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9일 (일)
(홍) 성령 강림 대축일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성령을 받아라.

종교철학ㅣ사상

종이책 읽기: 나를 이끄시는 그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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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07-01 ㅣ No.115

[김계선 수녀의 종이책 읽기] 나를 이끄시는 그분


요한 복음서를 묵상하다보면 유난히 아버지와 하나된 예수님의 모습을 자주 만날 수 있다. 심지어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 세상에 왔다고 하시면서 아버지의 뜻은 당신을 세상에 보내신 아버지의 사랑을 믿는 것이고, 그 사랑을 사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이를 우리에게 알려주시기 위해 안간힘을 쓰신다. 그러면 우리는 일상의 삶에서 하느님의 뜻을 어떻게 알 수 있으며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 이것은 우리에게 늘 풀지 못하는 문제처럼, 다 하지 못한 숙제로 남아 있음을 알게 하고, 마치 이것을 실천하는 사람들은 소수의 성인들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면서 나하고는 애써 무관한 척 태연히 현실 삶의 쳇바퀴를 돌리고 있다. 누군가 이것을 명확히 밝혀주길 기대하면서….

그런데 이번에 읽은 「나를 이끄시는 그분」 안에서 그것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 수 있었고 반가운 마음에 함께 나누고 싶었다. 「나를 이끄시는 그분」은 「러시아에서 그분과 함께」를 쓴 예수회 월터 취체크 신부의 영적인 체험담을 담은 고백록이다. 취체크 신부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이 살면서 이룩할 목표가 하느님 뜻을 행하는 것 말고 달리 무엇이 있겠는가? 사실 어느 순간을 막론하고 그분의 뜻이 암시하는 바를 따르려는 노력은 그 자체만으로도 은총이요 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자칫 하느님의 뜻과 자신의 뜻을 동일시하고 자신이 원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일 거라고 막연히 상상한다. 취체크 신부도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소련에 잠입하여 러시아 선교에 대한 부푼 꿈을 꾸었다. 그러나 현실은 꿈이 아니었고 매일매일 강제 노동과 삼엄한 감시, 그리고 소련 비밀경찰의 체포와 구금 등을 겪으면서 고문에 가까운 심문 속에서 공포와 절망에 빠지기도 하고 하느님마저도 안 계시는 것 같은 상황도 만나고 상상도 못할 공포와 두려움 속에서 23년을 지냈다. 그러면서 그는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섭리의 손길을 체험하고 하느님만이 주시는 통찰력으로 그 고난의 세월을 영적인 눈으로 바라보면서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러시아 사람들과 함께 아버지의 사랑을 나누기 위해 왔건만 그들에게 펼쳐진 것은 매일매일이 무기력한 노동과 더불어 아무런 의미도 찾을 수 없는 상황들, 그리고 입을 것도 먹을 것도 없는 시베리아의 막사에서 사제로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절망감이 엄습해왔을 때 짧은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숲속에서 몰래 드리는 미사를 통해 주님의 현존을 체험하면서 그가 바칠 수 있는 작은 희생들을 그리스도의 희생과 합쳐 봉헌하는 기쁨을 맛보았다. 그리고 그는 자신에게 닥친 난관에 대한 해답과 여러 가지 유혹의 해결책을 깨닫는 은총을 하느님으로부터 받았는데, 바로 자신의 관점이 아닌 하느님의 관점에서 단순하게 바라보는 것이었다.

우리가 이것이 아니고 그것이었더라면 하고 바라는 것, 그것일 거라고 상상하는 것, 인간적으로 온갖 생각을 하면서 근심과 걱정으로 빠져들어 그렇다고 단정하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은 하느님이 마음에 담고 계시며 우리에게 마련하신 상황 속에서 날마다 드러내 보여 주시고 우리에 대한 그분의 뜻은 매일 매순간 주어지며 하느님이 지금, 여기에서 우리 앞에 펼쳐 놓으신 사람들과 장소와 상황이 바로 그분의 뜻, 바로 24시간이야말로 하느님의 뜻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하느님의 뜻은 실천하기 어렵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간과해버리기 쉽다는 것을 잊지 않고 지적한다. 그러나 그분의 뜻을 발견하고 실행할 때 얼마나 큰 기쁨과 평화를 누리는지도 알게 해준다.

소련 비밀경찰에 의해 체포되고 바티칸 스파이로 지목되어 당시 소련에서 가장 악명 높은 루비안카 형무소의 하얀 독방에 갇혀 5년이라는 시간을 침묵과 취조, 심문과 무시무시한 정적과 매일 똑같은 일상의 반복을 사는 고통을 맛보았다. 사는 것이 너무 힘들어 자살의 유혹을 수도 없이 받으면서도 그들의 계략에 넘어가지 않으려고 버티었건만 자신도 모르게 함정에 빠져 총살당한다는 위협으로 공포와 두려움 속에서 서류에 서명을 하게 되는 그 순간의 상황은 정말 처절하게 묘사된다. 자신에 대한 실패감, 패배감, 죄책감, 수치심에 자신의 비겁함에 대한 질책과 질타로 하느님마저 원망하게 된다.

그는 수치감의 밑바닥에 자리하고 있는 진실과 대면하면서 자신이 하느님께 기도하고 성령의 약속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최후의 순간까지 자신의 능력으로 악을 피하고 그 모든 도전을 이겨낼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을 발견하게 된다. 더없는 어려움과 시련 속에서 자신을 완벽하게 의지하고 있었고 성령께서 개입하실 기회를 막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하느님께 자신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제시하고 그분의 뜻을 무의식적으로 내 바람에 억지로 맞추려는 인간이면 누구나 범할 수 있는 어리석음과 경향을 발견한 것이다. 자신의 모든 기도와 하느님 뜻에 따르겠다는 자신의 모든 신앙고백 속에 ‘자아’라는 불순물이 얼마나 많이 섞여 있는지를 보여 주셨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밖에도 취체크 신부는 우울함과 기도할 수조차 없게 만드는 절박한 위험과 위협을 수없이 겪으면서 공산치하의 세뇌교육 때문에 같은 수인이지만 사제이기 때문에 받아야 하는 수모 속에서 겟세마니에서 번뇌하시는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에게서 힘과 위로와 희망을 발견한다. 자신의 능력이 완전히 소진되는 순간에 도달하자 비로소 주님의 은총과 섭리에 내어 맡길 준비가 된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두려움에서 해방되는 자유를 맛본다.

그가 새롭게 발견한 노동의 의미, 목자의 역할, 그리스도의 삶과 고통에 합쳐져 구원의 사도직을 계속하는 힘, 강제노동 수용소에 숨어서 미사를 드리고 사제를 만나기 위해 어떤 위험도 마다하지 않는 신자들을 만나는 기쁨, 노동을 하면서 영신수련 피정을 지도하고 사람들을 영적으로 새롭게 태어나도록 돕는 일, 총살직전에 느꼈던 죽음의 공포에서 깨달았던 그리스도 부활의 의미 등 우리의 신앙을 일깨우는 주옥같은 체험들이 너무나 소중하다. 그렇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루 매순간을 하느님 손에서 주어지는 선물로 받아들이고 늘 그분 뜻을 행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을 괴롭힐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하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가 당한 고통과 어려움의 정도는 달라도 상황은 어쩌면 오늘날 우리가 겪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짊어져야 할 많은 고난과 고통, 어려움, 그리고 이보다 더 우리를 절망적인 상황으로 몰아가게 하는 자기부정, 인정받지 못함, 가난함, 자살충동, 우울함, 수치감, 수모, 자신에 대한 절망감 등으로 유혹에 빠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이 책은 그 모든 것에 앞서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믿도록 초대한다. 거기에 참된 자유가 있다.

[월간빛, 2012년 6월호,
김계선(에반젤리나 · 성바오로딸수도회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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