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8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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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카잔의 성모 성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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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7-05 ㅣ No.1558

[은총의 성모] 카잔의 성모 성화

 

 

카잔의 성모 성화는 러시아 정교회에서 가장 사랑받는 성화로서 수세기 동안 러시아의 수호자로 공경을 받아왔으며, 모스크바와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비롯하여 러시아 전역의 수많은 정교회 성당들을 카잔의 성모께 봉헌하고, 이 성화의 모사품들을 모시고 공경하고 있다. 이 이콘은 호데게트리아(Hodigitria), 즉 ‘길의 인도자 성모’ 이콘의 한 변형으로 성모 마리아와 함께 아기 예수는 상반신만 묘사하고 성모님의 두 팔은 보이지 않고, 아기 에수의 왼손도 겉옷에 가려져 보이지 않으며 아기 예수의 오른손만 위로 들고 축복을 주시는 모습으로 묘사한다. 성모의 머리는 아기 예수께로 조금 숙여져 있다.

 

카잔의 성모의 성화는 13세기에 콘스탄티노플에서 러시아로 가져 온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모스크바에서 500마일 거리의 볼가강 유역에 위치한 카잔이라는 도시에 보관되고 있었다. 그러나 1438년 타타르인들의 침략 이후 이 이콘은 사라져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1552년 이반 뇌제가 카잔을 해방시키고, 1579년 엄청난 화재가 일어나 카잔은 잿더미가 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거나 다쳤고, 집과 모든 소유물을 잃고 이재민이 되었다.

 

그 이재민 중에 한 군인과 그의 가족들이 있었는데 그들의 어린 딸 마트로나에게 성모님께서 나타나 불에 탄 도시의 한 돌 더미 속에서 성화를 찾아내도록 명하셨다. 마트로나가 어머니에게 이 이야기를 하자 소녀의 어머니는 그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두 번 더 같은 꿈을 꾼 후 성모님은 세 번째로 나타나 다시금 엄한표정으로 말씀하셨다. 1579년 7월8일 소녀와 그녀의 어머니는 성모님께서 지적해 주신 장소로가 돌 더미를 들어내자 낡은 천으로 감싸여진 대단히 오래된 성화가 있었다. 그 이콘은 타타르의 점령시기에 성화를 보호하기 위해 오랜 기간 숨겨져 있다가 화재로 집이 무너지며 그 속에서 발견될 수 있었다. 이 이콘은 발굴 당시 불속에서도 타지 않고 새 것처럼 밝고 아름답게 보존되어 있었다.

 

 

불속에서도 타지 않고 아름답게 보존돼 발굴

 

이렇게 기적적으로 성화를 찾아냈다는 말이 퍼져 나가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카잔의 대주교는 이 성화를 성 니콜라스 성당으로 옮겨 모셨다. 바로 이날 눈먼 사람이 치유 되는 등 이후로도 수많은 기적들이 이 성화 앞에서 일어났다. 당시 그 성당의 주임사제였던 헤르모겐은 훗날 카잔의 대주교가 된 후 카잔의 천주의 모친께 영예를 드리기 위해 7월8일을 축일로 정하고 성모 영보 주교좌 성당으로 이 성화를 다시 옮겨 모셨다.

 

이후 이 성화는 특히 러시아 역사에서 가장 어려운 시기마다 러시아 백성들과 함께 하면서 위로와 희망을 주었다. 1621년 헤르모겐은 모스크바와 전 러시아의 총대주교가 되어 있었다. 이때 헤르모겐 총대주교는 미닌과 포야르스키 왕자에게 카잔의 성모 성화를 모셔 와서 적들과 대적해 싸우라고 권했다. 이에 두 왕자와 백성들은 이 거룩한 성화 앞에서 간절한 기도를 바치고 이 성화를 앞세우고 나아가 1612년 11월27일 러시아군은 마침내 폴란드 군대를 모스크바로부터 쫓아내고 도시를 탈환했고, 적을 섬멸했다. 이에 러시아인들은 하느님의 어머니의 중재 덕분에 승리를 얻었다고 생각하게 되어 이 카잔의 성모성화를 엄숙히 모시고 환희의 행렬을 지어 되찾은 모스크바로 행진해 들어갔다.

 

이후로 이 카잔의 이콘은 러시아 국민의 신앙의 중심점이 되어, 미하일 페오도르비치는 왕위에 오르자 이 성화 발견일인 7월8일과 폴란드로부터의 승리일인 10월22일을 다 같이 카잔의 성모께 경의를 드리는 축일로 정했다. 이후 Dmitry Pozharsky 왕자는 모스크바 크렘린에 카잔의 성모께 바치는 작은 목조 성당을 건설하여 이 카잔의 성모 이콘을 보존했다. 그러나 1632년 화제로 목조 성당이 소실되자 황제는 그 성당을 대신하여 더 큰 규모의 벽돌 성당건설을 명령했다. 1638년 건축이 완료 되고 약 2세기 동안 이 모스크바의 카잔 성당에 이 성화는 보존되어 있었다. 그리고 정기적으로 모스크바의 수호자로 성벽을 따라 엄숙한 기도 행렬을 하기 위해 옮겨졌었다.

 

 

공산주의의 몰락과 참된 신앙의 승리 보여줘

 

카잔의 성모의 중재기도는 1709년 스웨덴이 침략 하자 다시금 큰 힘을 발휘하여 러시아를 구했고, 19세기 나폴레옹과 그 군대들이 모스크바를 점령했을 때도 러시아인들은 다시금 카잔의 성모님께 보호해 주심을 청하며 대적하여 나폴레옹을 물리치고 승리를 얻었다. 1821년 러시아인들은 당시 제국의 수도인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카잔의 성모께 웅장한 대성당을 지어 봉헌함으로서 그들의 감사하는 마음을 나타내 보였다. 그 성당은 약 30년에 걸쳐 지어졌는데, 1917년 혁명 때까지 러시아인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는 성지로 사랑 받았다. 이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새로운 카잔 성당이 완성되자 모스크바에 모셔졌던 성화는 이곳으로 옮겨 모셨다.

 

이때 이 성화의 사본이 9개 제작 된 것으로 전해지는데 1904년에 카잔에 보존되던 사본 중 하나는 보석과 금으로 만든 커버를 탐낸 도둑들에 의해 도난 맞았고, 상트 뻬떼르부르그에 보관된 것 중 하나도 1917년 10월 혁명 후 사라졌다. 이에 어떤 이들은 교회가 볼세비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국외로 반출했다고 말하기도 하고, 공산주의자들이 해외에 매각 했다고도 전한다. 이후 서방세계에서 카잔의 성모 성화 하나가 발견되었고 이것이 진정 원화인지는 논란이 있었지만 마리아의 푸른 군대에서 매입 보관 하다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러시아 정교회에 반환 되었다.

 

그리고 1917년 혁명 후 공산주의자들은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 입구에 세워진 또 다른 카잔의 성모성화를 모셔 놓은 성당을 헐어버렸다. 이후 이 자리에 다른 건물들을 세우려는 시도가 여러 번 있었지만 이 장소에는 항상 건축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져 결국 1990년대 공산주의 몰락 때까지 아무런 건물도 세울 수 없었다. 결국 1990년대까지 빈터로 남아 있다가 공산주의 몰락이후 카잔의 성모께 봉헌된 성당을 재건하게 되었다.

 

이렇게 카잔의 성모 성화는 러시아의 역사 속에서, 특히 국난에 처할 때마다 도움을 주심으로써 하느님의 자비로우심과의 깊은 사랑을 깨닫게 해주었고,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던 해인 1917년 파티마에서 성모님께서 말씀 하신대로 공산주의의 몰락과 참된 신앙의 승리를 다시금 보여 주셨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6년 7월호, 장긍선 예로니모 신부(서울대교구 이콘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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