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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신앙과 정치: 신앙과 비상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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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4-20 ㅣ No.1307

[신앙과 정치] 신앙과 비상사태

 

 

최근 테러 논란을 보면서, 프랑스 혁명기의 ‘공포정치’에 기원을 둔 ‘테러(terreur)’라는 용어를 생각하게 된다. 로베스피에르를 중심으로 한 급진 자코뱅파는 정치적 반대자들을 진압하고 공포를 심어주려고 고문과 투옥, 그리고 단두대를 이용한 잔인한 방식으로 정치했다. 국가의 이름으로 정당성이 인정된 이 공포정치가 바로 ‘원조’ 테러 행위이다.

 

로베스피에르는 도덕 국가에서 인민은 이성으로 관리되고, 인민의 적들은 ‘테러’를 통해 지배받아야 한다고 했다. “테러는 신속하고 엄격하며 타협 없는 정의일 뿐이다. 그것은 도덕의 계시이다. 테러는 민주주의의 특별한 원리가 아니라, 조국을 염려하는 마음에 두어야 하는 가장 근본적인 원칙에서 나온다.” 하지만 로베스피에르도 국가 테러의 집행과정, 파리 혁명재판소를 통해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오늘날 국가 폭력으로 테러의 의미와 대상이 달라졌지만, 독재국가에서는 여전히 정적과 국민을 억압하는 행위로 ‘원조 테러’가 존재한다. 한국 현대사도 예외는 아니다. 가깝게 용산참사(2009년)는 국가 테러의 끈질긴 단면을 보여준다. 작년 11월 이슬람국가(IS)의 파리 테러가 있던 바로 그날, 서울에서는 국가 폭력으로 한 농민이 쓰러졌고 지금도 사경을 헤매고 있다.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가 2백 년 세월을 넘어 여전히 서울에서도 살아있는 이 현실은 한국사회의 민주주의가 국가 테러를 아직 완전히 극복하지 못했다는 방증이다. 한국사회 민주화의 길은 아직도 멀었고, 그래서 민주주의를 다시 묻게 된다.

 

 

주권자의 결단은 신의 결단

 

히틀러의 독재를 이론적으로 정당화시켜 주었던 독실한 가톨릭 법학자 칼 슈미트가 있다. 그는 독일의 가장 혼란스러웠던 시기, 제1차 세계대전과 바이마르공화국 시기의 냉혹한 정치 현실을 읽으면서 최고 통치자의 권위에 복종하고 자신의 안위를 맡기는 홉스주의자가 된다.

 

패전국 독일은 실업과 빈곤, 인플레이션 그리고 감당할 수 없는 전쟁 배당금 때문에 암울했고, 극좌와 극우 사이에 낀 바이마르공화국 의회와 정당은 무능했다. 게다가 전후 닥친 세계적 대공황은 독일사회를 더욱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정치 혐오, 민주주의 정치 질서에 대한 회의가 일어났고, 시민들은 극단적인 어떤 새로운 질서를 원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고, 현재의 모든 문제와 갈등을 기적처럼 말끔히 씻어줄 지도자, 강력한 힘을 지닌 주술적 지도자가 필요했다. 독일인의 메시아였다. 그리하여 독일의 정치는 종교의 세계로 들어섰고, 토론과 합의가 아닌 독재자의 결단이 정치의 핵심이 되었다.

 

나치가 집권하던 1933년, 슈미트는 「정치신학」이라는 책을 썼다. ‘정치신학’은 주권자를 신의 자리로 격상시키는 일종의 ‘독재론’이다. 슈미트에게 주권자는 국민이 아니라 최고 지도자이다. ‘주권자의 결단은 신의 결단’이다. 슈미트의 논리는 마침내 1934년 히틀러를 총통으로 옹립한다.

 

슈미트는 “주권자란 비상사태(예외 상황)를 결정하는 자”라고 했다. 정치의 핵심은 ‘결단’이고, ‘정치적인 것’은 공적인 장에서 적과 동지를 구분하는 것이다. 의회주의의 기초인 ‘토론과 공개성’이 무너지고 의회 기능이 마비된 그 자리 위에 국민이 선출하고 긴급명령권을 가진 최고 지도자가 예외 상황, 곧 비상사태를 결정한다. 예외가 규칙을 만들어낸다. 모든 법은 ‘상황의 법’이 되고, 주권자가 결정을 독점한다.

 

히틀러는 긴급조치를 발동했고 헌법의 효력을 정지시켰다. 적과 이질적인 것들이 배제되면서 내부는 단단히 결속되었다.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 대통령이 장기집권을 위해 선포한 ‘10월 유신’과 흡사하다. 독재자의 비상대권은 정치적 적대자만 향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시민에게 적용된다. 이때 적이란 정적뿐만 아니라 독재자의 구미에 맞지 않는 낯설고 이질적인 모든 존재다. 비상사태에서는 어떠한 독재도 정당화된다. 그리고 내편을 공고히 하고자 적대자를 제거하는 마녀사냥이 시작된다.

 

‘주권자가 비상사태를 결정한다.’는 슈미트의 이론이 정치신학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적과 동지를 누가 어떻게 구분하는가? 오직 최고 지도자만이 할 수 있다. 예외 상황에서 주권자의 결단은 신의 결단과 같은 권위를 지닌다. 권력은 인간에게 신의 자리를 탐하게 하였다. 탐욕의 주권자는 죽을 운명을 지닌 ‘지상의 신(Mortal God)’이 된다. 주권자의 권위 앞에서는 믿음과 복종의 대상, 곧 신앙과 불신앙 사이의 적대적 선택만 있을 뿐이다.

 

이제 정치는 지상의 신을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사이의 투쟁이 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종교와 마찬가지로 정치에서도 광기가 발동한다. 이렇게 합리성과 관용을 놓치게 되면 종교든 정치든 맹목과 광신의 위험이 상존한다. 슈미트는 ‘법학에서 예외 상황은 신학의 기적’과 비슷한 의미라 했다. 기적은 일상에서는 목격할 수 없고 예측할 수 없는 이상 상황이지만, 바로 그 이상한 상황이 절대자의 존재를 확인시키는 계기를 마련한다.

 

슈미트의 악마적 현실 인식은 적과 동지, 신앙과 불신앙의 적대성이 근절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적과 동지의 구별이 이루어지면 사회 안정을 위해 적은 반드시 제거되어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일단의 적이 제거된 뒤에도 여전히 주권자의 권위를 위해 적은 재생산된다. 최고 지도자의 “법적으로 독립된, 다른 무엇으로부터 연역 불가능한 권력”을 유지하려는 이유에서다.

 

슈미트에게 많은 영향을 준 홉스의 말대로, 이제는 “진리가 아니라 권위가 법률을 만든다.” 하지만 무소불위의 강력한 권위를 가진 주권자의 운명은 비극적이다. 자신의 결단을 법 위에 두었기 때문에 자신을 법이 아닌 무력에 맡긴다. 이런 주권자는 누구도 믿지 않는다. 불신이 일상이고, 국민과 소통하지 않을뿐더러 상호신뢰도 없다.

 

따라서 더 강력한 힘을 가진 이가 기존의 주권자를 제거하면 권좌에 오를 수 있다. 이때 기존의 주권자는 법 밖에 있으므로 그를 보호할 법적 장치는 없다. 대통령의 긴급조치가 고도의 통치행위라 하지만, 그것은 권력유지를 위한 예외 상황의 지속일 뿐이다.

 

 

‘계획된 신앙’과 예외적 상황

 

역사는 잔인하리만큼 반복된다. 1976년 서울 명동성당에서 유신독재에 항거하는 ‘3·1민주구국선언’이 있었다. 지난 3월 1일 명동성당에 다시 모인 그날의 사람들이 되새긴 시국은 1976년의 그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단지 변한 것은 당시 선언에 참여한 인사 가운데 상당수가 유명을 달리했다는 사실이다.

 

명동성당에서 민주구국선언 40주년 기념식을 하던 때, 국회에서는 ‘테러방지법’을 막으려고 진행하던 ‘무제한 토론(필리버스터)’의 중단을 선언했다. 뜬눈으로 필리버스터를 지켜보던 시민들은 허탈했고 분노했다. 하지만 현 상황을 ‘비상사태’로 인식하는 집권여당은 흔들림이 없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제1조는 ‘예외적이고 비상한 상황’에 따라 삭제된 셈이다.

 

하지만 여전히 희망은 있다. 지난 3·1민주구국선언 40돌 성명서가 말해주듯이, 대한민국에서 ‘헌법의 계절은 봄’이다. 대한민국 헌법에는 1919년 3·1운동과 1960년 4·19혁명의 정신이 명문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 그 봄은 5·16군사정변으로 짓밟히고 빼앗겼지만, 5·18민주화운동과 6월민주항쟁으로 다시 살아난 역사가 있다.

 

한국의 봄은 정치의 계절이다. 곧 총선이다. 이제껏 보이지 않던 분들이 지하철 입구나 시장에서 보이기 시작한다. 루소는 “인민은 의회의 의원을 선출할 때만 자유로울 뿐이다. 선출이 끝나자마자 그들은 노예가 되고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된다.”고 일갈했다. 서글픈 고발이다. 그런데 크게 틀린 말같이 들리지 않는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계획된 신앙(scheduled faith)’을 돌아보라고 했다. 이는 모든 것을 자신에게 맞추어 놓고 나머지는 눈길을 주지 않는 이기적 신앙을 말한다. 자신의 시간표에 따라 자신만을 위한 신앙생활을 경계하라는 말이다.

 

교회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신앙인은 하느님 나라에 ‘비추어’ 세상의 문제에 공적인 비판을 제기해야 한다. 그것은 신앙을 공적인 영역으로 옮기는 작업이고, 하느님 나라를 위한 ‘역사 내적 충성’, 곧 투신이다. 나만을 위한 신앙은 타자를 배제하는 신앙이다. 이렇게 공감과 연대를 만들지 못하는 나만의 신앙은 자칫 광신으로 빠져들 수 있다.

 

세상은 그렇게 자신의 계획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언제든지 예외 상황, 비상사태가 생기기 마련이니까. 그때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정치의 계절, 이성과 광기가 혼재한 봄에 또 물음을 던진다.

 

* 오민환 바오로 - 가톨릭대학교 신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뮌스터대학교에서 기초신학을 공부하였다. 현재 기쁨과희망 사목연구원 연구실장으로 있으며, 신앙의 희망을 이성적으로 설명하면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사회적 책무에 대한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경향잡지, 2016년 4월호, 오민환 바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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