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9일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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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철학ㅣ사상

철학 에세이: 나를 넘어선다는 말의 참뜻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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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08-18 ㅣ No.120

[가톨릭 철학 에세이 - 철학이 던지는 행복에 관한 열 가지 질문 8]

‘나를 넘어선다’는 말의 참뜻은 무엇일까요?


나의 사랑, 나의 누이여 / 꿈꾸어 보세
거기 가 함께 사는 감미로움을!
한가로이 사랑하고 / 사랑하다 죽으리
그대 닮은 그 나라에서!
그 뿌연 하늘의 / 젖은 태양은
나의 마음엔 신비로운 매력
눈물 속에서 반짝이는
알 수 없는 그대 눈동자처럼
거기에는 모두가 질서와 아름다움
사치와 적막 그리고 쾌락(샤를 보들레르, ‘여행에의 초대’).

여수 밤바다 이 바람에 걸린 알 수 없는 향기가 있어
네게 전해주고파 전활 걸어 뭐하고 있냐고
나는 지금 여수 밤바다 여수 밤바다
아, 너와 함께 걷고 싶다 / 이 바다를 너와 함께 걷고 싶어
(버스커 버스커, ‘여수 밤바다’).

우리는 아무런 감사도 인정도 받지 못하면서, 내적인 만족마저 못 느끼면서도 희생을 한 적이 있는가. 우리는 전적으로 고독해 본 적이 있는가. 우리는 순전히 양심의 내적인 명령에 따라, 아무에게도 말 못할, 아무에게도 이해 못 시킬 결단을, 혼자서, 아무도 나를 대신해 줄 수 없음을 알면서, 자신이 영영 책임져야 할 결단인 줄 알면서 내린 적이 있는가. (…) 그와 같은 일이 내게 있었다면 정신을 체험한 것이다. 그것은 곧 영원의 체험이다. 정신은 이 시간적 세계의 일부 이상이라는 경험, 인간의 의의란 이 세상의 의의나 행복으로 다할 수 없다는 경험, 현세적 성공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아무 근거도 없이 그저 믿고 뛰어드는 모험의 경험인 것이다(카를 라너, 「일상」에서).


우리는 왜 여행을 꿈꾸는가?

8월, 여름이 깊어졌습니다. 한낮의 열기에도 장맛비에도 이제는 익숙해졌습니다. 밤의 나른함과 낮의 활달함이 어느 시기보다도 생생하게 교차하는 때가 여름입니다.

이즈음 뜨거운 태양빛이 쏟아지는 거리를 걸을 때, 차창에 흐르는 빗물을 보며 향기 좋은 커피를 마실 때, 머리에 자주 떠오르는 단어가 하나 있으니 바로 ‘여행’입니다.

훌쩍 먼 곳으로 떠나고 싶은 마음은 그저 ‘피서’라는 말로는 다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나른한 여름밤에 참 잘 어울리는 음악 가운데 하나가 샤를 보들레르의 시에 앙리 뒤파르크가 곡을 붙인 프랑스 가곡 ‘여행에의 초대’입니다.

서정적이면서 나른한 관능성의 멜로디와 분위기도 좋지만, 아마도 그 제목 자체가 음악에 빠져들 정서를 이미 마련해 주기 때문일 것입니다. 먼 곳의 풍경에 대한 상상이나 기억이 떠오르고 동경이 깨어나면, 이미 마음은 음악에 열리게 되니까요.

모르긴 하지만 여름날 많은 이들이 서점의 여행서적 분야에서 책을 뒤적이며 소리 없이 그러한 여행의 동경을 달래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세련된 글로 현대인의 숨은 생각과 갈망을 꼭꼭 짚어내는 작가 알랭 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이라는 책과 「공항에서 일주일을」이라는 책을 보면 우리가 여행을 꿈꾸는 것 자체에 얼마나 큰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여름에 여행을 생각하는 것은, 물론 많은 경우, 더위와 일에 지친 심신을 쉬게 하는 문자 그대로의 ‘휴가’,또는 아이들의 성화에 못 이겨 부모로서 의무를 다하는 ‘일’로 보입니다. 아니면 사랑하는 연인과 단둘이 있고 싶은 낭만의 표현이겠지요.

그러나 가만 생각해 보면 그것보다도 더 뿌리 깊은 ‘그리움’이 있기에 ‘여행’이라는 말이 우리를 설레게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좀 거창하게 말하면 우리의 존재에 뿌리내린 갈망이라 할까요. 신학자들이 말하는 인간의 ‘초월성’의 가장 일상적인 표시 말입니다. 우리는 내가 있는 곳을, 또 나 자신을 넘어서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그래야만 나 자신을 비로소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자아를 찾고 나를 실현하는 것에 대한 현대인들의 깊은 관심에 비례해서, 여행이 상징하는 ‘자신을 넘어서는 일’에 대한 열망이 커진다는 사실은 행복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 안에 이런 근원적 그리움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면, 이제 물어야 할 것은, 이런 동경이 향하는 참된 자리가 어디인가 하는 것입니다. 좀 어려운 말로 하자면 ‘초월의 대상’을 질문하는 것입니다.


초월의 참된 자리는 어디일까요?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의 글을 읽다 보면 자기를 넘어서는 것, 초월을 가리키는 두 단어를 만나게 됩니다. 하나는 ‘엑스타시스(extasis)’로서 여기서 유래된 현대어 ‘엑스터시’에서 짐작할 수 있듯, 자기를 잊고 열광에 빠져드는 몰아, 망아의 상태를 말합니다. 그리고 이 단어는 예술과 관련해서 자주 사용됩니다.

우리는 여행을 통해 기존의 자기를 잊고 사회적 역할에서 자유로워지는 기회를 갖기를 은근히 바라곤 하는데 이런 바람도 어느 정도는 ‘엑스타시스’로서의 초월과 연관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유형의 초월을 극적으로 체험하게 하는 계기가 바로 격렬한 음악과 움직임(춤)에 빠져들 때입니다.

열광을 통해 일종의 초월의 ‘분위기’를 느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면 무엇보다 멋진 록 음악 공연에 가보면 됩니다. 황홀한 공연은 때때로 시간과 경제적 문제로 미뤄야 했던 먼 곳에서의 긴 여행을 단 하룻저녁에 압축해서 경험한 느낌을 갖게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탈아’를 체험하는 것이 과연 자기를 ‘넘어서는’ 것의 참모습일까 질문하게 되는 것은 그 열광의 하룻밤이 지난 후 느끼는 묘한 허무감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플라톤이 말하는 초월에 대한 두 번째 단어 ‘에페케이나(epekeina)’에 주목하게 됩니다.

이 단어는 ‘넘어서’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플라톤은 자신의 주된 저서 「국가」에서 태양의 비유를 들 때 “존재를 넘어서”라는 문맥에서 이 단어를 사용합니다. 진리를 인식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이 단어를 등장시키는 것이지요. 여기서 존재를 넘어서 만나게 되는 대상은 ‘선의 이데아’입니다.

플라톤이 이데아론을 주장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지만, 한 가지 더해서 그는 이데아들의 원천으로서 선의 이데아를 말하고, 이를 태양에 비유합니다. 여기서 플라톤이 말하는 존재는, 세상의 통념과 상식과 경험의 제한에서 정화된, 정신만이 파악할 수 있는 어그러짐 없는 원형으로서의 존재입니다.

선의 이데아, 태양은 이런 참존재의 세계의 원천으로서 이것들조차도 ‘넘어섭니다.’ 플라톤이 ‘존재를 넘어서는’ ‘선’을 말하는 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영감이 됩니다. 자기를 넘어서는 것의 참뜻은 결국은 모든 생명이 태양을 향하듯 나를 넘어서는 ‘선’을 향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플라톤적 의미에서 선을 향함은 일차적으로 존재론과 신학의 차원을 담고 있습니다. 곧 존재들을 초월하는 하느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선’이란 말이 뜻하는 여러 차원을 생각하면, 선을 향함이 나 자신 안에 갇혀있는 존재로 머무는 것에서 그 존재를 넘어서 타자에게 향하는 ‘이타주의’의 움직임도 함축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나를 넘어섬’으로서의 행복을 말한다는 것은, 결국 행복이라는 말이 ‘자기애’만이 아니라 ‘이타주의’를 필연적으로 포함한다는 뜻이 됩니다.

그런데 행복이라는 개념은 과연 이타주의와 자기애를 화해시킬 수 있을까요? 여행의 계절, 8월을 보내고 가을의 예감 속에서 이 문제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 최대환 세례자 요한 - 의정부교구 신부. 정발산본당 주임으로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과 가톨릭교리신학원에서 철학을 가르치고 있다. 연재하는 동안 행복에 대한 독자들의 견해와 질문을 열린 마음으로 기다린다(theophile@catholic.or.kr).

[경향잡지, 2012년 8월호, 최대환 세례자 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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