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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구제역 사태에 관한 신학적 성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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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1-05-01 ㅣ No.829

[경향 돋보기 - 그리스도인의 시각으로 본 구제역 사태] 구제역 사태에 관한 신학적 성찰

 

 

지난해 겨울방학부터 올 삼월 초순 개학 때까지 내가 타는 자동차는 구제역 방역을 하는 약제로 세례를 얼마나 받았는지, 흰색 차가 회색빛을 내다 못해 까만 차로 탈바꿈을 하였다. 그 핑계로 세차를 더디 하였지만, 그 때문에 많은 불편을 감수해야 했다.

 

개인적인 불편이야 얼마든지 견딜 수 있다지만 지난 11월 말 시작된 구제역 여파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점은 정신적으로도 매우 힘이 드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조류 인플루엔자와도 싸우고 있다. 소와 돼지, 염소, 오리, 닭 등 인간생활 가까이 살던 동물들이 셀 수 없을 만큼 살처분(2월 18일 기준 880여만 마리)을 당했다. 불과 석달여 만에 그렇게 많은 생명이 죽어갔다.

 

엄청난 재앙으로 전 국민에게 다가온 구제역 사태로 말미암아 정말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한 환경, 생명 문제뿐 아니라 생매장이라는 씻을 수 없는 방법까지 인터넷으로 국제 사회에 알려지면서 국가 신뢰도 역시 얼마나 하락했는지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 왜 이 같은 일이 일어났을까?

 

한마디로 구제역 사태는 오늘날 자연 생태계 속의 생명을 극단적인 인간중심주의 사유와 세계관에 입각해 다루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자연을 파괴하는 인간은 결국 자기의 인간본성을 죽이게 된다.”는 신화학자 조셉 캠벨의 주장도, 지금 겪고 있는 생태위기의 본질은 인간 인식의 위기, 정신의 위기 그리고 종교적 심성의 위기와 직접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현재 우리 삶의 자리는 이러한 구제역과 같이 죽임의 문화로 둘러싸여 있다. 나아가 지구촌 어느 곳을 둘러보더라도 매연과 가스로 가득한 대기, 썩어가는 물, 죽어가는 땅, 악취로 가득 찬 도시는 무참히 황폐화된 인간 환경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런 일들은 인류가 진보와 개발이라는 명분하에 개인과 공동체의 그칠 줄 모르는 욕심과 탐욕으로 자연생태계의 생명을 끊임없이 착취, 억압, 죽임을 자행하고 있는 결과들이다.

 

그렇다면 필자는 묻고 싶다. 이러한 재앙 수준의 구제역 사태를 우리 신자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성경과 교회는 어떤 가르침을 주고 있는가? 그리고 이러한 재앙에 대하여 우리 신자들의 책임은 없는 것인가? 다시는 이런 일을 겪지 않으려면 어떤 마음가짐으로 무엇을 바로잡아야 하는가?

 

 

모든 생물과 계약을 맺으신 하느님

 

홍수가 끝난 다음 하느님께서는 노아와 그 가족과 함께 모든 생물이 “땅에 우글거리며 번식하고 번성하게 하여라.”(창세 8,17) 하고 축복하시고, 노아와 그 자손들과 계약을 맺으시며, 또 그들과 함께 있는 새와 집짐승과 땅의 모든 들짐승과도 계약을 맺으셨다(창세 9,9-11). 하느님께서 짐승들과 맺으신 계약은 그들의 멸망을 원하지 않고 그 생명을 지켜주실 것임을 약속하신 구원과 은총의 선언이다.

 

하느님께서 보시고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이 참 좋았다.”(창세 1,31)고 감탄하신 아름다운 생태계를 인간이 탐욕과 무절제로 파괴해서는 안 된다.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을 기어 다니는 온갖 생물을 다스려라.”(창세 1,28) 하신 주님 말씀대로, 인간이 동물에게서 식량과 의복을 마련하고 인간을 돕도록 길들이며 이용할 수 있지만, 자연과 생물에 대한 인간의 지배는 생태계의 보존을 전제로 한다.

 

모든 생물과 계약을 맺으신 하느님의 뜻대로 짐승들을 지켜주지 않으면, 인간의 삶도 유지될 수 없을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하늘의 새들을 먹여주시듯이(마태 6,26 참조), 인간도 자연과 생물들에게 필요한 배려를 해주어야 한다. 각 종류의 생물은 생태계의 유지에 이바지하고 있으므로, 동물에 대한 배려가 없다면 인간이 속한 생태계도 위험에 빠지게 된다.

 

교회는 “창조주께서 인간에게 주신 무생물과 생물에 대한 지배권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2415항)라고 가르친다. 온갖 생물을 다스리라는 지배권에는 한계가 있다. 하느님께서 인간의 지배권에 한계를 두신 것은 생태계의 파괴가 곧 인간에게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배권을 위임받은 인간은 위임하신 분이야말로 참된 지배자이심을 인정하면서, 그분의 뜻을 따르고 실천해야 한다. 자연과 생물을 배려하는 다스림은 곧 인간 자신을 위한 것이다.

 

 

구제역 파동은 인간의 욕심이 초래

 

더 소유하려고 하고 더 즐기려고 하는 무절제한 욕심은 이 자연과 온갖 생물이 하느님의 선물임을 망각하게 한다. 그리하여 “인간은 세계에서 하느님의 협조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대신, 부당하게 하느님의 자리에 자신을 올려놓으며, … 자연을 다스리기보다는 학대한다”(요한 바오로 2세, 회칙 “백주년”, 37항). 지난해 말부터 지금까지도 계속되는 구제역 사태는, 자신의 본분을 망각한 인간의 탐욕이 그 바탕에 깔려있다.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 강우일 주교는 2011년 1월 20일 발표한 ‘구제역 사태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성찰’이란 글에서 “구제역 사태는 지나친 육류 식욕과 가축을 생산품으로 만들어 이윤을 극대화하려는 욕심이 초래한 비극”이라고 지적하고, “예수님처럼 시대의 가장 힘없는 이들, 피조물들의 고통과 신음까지도 함께 호흡하고 고민하며 우리 자신 삶의 궤적을 바로잡아 가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한국종교인평화회의(대표회장 김희중 대주교)는 반생명적 축산문화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하면서, “사상 최악의 구제역 파동과 국토와 지하수 오염 등의 재앙은 인간이 저지른 비참한 현실”이라며, “종교인들의 참회와 회개, 구제역 조치 미흡에 대한 정부의 각성, 반생명적 축산산업에 대한 사회적 반성, 육식문화에 대한 총체적 반성, 생명에 대한 인식의 문명사적 전환을 촉구한다.”고 역설했다.

 

창조주께서 인간에게 위임하신 지배권에는 “미래 세대들을 포함하여 이웃에게 쾌적한 생활을 물려주려는 배려”와 “피조물 전체에 대한 세심한 배려”(“가톨릭교회 교리서”, 2415항)가 포함되어야 한다. 이 자연과 생태계는 나 또는 우리 세대만을 위한 것이 아니므로, 잘 다스리고 보살펴서 물려주어야 한다.

 

교회는 또한 “하느님께서는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모든 사람과 모든 민족이 사용하도록 창조하셨다. 따라서 창조된 재화는 사랑을 동반하는 정의에 따라 공정하게 모든 사람에게 풍부히 돌아가야 한다.”(사목헌장, 69항)고 가르친다.

 

당장의 경제적 이득을 극대화하려는 근시안적 욕망을 물리쳐야 한다. 더 편하고 윤택한 삶을 위하여 산업을 발달시키는 과정에서 공해물질들이 배출되듯이, 지나친 육류 소비와 공급의 욕심이 구제역 파동을 낳았다고 할 수 있다. 자연과 생태계를 파괴하는 것은 남의 것, 미래 세대의 것을 도둑질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교적 단식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 걱정하지 마라. 하늘의 새들을 눈여겨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것들을 먹여주신다”(마태 6,25.26).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 가운데 인간들만이 먹을 것을 쌓아두고 먹는다. 다른 동물들은 위의 복음 말씀처럼 걱정하지 않는 듯 보인다.

 

초기 교회의 교부들과 영성가들은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두 가지를 제시한다. 하나는 단식이요, 다른 하나는 기도이다. 단식은 몸을 맑게 하는 수행이고, 기도는 정신과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수행이다. 요즘같이 ‘몸짱, 얼짱’ 하면서 몸에 신경을 많이 쓰는 때가 있었을까?

 

한편 요즘 수도원 체험, 템플스테이에 참여하는 사람들도 계속 늘고 있다. 이미 초기 그리스도교의 영성가들도 몸과 마음에 관심이 많아서, 영혼과 마음 그리고 육체가 다시 태어나는 수행을 많이 하였다. 그 가운데 단식에 관하여 바실리오 성인은 ‘낙원에서 단식이 제정’되었다고 하며, “단식이란 충분함의 원리이다. 다시 말해 충분함을 넘어선 지나침, 과다함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2009년 사순시기 담화문에서 “단식이 중요한 수덕 실천, 곧 우리 자신의 무질서한 온갖 집착에 맞서 싸우는 영적 무기”라고 강조하며, 이렇게 설명하였다. “음식이나 다른 물질이 주는 즐거움을 스스로 멀리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원죄로 나약해진 한 인간 전체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본성의 욕망을 다스리는 데 도움이 됩니다.”

 

이처럼 단식은 인간의 욕망을 다스리는 데 매우 유익하다. 구제역 사태가 인간 탐욕의 소산이라면, 단식과 기도는 인간의 욕망을 다스려 가축에 대한 학대와 남용을 근원적으로 예방한다. 니네베 사람들도 요나의 말을 듣고 단식기도를 바침으로써 하느님의 진노에서 벗어났듯이, 우리도 참다운 단식을 통하여 구제역의 저주에서 풀려날 수 있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다시 마음을 돌리시고 그 타오르는 진노를 거두실지 누가 아느냐? 그러면 우리가 멸망하지 않을 수도 있다”(요나 3,9).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악한 길에서 돌아서는 모습을 보셨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마음을 돌리시어 그들에게 내리겠다고 말씀하신 그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다”(요나 3,10).

 

 

생명의 참다운 가치

 

성경에 따르면 하느님으로부터 창조된 모든 생명체는 그 자체로 선하고 고귀하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이 참된 생명으로 살아갈 수 있다. 생명이 생명으로 존재하려면 하느님의 창조 질서는 계속 유지되어야 하고, 하느님께서는 그 관리를 인간에게 맡기셨다.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을 기어 다니는 온갖 생물을 다스려라”(창세 1,28).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데려다 에덴 동산에 두시어, 그곳을 일구고 돌보게 하셨다”(창세 2,15).

 

그러나 하느님의 뜻과는 달리 자신의 무절제한 욕망에 굴복한 인간 때문에,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지금까지 다 함께 탄식하며 진통을 겪고 있음을 알고 있다”(로마 8,22). 나무들은 땅에서 필요한 만큼의 영양분만을 취하고, 동물들도 그들의 대사에 적절히 음식을 먹는다. 인간도 본디 자연적 본능을 가지고 그렇게 태어났다.

그런데 인간은 본능만이 아니라 원하는 대로 행하는 자유를 가지고 있다. 결과적으로 그것을 지나치게 써 죄와 나쁜 습관들이 그 본능을 변하게 한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온갖 생명뿐 아니라 모든 피조물이 당신 이름을 찬양하기를 바라신다. “산들과 모든 언덕들, 과일나무와 모든 향백나무들아, 들짐승과 모든 집짐승, 길짐승과 날짐승들아, …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여라”(시편 148,9-13). 비록 바닷속 물고기나 가축이라 할지라도 그 역할은 인간의 먹이로 그치지 않는다.

 

인간은 다른 피조물들도 함께 주님을 찬미하는 공동 찬미자로 여기고 호의로 보살펴야 한다. “동물은 단순히 생존함으로써도 하느님을 찬미하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린다. …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이나 필립보 네리 성인과 같은 분들이 동물을 얼마나 세심하게 대했는지를 상기해야 할 것이다”(“가톨릭교회 교리서”, 2416항).

 

인간은 자기 내면의 욕망을 비우고 그 대신에 공동 피조물인 자연과 생물들과 더불어 주님을 찬미하는 비움의 영성, 공존의 영성, 찬미의 영성으로 채워야 한다. 또한 창조의 마지막 날인 엿샛날의 후반에 인간이 창조되었음을 기억하고, 겸손하게 자신의 형이고 누님이며 자기 삶의 터전인 자연과 온갖 생명들을 존중하고 배려하여야 할 것이다.

 

“나는 오늘 …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내놓았다. 너희와 너희 후손이 살려면 생명을 선택해야 한다”(신명 30,19-20).

 

* 곽승룡 비오 - 대전교구 신부. 1989년 사제품을 받고 금산성당 주임신부, 대전교구 사목기획국장을 거쳐 현재 대전 가톨릭 대학교 교의신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경향잡지, 2011년 4월호, 곽승룡 비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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