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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극ㅣ영화ㅣ예술

가톨릭 예술가 이야기: 최인호 베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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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06-27 ㅣ No.78

[백형찬의 가톨릭 예술가 이야기] (25) 최인호 베드로 (상)


소설로 우리 시대 대중문화를 선도한 최인호

 

 

책 「눈물」에서.

 

 

강렬한 인상

 

“저는 키가 작아요. 165㎝이니까 아주 작죠. 몸무게는 53.5㎏입니다. 머리칼은 곱슬곱슬한데 이빨은 반 옹니죠. 최(崔)가에 곱슬머리에 옹니백이는 상대도 하지 말라죠. 제 이마는 좀 좁아요. 못생겼거든요. 그런데다가 턱이 팽이 끝처럼 뾰족하단 말이에요. 그래서 머리를 가르마질하면 그야말로 트위스트 김 같거든요. 전 눈이 작아요. 그런데 속눈썹은 길어요. 남들이 그러는데 제 눈이 사슴처럼 맑다고 해요.”

 

이 글은 월간지 ‘엘레강스’에 실린 최인호(베드로, 崔仁浩, 1945~2013)의 ‘나의 사적 이력서’의 한 부분이다. 그가 삼십 대 초반에 쓴 글이다. 책 표지에 인쇄된 최인호의 얼굴은 인상적이다. 긴 머리에 짙고 까만 눈썹 그리고 꼭 다문 입술은 마치 영화 ‘이유 없는 반항’의 주인공 제임스 딘과 같다. 작가 장석주는 1970년대를 상징하는 ‘시대의 기호’로 ‘신중현, 송창식, 이장희, 양희은, 장발, 미니스커트, 칸막이가 있는 생맥주집, 고고장, 통기타, 선데이 서울, 국민교육헌장, 별들의 고향, 겨울여자 등’을 들었다. 최인호는 이러한 문화를 이끄는 리더였다.

 

 

전쟁과 가난 혹독하게 겪어

 

최인호는 서울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초등학교 때 반장이었는데 어머니가 학교에 오는 것을 몹시 창피하게 여겼다. 다른 아이들의 어머니는 젊고 아름다웠다. 그런데 최인호의 어머니는 쪽진머리하고, 흰 버선에 흰 고무신을 신었으며, 회색 두루마기를 입었다. 키도 작았다. 그래서 어머니가 학교에 오는 것이 싫었다. 언젠가 어머니가 학교에 왔을 때, 짝이 어머니인지 할머니인지 물었다. 최인호는 ‘할머니’라고 거짓말을 했다.

 

6·25 전쟁이 일어나자 최인호 가족은 부산으로 피난 갔다. 범일동 중국집 이층에 세를 들었다. 그런데 불이 나 피난 살림을 몽땅 잃고, 용당으로 이사 갔다. 그곳에서 살면서 잊지 못할 고통을 맛보았다. 굶주려서 깜부기를 까먹었고, 바다에 헤엄쳐 들어가 바다풀을 먹었고, 개미들의 꽁무니까지 핥았다. 어느 날은 거리에서 사과를 훔쳤다가 사람들에게 얻어맞기도 했다.

 

전쟁이 끝나자 서울로 올라왔다. 아버지가 유산으로 남겨준 집에서 어머니는 하숙을 쳤다. 어머니가 새벽밥을 지으면 최인호는 밥상을 들고 하숙생 방으로 날랐다. 단칸방에서 온 식구가 생활했다. 밤마다 뭔가 쓰고 싶었다. 식구들의 잠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촛불을 켜고 글을 썼다. 버스값이 없어 걸어 다녔다. 삼 형제가 같은 중고등학교에 다녔다. 그래서 교복을 맞춰 입은 적이 없었다. 형이 입던 교복을 비롯해 형이 쓰던 모자, 체육복, 책가방을 물려받았다. 몸에 맞는 옷, 신발, 모자를 쓴 적이 없었다. 또한 집에는 우산이 하나밖에 없어 비가 오면 늘 비를 맞으며 학교에 갔다. 점심 굶는 것은 참을 수 있었다. 그러나 학교에 비 맞고 가는 것은 참을 수가 없었다. 서울고 근처에 이화여고와 경기여고가 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최인호가 초등학교 때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에 대한 특별한 기억이 있다. 아버지와 함께 ‘톰소여의 모험’이라는 영화를 보러 갔다. 영화를 보다가 이상해서 옆을 쳐다보았다. 아버지가 울고 있었다. 아버지는 눈물이 많았다. 변호사로 변론하면서도 눈물을 흘렸다. 그런 아버지라 자식을 자상하게 대했다. 자식에게 한 번도 소리를 지르거나 매를 든 적이 없었다. 최인호가 아버지로부터 받은 사랑에 비하면 자신의 자식 사랑은 형편없었다. 최인호는 자식에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심하게 손을 댔다. 시간이 흐른 뒤 자신이 잘못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그래서 자식 방을 찾아갔다. 그러고는 무릎을 꿇고 울면서 용서를 빌었다. 자식은 아버지를 용서해주었다.

 

 

타고난 글쟁이, 하루에 소설 한 편 쓰기도

 

최인호가 쓴 글이 처음으로 신문에 실린 것은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였다. 당시 동아일보에는 ‘어린이 차지’라는 코너가 있었다. 그곳에 ‘화롯가’라는 동요를 냈다. 신문에 동요가 실렸다. 중학교에 가서는 본격적으로 글쓰기를 시작했다. 어느 때는 하루에 한 편씩 소설을 썼다. 서울고 1학년 때, 잡지 ‘학원’에 ‘휴식’이란 시를 투고했다. 심사위원이었던 박두진이 우수작으로 뽑았다. ‘고등학교 1학년의 나이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안정된 정신 자세다. 더욱 정진하라’고 칭찬했다. 이듬해 최인호는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벽구멍으로’라는 단편소설을 써서 가작에 당선되었다. 심사위원은 황순원과 안수길이었다. ‘신선한 문장이 돋보인다’고 평을 해주었다. 그런데 신춘문예 시상식에 교복을 입은 고등학생이 나타났다. 모두 어이가 없어 했다. 신춘문예 담당 기자는 한심해서 담배만 계속 피웠다.

 

고3 말에는 공부에 전념했다. 그 결과, 연세대 영문학과에 합격했다. 강의실보다는 영화관을 들락거렸다. 그러면서 미친 듯이 글을 썼다. 그렇게 쓴 작품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응모했다. 분명히 당선될 것으로 확신했다. 그런데 낙선했다. 그다음 해에는 작정하고 수십 편의 단편을 썼다. 그 단편들을 모든 신문사로 보내고는 군에 입대했다. 그해 성탄절 전날 밤이었다. 최인호는 부대원들과 함께 눈 덮인 연병장에서 벌거벗은 채 기합받고 있었다. 갑자기 부대장이 나타났다. “오늘 기합은 이만 중지!”라고 외쳤다. 이유는 훈련병 중에 하나가 고등고시에 합격했기 때문이었다. 최인호는 누가 고등고시에 합격했나 의아했다. 그런데 부대장이 ‘최인호!’라고 이름을 부르자 비로소 자신이 신춘문예에 당선된 것을 알았다. 벌거벗은 채 장교 숙소로 달려가 전보를 받았다. ‘당선 축하, 조선일보’라는 글이 적혀있었다. 입대 전에 신문사로 보냈던 ‘견습환자’가 신춘문예에 당선된 것이었다.

 

 

등단

 

군 복무를 마치고 복학했다.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을 비롯한 여러 작품에 깊이 빠져 살았다. 최인호는 여전히 가난한 대학생이었다. 주머니에는 얼마 안 되는 돈과 몇 권의 책, 몇 장의 러닝셔츠와 팬티, 형이 물려준 낡은 신사복이 전부였다. 사귀던 여성이 결혼을 원했다. 최인호는 준비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결혼을 결심하고 어머니와 형제들에게 말했다. 그랬더니 다들 어이가 없어 했다. 끈질기게 설득해 결국 어머니의 허락을 받아냈다.

 

결혼식은 값싼 예식장에서 올렸다. 예물, 예복, 피로연 음식 모두 값싼 것으로 했다. 신혼살림 방도 목욕탕 바로 위층에 마련했다. 목욕탕의 온갖 소리가 다 들렸다. 그 방에서 가난한 남편을 만나 고생하는 아내를 위해 글을 썼다. 대학을 10년 만에 졸업했다. 졸업하던 마지막 학기에 1학점이 모자랐다. 교수들이 모여서 회의를 했다. 문과대학장이던 교수가 “최군은 이미 결혼도 했고 일간신문에 소설을 연재도 하고 있으니 가불(假拂)이라도 해서 졸업을 시켜주기로 합시다”라고 했다. 대학 은사의 배려로 무사히 졸업하게 되었다.

 

 

작품이 영화로 제작돼 인기 끌어

 

최인호는 스물일곱 살에 ‘타인의 방’으로 현대문학상을 받았다. 또한 조선일보에 ‘별들의 고향’을 연재했다. ‘별들의 고향’은 비극적 사랑의 여주인공인 ‘경아’가 겪는 짧은 삶을 그린 소설이다. 단행본으로 출간되어 100만 부나 팔렸다. 당시 전국의 술집에서 일하던 여성들이 가명을 ‘경아’로 고쳤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별들의 고향은 이장호 감독이 영화로 제작해 더욱 인기를 끌었다.

 

이어서 「고래사냥」, 「깊고 푸른 밤」, 「겨울여자」가 영화로 만들어지면서 최인호는 더욱 유명해졌다. 이러한 유명작가 최인호에게도 약점이 있었다. 최인호는 글을 쓸 때 항상 만년필로 썼다. 그런데 글씨가 ‘라면’ 같이 꼬불꼬불해서 사람들이 알아보기 힘들었다. 그래서 편집부 기자가 ‘글씨를 왜 그렇게 쓰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손이 머릿속 생각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그렇다’고 답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3년 6월 25일, 백형찬(라이문도, 전 서울예대 교수)]

 

 

[백형찬의 가톨릭 예술가 이야기] (26) 최인호 베드로 (하)


‘고통의 축제’에도 기도하며 끝까지 펜을 놓지 않았다

 

 

최인호(베드로, 崔仁浩, 1945~2013)는 「깊고 푸른 밤」으로 이상문학상을 받았다. 자신의 문학관을 담아 수상 소감을 발표했다. 종교는 율법을 지키기 위해 순교도 필요하고, 희생도 필요하다고 했다. 문학은 인간의 존재를 새롭게 자각시키는 또 다른 종교와 같은데, 다만 문학이 종교와 다른 점이 있다면 천국과 지옥을 내세에서 구하지 않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상에서 찾으려는 것이라고 했다.

 

이렇듯 최인호는 문학을 종교로 보았다. 그 후로 조선 상인의 삶을 그린 「상도」가 MBC에서 드라마로 제작되었고, 신라 장군 장보고의 일대기를 다룬 「해신」이 KBS에서 드라마로 제작되었다. 또 「사랑의 기쁨」으로 가톨릭문학상을, 「몽유도원도」로 현대불교문학상을 받았다. 가톨릭과 불교에서 주는 문학상을 모두 받은 것이다.

 

 

아버지의 세례명 이어 받아

 

최인호는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가톨릭에 입교했다. 세례명은 예수님의 제자인 베드로가 좋아서 택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돌아가기 직전에 대세(代洗)를 받을 때 세례명으로 삼았던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무신론자였던 아버지는 동기생이던 사도법관 김홍섭(바오로) 판사의 간곡한 청을 받아들여 대세를 받았다. 최인호는 그러한 아버지의 세례명을 이어받아 ‘베드로’가 되었다. 최인호가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는 말이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그때 많은 작가가 최인호의 문학은 끝났다고 수군댔다.

 

한 문학평론가가 최인호를 보자고 했다.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이 사실이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그 평론가는 작가는 자유로워야 하는데 종교 때문에 자유롭지 못하게 되었으니 큰일이라고 했다. 최인호는 사람들의 이러한 걱정을 떨쳐버리고 하느님께 다음과 같이 기도를 드렸다.

 

“주님, 저는 주님을 믿고 나서 무엇이 문학인가를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만약 제가 주님 때문에 소설을 쓸 수 없는 그런 작가가 되어버린다면 주님께서 얼마나 슬퍼하시겠습니까. 주님을 슬프게 해드릴 수는 없습니다. 주님을 위해서라도 글을 써야지요.”

 

최인호는 가톨릭 신앙인으로 생활하면서도 다른 종교와도 각별했다. “내 정신의 아버지가 가톨릭이라면, 내 영혼의 어머니는 불교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불교적 가톨릭 신자’라고 나 자신을 부르고 싶다”라고 고백할 정도였다. 그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면서 불교에 대해서 깊은 애정을 가졌다.

 

최인호는 한때 스님이 되고 싶었다. 이런 일화가 있다. 중앙일보에 ‘길 없는 길’이란 작품을 연재하고 있었다. 경허 스님의 행장(行狀)을 소설화한 것이다. 그 무렵 최인호는 정말 스님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수덕사 한 스님에게 승복을 빌려 입고는 밤늦도록 압구정동의 번화가를 누비고 다녔다. 밀짚모자를 쓰고 승복을 입고 화려한 거리를 걸었다. 그렇게 걸으니 자신이 전혀 다르게 느껴졌다. 알 수 없는 희열이 솟구쳤다. 출가하고 싶었다. 그러나 가정을 버리고 출가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최인호는 법정 스님과 친분이 깊었다. 스님과 산방(山房) 대담을 나누어 「꽃잎이 떨어져도 꽃은 지지 않네」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다. 또한 자신의 불교관을 담은 수필집 「나는 아직도 스님이 되고 싶다」를 쓰기도 했다.

 

- 최인호의 눈물 자국이 배어 있는 서재 책상. 출처=책 「눈물」

 

 

침샘암 투병과 기도

 

어느 날, 목 부위에 덩어리가 만져졌다. 병원에서 각종 검사를 했다. 그 결과, 침샘암으로 판명 났다. 침샘암 때문에 최인호는 그의 표현대로 ‘혹독한 할례 의식’을 치렀다. 병으로 앓고, 병으로 절망하고, 병으로 기도하고, 병으로 희망했다. 그는 그 의식을 ‘고통의 축제’라고 했다. 침샘에 있던 암이 폐로 전이되었다. 전신 항암 요법이 시작되었다. 몸무게가 일주일 만에 5㎏이나 빠졌다.

 

항암제는 독했다. 구토가 나고, 머리가 빠지고, 손발이 저렸다. 손톱과 살 사이에 염증이 생기면서 진물이 흘렀다. 목구멍으로 물 한 모금도 넘길 수가 없었다. 항암 치료가 너무나 괴로워 의사에게 치료받지 않겠다고 했다. 투병 중에 갑자기 피땀을 흘리며 기도하는 예수님의 모습이 떠올랐다. 예수님도 저렇게 고통을 호소하는데, 자신의 고통과 두려움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 기도를 드렸다.

 

“주님, 이 몸은 목판 속에 놓인 엿가락입니다. 그러하오니 저를 가위로 자르시든 엿치기를 하시든 엿장수이신 주님의 뜻대로 하십시오. 주님께 완전히 저를 맡기겠사오니 제가 그렇게 되도록 은총 내려주소서 우리 주 엿장수의 이름으로 비나이다. 아멘.”

 

이 기도가 그 유명한 ‘엿가락 기도’이다. 최인호는 서울 서초동성당을 다녔다. 그는 와병 중에도 매주 미사에 참여했고 성체조배를 했다. 어느 날 늦은 오후였다. 어느 신자가 성당 감실 앞에서 열심히 기도하고 있었다. 마침 이를 본 신부가 그 신자가 기도를 마치기를 기다린 후에 곁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그가 신부에게 말했다. “성체가 너무나 고픕니다.” 그 신자가 최인호였다.

 

서울 명동대성당에서 봉헌된 소설가 최인호(베드로)씨 장례 미사 고별식에서 염수정 추기경이 고인이 잠든 관에 분향하며, 고인의 영원한 안식을 기원하고 있다. 가톨릭평화신문 DB

 

 

눈물로 쓴 작품

 

무려 다섯 해 동안 투병 생활을 했다. 그러면서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은 ‘글을 쓸 수 없다는 것’이었다. 최인호는 작가가 글을 쓰지 못하면 작가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글쓰기는 집중력과 에너지가 필요한 작업인데 지칠 대로 지친 육체와 정신으로는 불가능했다. 최인호는 자신이 환자라는 사실에 슬펐다. 작가로 죽고 싶지, 환자로 죽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매일 탁자 위에 있는 성모님께 떼를 써가며 막무가내식 기도를 드렸다.

 

그러던 어느 날 탁자 위에서 하얀 얼룩무늬를 발견했다. 자신이 흘린 눈물 자국이었다. 진한 눈물 자국이 ‘포도송이’처럼 맺혀 있었다. 다시 용기를 내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항암 치료의 후유증으로 손톱 한 개와 발톱 두 개가 빠졌다. 글은 원고지에 만년필로 쓰기에, 빠진 손톱의 통증을 줄이기 위해 고무 골무를 손가락에 끼웠다. 그리고 빠진 발톱에는 테이프를 칭칭 감았다. 구역질이 올라올 때마다 차가운 얼음 조각을 씹으며 글을 썼다. 하루에 서른 매씩 써 내려갔다. 그리하여 두 달 만에 완성된 작품이 무려 원고지 1200매의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였다.

 

 

원고지 위에 못박고 스러지게

 

최인호는 하느님께 이렇게 기도드렸다. “주님, 나를 나의 십자가인 원고지 위에 못·박·고·스·러·지·게·해·주·소·서.” 네 번째 항암 치료를 끝으로 더 이상 항암 치료를 받지 않았다. 목에 패인 상처에 연고만 발랐다. 가래는 점점 끓어올랐고 이를 뱉을 기운조차 없었다. 힘을 다해 억지로 가래를 뱉으면 온몸이 땀범벅이 되었다. 침샘암은 침이 마르고 가래가 기관지에 딱 붙어서 나오지 않기 때문에 무척이나 고통스러운 병이었다. 다시 입원했다. 그리고 정진석 추기경이 마지막으로 병자성사를 집전했다.

 

그날 오후, 딸이 물었다. “아빠 주님 오셨어?” 다음 날 그리고 다다음 날까지 똑같이 물었다. 최인호가 대답했다. “주님이 오셨다. 이제 됐다.” 그리고 그날 저녁에 최인호는 하느님 품에 안겼다. 최인호는 기욤 아폴리네르의 ‘절벽 끝으로 와라’라는 시를 좋아했다.

 

‘그가 말했다/ 절벽 끝으로 와라/ 그들이 대답했다/ 무섭습니다/ 그가 다시 말했다/ 절벽 끝으로 와라/ 그들이 왔다/ 그는 그들을 밀었다/ 그래서 그들은 날았다’

 

참고자료 : ▲ 최인호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샘터. 1995 ▲ 최인호 「나는 아직도 스님이 되고 싶다」 여백. 1999 ▲ 최인호 「꽃밭」 열림원. 2007 ▲ 최인호 「인연」 랜덤하우스. 2010 ▲ 최인호 「눈물」 여백. 2013 ▲ 법정과 최인호의 산방 대담 「꽃잎이 떨어져도 꽃은 지지 않네」 여백. 2015 ▲ 여성조선 ‘별들의 고향으로 돌아간 영원한 청년 작가 최인호의 삶’(2013년 11월호) ▲ 백형찬 ‘예술가를 꿈꾸는 젊은이에게’ 태학사. 2015 ▲ 만물상 조선일보(2013.9.27.) ▲ 프리미엄 조선 김윤덕 기자의 Back to The줌마(2014.1.7) ▲ 엘레강스(별책부록) 1976년 9월호 ▲ 네이버 지식백과 - 장석주 ‘나무이야기’(2009.9.9)

 

[가톨릭평화신문, 2023년 7월 2일, 백형찬(라이문도, 전 서울예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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