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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윤지충 바오로: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주장한 순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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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1-14 ㅣ No.1422

김길수 교수의 복자들의 영성 (4) 윤지충 바오로 -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주장한 순교자



윤지충 하면 우리는 너무 쉽게 제사 문제로 순교하신 분으로 생각하고 맙니다. 그러나 윤지충 바오로는 적어도 다음과 같은 점에서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귀중한 순교복자로 기억되어야 하겠습니다.

첫째, 윤지충 바오로는 조선정부의 공식적인 사형 판결을 받고 순교한 우리나라 최초 순교자라는 점입니다.

둘째, 한국 초대교회로만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적 신앙인으로 조선정부의 정교합일적인 통치원리에 저항하여 정교 분리의 원리를 주창한 순교자라는 점입니다.

그는 비록 제사 문제로 사회 의식적 측면에서 첨예한 충돌을 일으킨 주인공이기도 하지만 그것 때문에 더 의미 있는 또 다른 의의를 묻어 버리고 단순히 제사를 거부한 순교자로만 기억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윤지충은 전라도 진산군 장구동에 거주하던 유명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자는 ‘우용’이고 1801년 신유박해 때 전주에서 순교한 복자 윤지헌 프란치스코는 그의 아우입니다. 본래 그의 조상들은 전라도 해남에 살았는데 그의 가문에서는 벼슬에 오른 분들도 많이 있었고, 또 학문적으로도 이름을 남긴 분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윤지충의 아버지 윤경은 의원을 생업으로 삼고 살다가 결혼 후 진산으로 옮겨와 살게 되었습니다. 본관이 해남이며 유명한 화가 윤두서의 증손자인 윤지충은 아버지 윤경, 어머니 안동 권씨 사이의 맏아들로 전주부 양소면에서 태어났습니다.

윤지충 바오로는 어려서부터 총명함과 단정한 품행으로 유명했으며 학문에 있어서도 평판을 얻어 칭송이 자자했는데 그가 25세가 되던 해인 1783년 진사시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자 그의 명성이 더욱 높아졌습니다. 진사가 된 이듬해인 1784년 겨울에 윤지충은 서울에 와서 처음으로 천주교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명례방 김범우 토마스에게서 ‘천주실의’와 ‘칠극’을 빌려 필사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때 그는 천주교 교리를 대강 짐작은 했지만 실천하지는 않았습니다.

이 일이 있은 다음 스스로 교회 서적을 구해 읽기는 했어도 믿지는 않았기에 1785년 을사추조 적발 사건 때에는 가지고 있던 교리서들을 모두 불태우거나 물로 씻어 버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1786년 고종 사촌형인 정약종에게서 천주교 교리 전반에 대해 배우고 나서야 비로소 천주교를 받아들이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고 집으로 돌아온 후에는 어머니와 동생 윤지헌은 물론 자신의 명성을 듣고 찾아오는 모든 사람에게도 교리를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른 교우들과 접촉하거나 드러나게 교회활동을 한 기록은 없습니다. 다만 엄밀한 신앙 실천 생활로 깊은 신심을 지니고 있었음이 이제 사실로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1790년 윤유일이 북경에서 가져온 구베아 주교의 사목교서에는 조상제사 금지조항이 들어 있었고 한국교회는 이 문제로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초대 교회 건설 공로자들인 양반 지식인들도 제사 문제로 교회를 떠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유림의 반발과 가문과 가족들의 박해를 받는 와중에 제사 문제로 지식인 지도자들이 교회를 떠나는 모습은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한국 초대교회의 위기였던 이런 때 복자 윤지충 바오로는 교회의 가르침을 그대로 받아들여 집안에 모셨던 신주를 불살랐습니다. 그의 올바른 신앙생활은 1791년 봄 그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시고 상례를 치르게 되면서 사람들 앞에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윤지충 바오로는 모친상을 입고 지극한 애통함으로 효성을 다해 모든 상례의 절차와 예식을 정성껏 치렀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서 상례에 따른 제사만은 지내지 않았습니다. 이 광경을 본 친척과 동료들은 비난하고 이 소문은 천주교를 반대하는 세력의 선봉인 홍낙안의 귀에도 들어갔습니다.

이때 윤지충 바오로의 편에서 이를 따라 함께 해 준 사람은 그의 외사촌인 복자 권상연 야고보뿐이었습니다. 권상연 야고보는 사헌부 지평을 지낸 권기의 고손자로서 아버지는 권세학, 어머니 전주 이씨이며 조상대대로 공주 탄방에서 살다가 고조부 권기 때에 진산으로 이주했습니다.

그는 윤지충의 외사촌으로 이웃에 살며 윤지충이 탐독하던 ‘천주실의’와 ‘칠극’을 빌려 보고 신앙에 눈을 떴고 윤지충에게 세례를 받았으며 이때 윤지충과 함께 교회의 가르침을 따라 윤지충과 동일한 신앙고백으로 순교하여 윤지충과 함께 시복되신 분이십니다. 천주교 반대 세력의 선봉인 홍낙안은 진산 군수 신사원에게 편지를 보내 윤지충과 권상연을 고발하고 다시 좌의정 채세공에게도 고발해 처형하라고 했습니다.

좌의정 채세공은 전라감사 정민시에게 체포하여 진위 여부를 조사하도록 명령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윤지충은 광주로, 권상연은 한산으로 각각 몸을 피했습니다. 이를 안 관원들은 이들 대신 윤지충의 숙부인 윤증을 체포하여 옥에 가두었는데, 이를 안 윤지충과 권상연은 이내 진산 관아에 자수하여 진산 관아에서 그리고 전주 감영으로 이송되며 심문을 받았습니다.

윤지충은 그의 유일한 동지인 외사촌 권상연과 함께 옥고를 치르며 심문을 당하는 시련 중에 당당히 순교의 길로 나아간 장렬한 모습은 여러 경로를 통해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가 옥중에서 직접 기술한 공술서를 통해서 우리는 그의 진면목을 분명히 느낄 수 있습니다. 먼저 제사 문제가 중국의 경우와 우리나라의 경우는 그 쟁점이 서로 다르다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중국에서 제사 문제는 의례 논쟁으로 하느님의 호칭을 중국어로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배공 제조로 공자를 공경하고 조상에 제사를 지내는 문제인대 이 중에 배공 제조가 종교의식인가? 순수한 민간의식인가가 그 초점입니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에서의 관심은 신주를 조상처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것이 왜 불가한가에 초점을 두고 있었습니다. 신주를 조상처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것이 안 되는 까닭을 윤지충은 그의 공술서에서 분명하게 밝혔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천주교의 십계명 중에 제4단계가 부모를 공경하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의 부모가 신주 안에 계신다면 천주교를 믿는 사람들은 누구나 신주를 공경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신주들은 나무로 만든 것이고 그것은 저와는 살이나 피나 목숨으로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그것들은 저를 낳고 기르는 수고에 아무런 몫도 하지 않았습니다. 제 아버지나 할아버지의 영혼은 일단 이 세상에서 나가면 그런 물질적인 것에 붙어 있을 수가 없게 됩니다. 그런데 부모의 명칭은 아주 위대하고 매우 존경받을 만한 그 무엇인 만큼 어떤 일꾼이 만들고 꾸민 물건을 감히 가져가다가 제 부모로 삼고 또 실제로 그렇게 부를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바른 이치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제 양심은 그것을 승복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비록 그로 인하여 양반 호칭을 박탈당한다고 해도 하느님께 대하여 죄인이 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윤지충은 부모와 조상의 신주가 목수가 만든 한 조각 나무 토막에 불과한 것이므로 그것을 부모처럼 대하는 것은 미신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윤지충은 지극한 효성의 발로로 드리는 제례를 무조건 미신이라 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나무토막에 불과한 목수의 제작물인 신주를 부모처럼 모시고 제사를 지냄이 이치에 맞지 않고, 부모의 혼이 신주에 붙어 있을 수가 없음을 지적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법을 지켜야 하는 것이 양반의 법도라면 차라리 양반의 법을 버릴지언정 양심상 하느님의 올바른 법을 어기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잠드신 부모님께도 음식을 드리지 않는 법인데, 돌아가신 부모님께 음식을 대접하듯 하는 것은 허식이요 가식적인 것이라고 했을 뿐입니다.

이제 윤지충의 공술서는 이 모든 이치를 떠나서 한 개인이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든 말든 그것은 개인적인 사생활의 영역으로 국가가 간여할 일이 아니며, 또 실제로 조선법에도 그런 규정이 없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신주를 모시지 않는 서민들이 그렇다고 하여 정부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과 또 가난하기 때문에 모든 제사를 규정대로 지내지 못하는 양반들도 엄한 책망을 당하지 않는다는 것을 고려하여 주십시오. 그러므로 제 생각으로는 신주를 모시지 않고 죽은 이들에게 제사를 드리지 않으면서도 제 집에서 천주교를 충실히 신봉하는 것은 결코 국법을 어기는 것이 아니 듯합니다.”고 했습니다.

윤지충은 여기에서 두 가지 점을 분명히 지적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일반 시민이 신주를 모시지 않는다고 해서 정부를 반대하는 것이 아닌데, 왜 양반인 내가 신주를 모시지 않는다는 것이 반정부의 죄가 되는가? 둘째, 신주를 모시거나 그렇지 않거나 또 제사를 드리거나 드리지 않거나 그것은 순전히 개인적인 종교적 신앙생활로서 국법에 어긋남이 없는데 왜 국법으로 다스리려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는 유교가 분명 양반들만의 전유물이며, 조선정부가 유교를 극고의 위치에 놓고는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지 않고 혼동하고 있는 ‘정교 합일’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한 것입니다. 이렇게 정교가 분리되지 않았던 유교 국가에서는 국가 밑에 종교가 있게 되어 종교가 국가권력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실제로 조선정부에서 정치와 종교는 혼동되었고, 이 정교 합일 현상은 천주교에 대한 한결같은 적대적 태도를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당쟁에서도 종교를 빙자한 정적 타도의 구실로 척사를 논하여 당쟁인지 척사인지 구별할 수 없게 하였습니다.

윤지충 바오로는 이러한 문화적인 정치적 배경에서 그의 순수한 신앙을 고백했고 , 결국 정승인 채세공의 간청으로 참수형을 당하는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1791년 12월 8일 오후 3시 사형이 집행되었고 그의 나이 33세였으며 권상연은 41세였습니다. 그가 죽은 형장의 피에 엉긴 수많은 기적으로 인하여 조선 신자들의 손수건에 그 피가 적셔져 북경에 보고되기도 했습니다. 그는 선각자적인 지식인들이 제사 문제로 교회를 떠나갈 때, 참그리스도교 신앙인으로 외롭게 남아 한국천주교회를 지킨 위대한 첫 순교자였습니다.

[평신도, 2014년 겨울호(VOL.46), 김길수 사도요한(전 대구가톨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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