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3일 (월)
(백) 부활 제7주간 월요일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윤리신학ㅣ사회윤리

[사회] 4차 산업 혁명과 그리스도인: 새 시대 종교의 역할과 그리스도인의 삶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12-23 ㅣ No.1623

[4차 산업 혁명과 그리스도인] 새 시대 종교의 역할과 그리스도인의 삶

 

 

‘4차 산업 혁명’이란 용어가 대중 매체를 통해 회자되고 있다. ‘3차 산업 혁명’의 수많은 산물 가운데 하나인 인터넷을 이용하여 검색해 보았다. 약한 독해력으로 정리해 보면 ‘과학 기술의 확장’ 쯤으로 해석된다.

 

그 확장이 산업의 성격 자체를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 탈바꿈시킨다는 것인가? 그래서 ‘혁명’이라고 불러도 괜찮은 걸까? 아니면 여태까지 축적된 과학 기술의 연장 과정일까? 필자로서는 3차 산업 혁명과 4차 산업 혁명의 기준을 가늠하기 어렵다.

 

 

4차 산업 혁명에 관한 의문

 

「경향잡지」는 2018년 한 해 연재 칼럼으로 ‘4차 산업 혁명과 그리스도인’을 기획하며, 마지막을 장식하는 12월 호 주제로 ‘새 시대 종교의 역할과 그리스도인의 삶’을 다룬다. 이는 아마도 그 과학 기술의 확장이 세계의 얼굴을, 특히 산업의 성격을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시킬 것이라는 시대 진단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라 짐작한다.

 

하지만 ‘4차 산업 혁명’에 관해 이래저래 검색해 보아도 머리를 떠나지 않는 의문이 몇 가지 있다.

 

첫째, 혁명이라 부르든 그냥 발전이라 부르든 산업은, 좀 더 구체적으로 ‘과학과 과학 기술’은 그 자체로 객관적이며 독립적인 영역일까? 또 그 독립된 영역에서 발생하는 변화(진화)의 과정은 필연적이며, 그래서 사람과 사회는 이를 반드시 ‘수용’하여 그 흐름에 몸을 맡길 수밖에 없는가? 혹시 저항하거나 거부해서는 안 되는 것일까?

 

둘째, 산업 영역에서의 그 변화가 세계의 얼굴을 바꿀 유일한 힘인가? 변화시킬 다른 힘은 없는 것일까? 그 힘이 있더라도 그것들은 그저 부수적이거나 기껏해야 그 ‘유일한 힘’을 빛나게 해 줄 장식물에 불과한가?

 

첫째 의문은 ‘인간과 사회(또는 공동체)가 산업과 과학, 과학 기술의 명령에 절대복종하는 수동적인 종과 같은 처지로 전락해도 되는가?’ 하는 물음이기도 하다.

 

둘째 의문은 ‘사회에서 활동(삶)가운데 산업과 과학 기술을 결합한 경제 활동을 작동시키는 힘만이 이 세계를 가꾸는 유일한 동력인 것인가?’ 하는 물음이다. 한편으로 정치 활동과 문화 활동, 특히 종교 활동은 그 새로운 힘의 거침없는 진격을 보조하거나 빛내고, 아니면 거추장스러운 걸림돌에 불과한 것인지의 물음이기도 하다.

 

 

「찬미받으소서」에서 밝히는 생태 재앙

 

프란치스코 교황의 회칙 「찬미받으소서」는 이에 대해 성찰하며 우리를 그 성찰로 안내한다.

 

회칙은 제1차 산업 혁명 이래 근대정신의 일탈한 인간 중심주의와 배타적인 기술주의 패러다임(제3장 참조)이 불러온 재앙, 이른바 ‘생태 재앙’의 증세들을 제1장 ‘공동의 집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까?’에서 고발한다.

 

하늘에서는 대기 오염과 기후 변화의 재앙이 나타나고 있다. 땅에서는 자원의 고갈 가운데 특히 물의 오염과 부족 증세가 심각하다. 하늘과 땅을 생명의 토대로 삼는 생물에게는 다양성 상실이, 인간에게는 삶의 질적인 저하와 또 공동체가 붕괴되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증상이 동시다발적으로 광범위하게 나타나고 있어서 매우 심각하다.

 

그런데도 인류는 그 증세를 나열할 뿐 중병의 근본 원인을 찾아내서 구체적으로 단호하게 해결책을 마련하고 행동하려 하지 않는다. 이는 마치 중병에 걸린 사람의 몸과 같다.

 

어느 날 갑자기 두통이 심해져 고생하는데, 복통까지 생겼다. 평소 같으면 진통제 한 알만 먹어도 금세 진정될 그 증세가 가라앉을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심한 어지럼증에 허리와 무릎 통증까지 겹쳐 화장실에 가기도 쉽지 않다.

 

일시적인 안정을 가져다주는 대증 요법으로는 안심할 수 없는 상태다. 이때 필요한 조치는 한시라도 빨리 병원으로 달려가 응급 처치를 받은 뒤 자세히 검사를 받고 중병의 원인을 찾아 근본적인 치료를 받아야 한다.

 

제1차 산업 혁명 이래 세계는 놀랍게 변해가고 있다. 인류가 산업과 과학 기술 발전의 혜택을 보고 있지만, 겉으로 보이는 눈부신 발전 뒤에는 가늠하기조차 어려운 짙은 그늘이 실재한다.

 

이제 더는 어둠으로도 가릴 수 없는 재앙의 증세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고 있다. 특히 인류의 소수가 그 눈부신 발전의 혜택을 독점하다시피 하는 동안에, 자연과 사람과 사회라는 무수한 약자가 신음하고 있다. 그 재앙의 고통스러운 짐을 짊어진 이들의 현실은 매우 심각한 문제다.

 

 

새로운 시대에 대한 교회의 성찰

 

바로 그런 시기에 공교롭게도 다보스 포럼은 ‘제4차 산업 혁명’이라는 수사(修辭)를 혜성처럼 등장시켜 새로운 미래를 전망한다. 제1차, 제2차, 제3차 산업 혁명이 남겨 놓은, 우리 지구가 앓고 있는 가혹하고 고통스러운 중병을 치유하겠다고 나선 모양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찬미받으소서」에서 “인류는 자신의 기술력 때문에 갈림길을 마주하게 된 새로운 시대에 접어들었다.”(102항)고 알리며, 가장 먼저 그 기술력으로 말미암은 무모한 달리기를 멈추자고 다급하게 호소한다.

 

나아가 호흡을 가다듬고 인류가 그동안 걸어온 근대의 길을 재점검하고 나아갈 길을 찾기 위해서 정직한 대화를 나누자고 제안한다. 여기서 종교, 특히 우리 교회의 임무와 역할과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 무거운 마음으로 다시 한번 성찰하게 된다.

 

이미 50여 년 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현대 세계의 교회에 관한 사목 헌장’ 「기쁨과 희망」(이하 사목 헌장)에서 밝힌 것처럼, 교회는 “현세 사물의 정당한 자율성”(36항)에 대해, 곧 산업이든 경제, 정치, 문화든 그 고유의 정당한 자율성을 긍정하고 존중한다. 그러면서도 개인과 인류 사회에 도움을 주는 것이 바로 ‘교회의 임무’라고 분명하게 선언한다(제1부 제3장, 제4장 참조).

 

사목 헌장은 교회가 “결코 현세적 야심에서 움직이지 않는다.”고 분명히 밝히며, 다음과 같이 알린다. “교회는 오로지 하나의 목적을 추구한다. 곧 성령의 인도로 바로 그리스도께서 하시던 일을 계속 하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오셨으며, 심판하시기보다는 구원하시고 섬김을 받으시기보다는 섬기러 오셨다”(제3항).

 

또한 사목 헌장은 이렇게 일깨운다. “이러한 임무를 완수하고자 모든 시대에 걸쳐 교회는 시대의 징표를 탐구하고 이를 복음의 빛으로 해석하여야 할 의무를 지니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각 세대에 알맞은 방법으로 교회는 현세와 내세의 삶의 의미 그리고 그 상호 관계에 대한 인간의 끝없는 물음에 대답해 줄 수 있을 것이다”(제4항).

 

 

다시금 일깨우는 교회의 역할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폐막한 지도 50여 년이 지났지만, 이 땅의 ‘교회의 역할과 그리스도인의 삶’은 여전한 듯하다.

 

제1장과 제3장이 ‘시대의 징표’를 탐구하고, 제2장과 제6장이 ‘복음의 빛’으로 그 징표를 해석한 것이라면, 제5장은 인간의 물음에 대한 교회의 대답, 곧 ‘접근과 행동 노선들’이라 할 수 있다.

 

제5장의 제목들만 살펴보아도 교회의 임무와 그리스도인의 삶이 ‘대화의 촉진과 참여’를 통한 해결책 마련과 구체적 행동임을 알 수 있다.

 

‘I. 환경에 관한 국제 공동체의 대화’, ‘II. 국가 및 지역 차원의 새로운 정책들을 위한 대화’, ‘III. 대화와 의사결정의 투명성’, ‘IV. 인간의 완성을 위한 대화에서의 정치와 경제’, ‘V. 과학(학문)과 대화하는 종교들.’ 물론 그 대화와 행동 노선들의 현세적 목표는 바로 ‘참된 인간화와 참된 사회화’라 할 수 있겠다.

 

산업, 특히 과학과 과학 기술은 결코 가치 중립적이며 독립적인 그 어떤 것이 아니다. 참된 인간화와 참된 사회화에 기여하지 않고 오히려 사람과 사회를 억압적으로 지배하며 그 위에 군림해서는 결코 안 될 것이다.

 

이는 혁명이든 발전이든, 경제적 이익을 우선으로 과학과 과학 기술을 결합한 산업이 언제나 사람과 사회와 자연의 생태계에, 그리고 무엇보다도 약한 존재들에게 참되게 기여해야 할 것이다. 이는 그 ‘한계’의 범위 안에서 분명하게 통제되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회칙 「찬미받으소서」를 통해 새 시대를 살아갈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다시금 일깨운다.

 

* 박동호 안드레아 - 서울대교구 이문동성당 주임 신부로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이다.

 

[경향잡지, 2018년 12월호, 박동호 안드레아]



1,300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