형태도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의미이다.

 

1917년 옛 교회 법전에 있던 자살자에 대한 장례 금지 조항은 1983년 개정 반포된 「교회 법전」에서 삭제되었다. 또한 “하느님께서는 당신만이 아시는 길을 통해서 그들에게 구원에 필요한 회개의 기회를 주실 수 있다. 교회는 자기 생명을 끊어 버린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한다.”(가톨릭교회 교리서, 2283항)고 가르친다.

 

그러니 교회 공동체는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를 단죄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아픔과 고통을 헤아려 주고, 그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 함께 기도해야 한다. 그와 더불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들의 남겨진 가족들에게도 주님의 연민의 마음으로 위로하고, 그들의 절망과 슬픔을 들어주며, 그 고통에서 회복될 수 있도록 교회가, 우리가, 내가 함께 그들의 손을 잡아 주어야 한다.

 

자살은 더 이상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의 문제라는 인식과 이제 우리 모두가 자살을 예방하고 생명을 지켜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교회도 이런 사회적 인식에 발맞추어 더 이상 금기시하지만 말고 자살 위기자들의 고통과 가족의 자살로 고통받는 유가족들의 아픔에 좀 더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어야 한다.

 

삶의 위기를 느끼고 자살을 생각하는 이들 가운데 많은 이가 자신의 고통과 아픔을 가족들에게 나누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모습을 많이 본다. 자신으로 말미암아 가족들이 함께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원치 않는 마음으로 홀로 그 고통의 짐을 지다 외롭게 삶을 끝내려 한다.

 

한편으로는 이해되는 부분도 있지만, 이러한 극단적인 선택은 남은 가족들에게 더 큰 고통을 줄 것은 너무도 분명하다. 지난 2014년 한국을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종교 지도자들과의 만남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했다.

 

“삶이라는 것은 길입니다. 혼자서는 갈 수 없는 길입니다. 다른 형제들과 함께 걸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서로를 필요로 하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혼자서는 갈 수 없는 길이다. 이제 나만이 아닌 우리가 기쁨, 행복뿐만 아니라 아픔과 절망도 함께 나누며 비록 폐를 좀 끼치더라도 도움을 청할 용기를 내고, 교회 공동체 안에서 나누고 들어준다면 조금은 어렵고 불편하더라도 우리 삶의 길이 외롭지 않고 따뜻하리라 믿는다.

 

 

예수님이 바라시는 모습

 

지난 2010년에 문을 연 한마음한몸운동본부 자살예방센터는 자살 예방 교육과 캠페인, 상담을 통해 교회 안에 자살로 고통받고 있는 많은 이를 돕는 활동을 한다. 자살 예방 교육을 통해 자살을 생각하는 이들을 좀 더 적극적으로 도울 수 있는 구체적 행동들을 알게 되고, 그들의 고통에 귀 기울일 수 있게 된다.

 

또한 해마다 자살 사별자들을 위한 ‘해바라기 슬픔 돌봄 모임과 피정’을 진행한다. 스스로 교회를 떠났던 이들이 이 모임과 피정을 통해 공감과 치유를 얻고 교회로 돌아와 다시 봉사와 나눔을 시작하는 이들을 보게 된다. 그들이 끝이 없을 것 같던 어둠의 시간 속에서 주님의 빛을 발견하고, 그 빛을 통해 다시 희망을 발견하며 교회와 세상 안에서 다시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 또 다른 부활을 만나게 된다.

 

그들이 절망과 죽음의 터널을 나오기까지는 상상할 수 없는 긴 시간이 걸릴 수 있다. 하지만 그 시간 동안 혼자가 아니라 누군가가(또는 우리 교회 공동체가) 함께 기도하고 그 손을 잡아 준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듯이 자살 위기자들, 자살 시도자들, 자살 사별자들도 죽음을 생각했던 슬픔 속에서 작은 희망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아마도 이것이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교회 공동체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한다.

 

자살 예방은 한 사람의 노력이나 한 기관의 노력으로 가능하지 않다. 정부와 민간기관들의 협력도 매우 중요하다. 민간 기관들 가운데 종교 기관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신앙만이 할 수 있는 역할이 분명 있다. 지역 사회 안에서 더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기를 희망해 본다.

 

“교회는 단죄하려고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라는 그 애끓는 사랑을 만나게 하려고 있습니다. 이 만남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본당에서 나가서 사람들이 살고, 고통받고, 희망하는 곳으로 그들을 찾아가야 합니다”(프란치스코 교황, 「신의 이름은 자비입니다」).

 

* 손애경 마리잔느 - 예수성심전교수녀회 수녀. 서울대교구 한마음한몸운동본부 자살예방센터장을 맡고 있다. 부산가톨릭대학교에서 사회복지학을 공부했고, 가톨릭상담심리대학원 영성상담심리학과에서 공부하고 있다.

 

[경향잡지, 2018년 11월호, 손애경 마리잔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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