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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신학ㅣ사회윤리

[사회] 복음으로 세상 보기: 사회적 참사와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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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12-12 ㅣ No.1616

[복음으로 세상 보기] 사회적 참사와 공동체

 

 

개인의 슬픔과 고통, 공동체의 무관심

 

“사회적 참사”라는 말이 있습니다. ‘참사’란 비참하고 끔찍한 일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사회적이라는 수식어가 붙으면 문제는 더 커집니다. 개인이 겪게 되는 고통과 슬픔이 사회적 영역으로 확장됩니다. 사실 온 세상이 한 하느님의 피조물이며, 그분의 뜻에 의해 질서 지어진 것이라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개인의 문제로 국한되는 참사는 없습니다. 모두가 사회적 참사가 될 여지가 있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지역과 공동체에 커다란 파장을 일으키는 참사인 경우, 다시 말해서 영향이 큰 참사인 경우에 사회적 참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그 영향은 단지 비극적인 일을 당한 당사자 중심으로만이 아니라 더 큰 공동체의 것으로 판단될 때 그 사회는 이 참사에 대한 책임이 있습니다. 간단히 말씀드려서 공동체의 아픔과 고통으로 받아들여 이를 함께 처리하고 치유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수많은 사회적 참사를 겪어왔습니다. 특별히 1990년대 이후 들어온 것만 해도 삼풍백화점 붕괴, 성수대교 붕괴, 대구지하철 화재, 아현동 가스폭발, 마우나 리조트 붕괴, 수십 명에서 수백 명의 목숨을 앗아간 대형 참사를 겪었습니다. 참사가 일어나면 사람들의 반응은 당연히 “왜?”였습니다. 그 무시무시한 일들이 왜 일어났는지 궁금했던 것입니다. 궁금함 뒤에는 불안이 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에 대하여 알아야 다음에 일어날 참사를 막을 수 있는데 과거에는 단순히 원인만을 밝히는데 급급했습니다. 다리가 무너진 것은 하중을 견디지 못해서, 불이 난 것은 방화로, 가스폭발은 압력이 조절되지 않아서….. 이런 식으로 단편적인 원인 규명에만 머물러 대형 참사가 일어나기까지의 모든 연결 고리를 풀어내지는 못했습니다. 그리고 국가와 일차적인 책임이 있는 회사나 기관이 적당한 보상을 통하여 사건을 마무리하려 했습니다. 사회적 참사는 그 해결과 치유 또한 사회적인 방식을 통해 이루어져야 하는 데 사회적으로 대처하기는커녕 개별적으로 끝내버리려 했던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모든 참사는 예견된 일이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견딜 수 없는 무게를 용납하고, 버틸 수 없는 한계를 묵인하고, 얼마든지 예방할 수 있는 것을 개별적인 책임과 처리로 해결했기에 사회적인 영향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영향이 없으면 변화도 없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대형 참사가 일어난 뒤 원인들을 조목조목 따지지만 얼마 되지 않아 똑같은 원인들로 인해 반복되는 다른 사고가 이미 준비되고 있습니다. 모든 결과는 원인을 가지고 있듯이 모든 사회적 참사에는 공동체에 그 사회적 원인이 있다는 것을 잊었기 때문입니다.

 

 

사회적 참사에 대한 예수님의 대처법

 

그렇다면 이러한 사회적 참사에 대해서 예수님은 어떻게 그 원인을 찾아내실까요? 빌라도가 갈릴래아 사람들을 죽인 사건이 발생했을 때의 예수님의 반응입니다. “너희는 그 갈릴래아 사람들이 그러한 변을 당하였다고 해서 다른 모든 갈릴래아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 또 실로암에 있던 탑이 무너지면서 깔려 죽은 그 열여덟 사람, 너희는 그들이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큰 잘못을 하였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루카 13, 2-5)

 

예수님께서는 사고 당사자에서만, 피해 당사자에서만 그 원인을 보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공동체의 일로 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한 공동체에서 불법과 탈법으로 개인적인 이익을 취하려고 다른 이들의 공익을 무시하여 벌어지는 모든 일들은 공동체의 범죄라며 개인에 국한시키지 않고 세상의 일로 들어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모든 사건을 바라보실 때 온 백성과 피조물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눈으로 바라보십니다. 어느 하나의 아픔에 국한하지 않으시고 하나의 아픔에서 모두의 고통을 보고 계십니다.

 

이런 관점으로 바라볼 때 공감은 이루어집니다. 개별화하지 않고 사회화하는 것입니다. 묻지 않고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공동체 구성원 모두의 문제로 확산시키십니다. 모두의 문제가 되면 중하게 여기게 되고, 중하게 여기게 되면 실질적인 해결의 수순으로 이루어지며 모든 고통과 슬픔은 예방 가능한 미래의 신호등이 되는 것입니다.

 

 

잠자는 공동체를 일깨우는 외침들

 

손목에 노란 팔찌를, 가슴에 노란 리본을 달고 다닙니다. 벌써 한참 전부터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 귀에 못이 박혔습니다. “아직도?”입니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4년 6개월이 지났는데 아직도 티를 내냐고 말입니다. 사실 세월호가 똑같은 조건에서 오늘 밤 출항한다면 똑같은 사고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거대한 해양 참사가 일어났는데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여태껏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똑같은 조건이라면 어느 때라도 이루어질 수 있는 일에 대비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세월호 피해자 가족들의 아픔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에서 출발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제시된 것은 돈이었습니다. 여러 가지 특혜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단법인 “4.16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을 위한 피해자가족협의회”는 세월호 유가족들과 피해자 가족들은 이 모든 것보다 진상규명과 앞으로 같은 참사가 없기를 바라는 쪽으로 마음을 정했습니다. 그래서 미련하게 보이고 고집스럽게 보이지만 지금도 거리 곳곳에서, 전국 각지에서 “부모이기에 포기할 수 없습니다”는 글귀가 새겨진 노란 옷을 입고 진상규명과 안전사회를 위한 활동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아픔을 공동체의 문제로, 사회적 쇄신의 열쇠로 삼은 것입니다.

 

피해자 가족들의 이런 활동과 같은 희생을 반복하는 어리석음에서 깨어나고자 모든 것을 공동체적 시각에서 바라보려는 시민들과의 헌신이 맞물려서 우리 사회에 경종을 울리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아픔은 우리 모두의 아픔이라고 말입니다.

 

 

몸을 이루는 지체들

 

사도 바오로의 결정적인 말씀들이 우리 사회를 깨웠으면 좋겠습니다. “몸은 한 지체가 아니라 많은 지체로 되어 있습니다.” “사실은 하느님께서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각각의 지체들을 그 몸에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몸의 지체 가운데에서 약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이 오히려 더 요긴합니다.” “한 지체가 고통을 겪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겪습니다.” 코린토 전서 12장의 말씀들처럼 우리 모두가 가로막고 있는 모든 벽을 부수어 한 몸으로 살아갈 때 우리가 겪은 사회적 참사는 우리를 안전하게 이끄는 이정표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8년 12월호, 나승구 F. 하비에르 신부(서울대교구 빈민사목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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