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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복자 124위 열전61: 이양등, 김종륜, 허인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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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5-24 ㅣ No.1490

[복자 124위 열전] (61) 이양등 · 김종륜 · 허인백


박해 피해 동굴서 생활하다 체포돼 순교, 유해는 대구 복자성당에


 

복자 이양등 베드로


한국 천주교회에 ‘천주교 신자들의 신앙 집단’, 곧 교우촌이 나타난 것은 1791년 진산 사건으로 박해가 본격화된 이후다. 하지만 기록으로는 1801년 신유박해를 전후해 충청ㆍ경기ㆍ강원 남부ㆍ경상 북부에서 교우촌이 형성된 것으로 보고되고 있고, 1830년대 초에는 전라와 경상 남부에까지 확대된다. 이처럼 박해와 함께 확대일로를 걸었던 교우촌은 지역 교회 중심지이자 순교 터전, 성직자들의 피신처이자 사목 활동 근거지로서 기능했다. 그랬기에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된 이후 교회의 주목을 받았고, 훗날엔 교회사적지로 조성되기도 했다.

1866년 초부터 1873년까지 무려 8년간 이어지는 병인박해 무렵이 되면, 남도의 교우촌은 이미 정착 단계를 넘어 제도화되는 단계로 접어들었다. 최양업 신부가 1860년 9월 3일자 서한에서 그해에 벌어진 경신박해 때 자신의 사목 관할 구역에서 17명이 체포됐고, 이 가운데 10명이 경주진영 감옥에 갇혀 있다고 기록하고 있는 걸 보면 이미 교우촌이 성숙 단계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경상좌도, 곧 낙동강 동쪽 남부 지역 경주 인근의 대표적 교우촌은 언양 간월, 울산 죽령 교우촌을 꼽을 수 있다. 1830년대 이후 박해를 피해 신자들은 울산광역시 울주군 상북면 일대 산간벽지로 숨어들었고, 그 행렬은 꾸준히 이어져 끈끈한 신앙 공동체를 이뤘다. 그렇지만 이들 공동체 또한 박해를 피해가지 못했다.

복자 김종륜 루카


1866년 병인박해의 손길이 뻗쳐오자 죽령 교우촌(울주군 상북면 배내로 대재 일대)을 이끌던 이양등(베드로, ?∼1868) 회장과 김종륜(루카, 1819∼1868), 허인백(야고보, 1822∼1868) 등은 식솔을 이끌고 경주 단석산 소태골로 숨어든다. 지금의 행정 구역으로는 경북 경주시 산내면 소태길 22-58 진목정 성지 뒷산 천연 동굴인 범굴이다.

지금은 비바람에 무너진 그 동굴에서 이 회장 일가 3명과 김종륜 일가 5명, 허인백 일가 4명 등 12명이 살았다고 한다. 부인들은 읍내로 나가 먹을거리를 구걸해오고, 남자들은 짚신을 삼아 팔면서 살았다고 한다. 피신 생활은 2년 동안 이어졌지만, 끝내 박해의 마수를 피하지는 못했다.

이양등 회장과 김종륜, 허인백은 1868년 재개된 무진박해로 경주의 포졸들에게 붙잡혔다. 이들이 잡힌 곳이 범굴이었다는 설, 경주 읍내로 내려갔다가 잡혔다는 설이 있지만 둘 다 명확하지는 않다. 다만 이들 순교자 3위가 교우들과 함께 체포돼 경주 관아로 압송됐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죽령 교우촌 또한 이들 3위와 여러 교우가 잡혀가면서 풍비박산이 난다.

당시에 붙잡혀간 순교자들 면면을 보면, 죽령 교우촌이 얼마나 다양한 인물들로 이뤄져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이양등 회장은 성품이 선량했고 열심히 수계생활을 했던 인물로 알려졌는데, 무진박해 당시 꿀을 팔러 다니다가 잡혀 경주진영에 끌려갔다고 한다.

복자 허인백 야고보


충청도 공주의 양반 집안 출신인 김종륜은 어려서 천주교에 입교한 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다가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부모를 모시고 상주 멍에목(경북 문경시 동로면 명전길)을 거쳐 죽령 교우촌으로 이주해 살다가 경주 포졸에게 체포됐다.

경상도 김해 출신 농부의 아들인 허인백은 언양으로 이주해 살다가 천주교를 접한 뒤 입교한 인물로, 얼마나 열심히 계명을 지켰는지 교우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았다고 한다. 경신박해 때 언양 포졸에게 잡혀 수난을 당하기도 했으며, 무진박해 때 또 체포돼 경주 관아로 끌려갔다.

세 순교자의 수난기는 그리 자세하게 전하지 않는다. 다만 경주 관아 압송 과정에서는 물론 감옥에 끌려가서도 서로 신앙을 권면하며 순교를 결심했고, 경주 진영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으면서도 굳건히 신앙을 증언했다는 기록이 「병인치명사적」을 통해 전한다.

1868년 9월 14일 울산병영에서 함께 순교한 세 순교자의 유해는 형장까지 따라온 허인백의 아내 박조예에 의해 거둬져 비밀리에 울산 동천강 변에 안장됐으며, 이들의 유해는 진목정 인근 도매산과 대구대교구 감천리 묘역을 거쳐 지금은 대구 복자성당에 안장돼 있다.

[평화신문, 2015년 5월 24일,
오세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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