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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철학ㅣ사상

철학 에세이: 과연 객관적 행복과 주관적 의미는 한 곳에서 만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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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07-22 ㅣ No.116

[가톨릭 철학 에세이 - 철학이 던지는 행복에 관한 열 가지 질문 7]

과연 객관적 행복과 주관적 의미는 한 곳에서 만날 수 있을까요?


“여기서 우리가 보는 것은 인간들이 본질적으로 서로 같지 않는 사실에 입각하는 가르침이다. 따라서 인간들을 똑같게 만들려고 들지 않는 가르침이다. 인류의 가장 큰 희망은 사람 간의 바로 이런 상이함에 있다. 능력과 성향이 서로 다른 데에 있다. 하느님이 포괄하시는 힘은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의 무한한 다양성, 각각 한 사람에게만 열려있는 이 다양성에서 드러난다. … 한 군데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진귀한 보배로서 실존의 성취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이다. 이 보배를 찾을 수 있는 곳은 바로 각자가 서있는 제자리라는 것이다”(마르틴 부버, 「인간의 길」 중에서).

“언젠가 먼 훗날에 저 넓고 거칠은 / 세상 끝 바다로 갈 거라고
아무도 못 봤지만 기억 속 어딘가 / 들리는 파도 소리 따라서 / 나는 영원히 갈래”
(패닉, ‘달팽이’).


지난 이야기 1 - 현명함이 보여주는 행복의 길

이제 이 연재가 예정된 순서의 절반을 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한번 지난 이야기들을 요약해 볼 때인 것 같습니다. 행복이란 말이 우리의 일상에서 넘쳐나지만 이 말이 본디 가진 무게와 다의성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힘들다는 것은 우리의 분명한 체험입니다. 이것이 철학에서 행복에 대한 숙고된 생각을 기대하는 이유이겠습니다.

행복이라는 말의 여러 가지 상이한 뜻을 곰곰이 살펴보는 것이 행복의 철학을 위한 여정의 시작점이었습니다.

우리는 행복에 대해 피상적이지 않고, 삶의 체험에 부응하면서도 보편적인 정의를 내려보고자 시도했습니다. 그러면서 ‘행복이 현명함에 있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의 관점을 매우 중요한 토대로 삼아, 그의 주장이 뜻하는 내용을 오늘의 관점에서 명료화하려 노력하고
논증의 설득력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런 공들인 숙고의 결과로 그의 입장이 가진 포괄성과 타당성을 이해하고 동의할 수 있었습니다. 현명함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윤곽을 그려본 행복은 본연의 의미에서의 ‘잘 사는 삶’입니다.

현명하면 행복할 수 있다는 주장을 바꿔 말하자면, 우리가 어그러진 사회적 통념이나 질서 잡히지 않은 정념이 강요하는 ‘모방의 욕망(르네 지라르)’의 충족을 행복으로 믿는 것에서 벗어날 때, 그리고 타인에 대한 비교우위에 행복을 종속시키는 어리석음을 멈출 때 행복의 진면목을 보기 시작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현명함은 지금 여기에서 내가 만나는 구체적인 상황에서, 매 순간 스스로 판단과 의지를 통해 행하는 결단과 선택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므로, 현명함을 통한 행복은 보편적인 것이되, 각자의 상황에 대한 고려와 자율성을 요구하는 개별성의 영역도 포함한다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현명함을 요약하자면 객관적 행복의 조건을 사려 깊게 발견하고 이해하고 마음으로 받아들여, 나의 삶의 영역에서 그를 위한 효과적인 길을 모색해 가며 차근차근 실천해 가는 덕이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명료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설득력을 가진 행복의 관점을 정립해 놓고서도 조금씩 마음에서 자라나는 아쉬움이랄까 의문이랄까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지난 이야기 2 - 나에게 고유한 행복의 길을 찾아서

그건 ‘지금 여기의 나’의 상황을 중요시한다는 점에서는 이러한 행복의 개념이 개별성을 포괄한다 하더라도, 그 상황에 대한 태도는 ‘객관적 덕’이라는 이름의 일종의 모범답안으로서 미리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행복이 정해진다면 ‘이런 행복에 나의 개성과 독특한 바람이 담길 수 있을까?’ 하는 근심과 회의가 생길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비록 다른 사람이 이해해 주지는 못하지만 또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중요한 것이 아닐지는 몰라도 나에게는 소중하고 떼어내기 어려운, 감정과 삶의 궤적과 취향을 표현해 주는 것들이 행복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우리는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노선을 따라 실천이성의 관점에서 정립된 행복의 윤리학이 과연 나의 고유함을 구성하는 다양한 차원의 의미 있는 것들을 다 반영하고 있는 것일까 질문하게 됩니다.

그러기에 바로 지난 호에서, 행복에서 주관적인 의미가 가지는 중요성을 ‘의미물음의 인간학’이라는 주제어 아래 생각해 봤습니다. 그리고 이를 단지 일상적 경험의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철학사와 사상사에 비추어서도 성찰해 보았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자기 진실성’이라는 현대철학의 개념을 곰곰이 따져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나를 찾는다.’, ‘자기실현을 한다.’, 아니면 ‘일상의 행복을 찾는다.’, ‘나의 길을 가련다.’라는 말들로 행복에 대한 추구를 표현할 때, 사실 여기에는 ‘좋은 삶’이라는 객관적 행복과 ‘자기 진실성’에서 오는 주관적 의미들의 만남과 갈등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자기를 넘어서는 길에서 답을 찾아보다

행복에 대한 탐구는 이런 두 가지 방향의 갈망들이 서로 상보관계를 이룬다는 사실을 보여주어야 할 것입니다만 그러려면 손쉬운 조화보다는 먼저 그것들이 충돌하는 지점들을 담담히 관찰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숨겨졌던 ‘자기 진실성’에 대한 바람이 얼굴을 드러내는 표현들에 주목하게 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관습적’ 삶의 방식과 객관적 행복의 조건에 대해 주관과 개성의 이름으로 ‘아니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부정의 철학’이 지닌 의미는 획일화의 경향을 지닌 근대와 현대의 삶의 조건에서 각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모색이 가진 맹점을 우리는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먼저 자기 진실성이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데에 이르거나 ‘부정으로서의 자유’만이 옹호될 때 이는 이미 좋은 삶의 실현이라는 긍정적인 행복의 개념과 더 이상 화해 불가능한 모순을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직 나 안에서만 유래하는 개성과 독특함을 주장하는 입장은 자아가나 밖의 풍성한 수원들에서 분리될 때 사회적 역사적 조건에 따른 삶보다도 더 피상적이고 진부한 삶의 모습에 머물게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기 진실성이 객관적 행복과 접점을 찾는 중요한 계기로서, 인생의 깊이에 대한 관심과, 내면성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나를 초월하는 영역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넘어서는 것으로서만, 객관적 행복과 주관적 의미가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이 주어진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자기를 넘어선다.’ 또는 ‘초월’이라는 말이 거창하게 들릴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안에서 현실적 필요나 욕망을 넘어서는 또 다른 갈망과 동경을 가지고 있을 때, 이미 이런 ‘초월’을 체험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동경과 갈망을 갖는 것은 우리 모두가 같되 그것들의 얼굴은 참으로 다양하기만 합니다.

이제 행복의 철학이 가야 할 길은 ‘자신을 넘어선다는 것’의 다양한 의미를 가늠해 보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앞으로 두 번쯤에 걸쳐 곰곰이 생각해 보려합니다.

* 최대환 세례자 요한 - 의정부교구 신부. 정발산본당 주임으로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과 가톨릭교리신학원에서 철학을 가르치고 있다. 연재하는 동안 행복에 대한 독자들의 견해와 질문을 열린 마음으로 기다린다(theophile@catholic.or.kr).

[경향잡지, 2012년 7월호, 최대환 세례자 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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