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8일 (토)
(백) 부활 제7주간 토요일 이 제자가 이 일들을 기록한 사람이다. 그의 증언은 참되다.

종교철학ㅣ사상

과학과 신앙: 땅과 하느님의 섭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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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08-18 ㅣ No.121

[과학과 신앙] 땅과 하느님의 섭리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창세 1,1). “하느님께서 ‘하늘 아래에 있는 물은 한곳으로 모여, 뭍이 드러나라.’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하느님께서는 뭍을 땅이라, 물이 모인 곳을 바다라 부르셨다”(창세 1,9-10). 이와 같이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땅, 곧 지구 위에 우리가 살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땅은 푸른 싹을 돋게 하여라. 씨를 맺는 풀과 씨 있는 과일나무를 제 종류대로 땅 위에 돋게 하여라.”(창세 1,11)하시고 “땅은 생물을 제 종류대로, 곧 집짐승과 기어 다니는 것과 들짐승을 제 종류대로 내어라.”(창세 1,24) 하셨다.

또한 우리 인간에게는 “이제 내가 온 땅 위에서 씨를 맺는 모든 풀과 씨 있는 모든 과일나무를 너희에게 준다. 이것이 너희의 양식이 될 것이다.”라고 하셨다. 그리고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땅을 기어다니는 모든 생물에게는 온갖 푸른 풀을 양식으로 준다.”(창세 1,29-30)고 하셨다. 이렇게 우리는 하느님에게서 땅을 선물로 받았고, 그 땅에서 나는 모든 과일나무를 양식으로 받았다.


생물들의 생존을 위한 장소, 땅

하느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만드신 땅 그리고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선물로 주신 땅, 곧 지 구의 표면을 덮고 있는 얇은 토양층은 인간을 포함한 지상의 모든 생물의 생존과 절대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노자의 「도덕 경」에도 “사람은 땅을 규범으로 하고, 땅은 하늘을 규범으로 하고, 하늘은 도를 규범으로 하고, 도는 자연을 규범으로 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 자연을 창조하신 분은 바로 하느님이 아니신가. 땅을 하느님에게 선물로 받았으므로 우리는 땅을 잘 관리할 책무를 가진다.

옛날부터 우리 조상은 땅에서 곡식과 과일, 채소 등을 생산하였으며, 따라서 비옥한 토양은 곧 곡물의 생산성을 결정하였다. 그러나 토양은 우리 인간의 삶만을 위한 장소가 아니며, 식물과 동물 그리고 박테리아와 균류에 이르는 아주 작은 생물들의 생존을 위한 장소이기도 하다.

비극적인 일은 각종 중금속과 유기화합물 때문에 토양이 갈수록 오염되고 있으며,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토양이 오염되면 거기에서 자라는 식물이 오염되고, 오염된 식물과 그 식물을 섭취하는 동물과 그 동물을 먹는 인간 역시 오염된다. 이는 토양이 오염되면 될수록 인간도 죽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대과학의 관점에서 지구는 45-46억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변천하여 왔다. 이 장대한 세월 동안 수많은 생물이 탄생하고 번성하고 멸종하였다. 가장 오래된 선캄브리아기에는 최초의 단세포 생물과 다세포 생물이 출현하였다. 고생대 캄브리아기와 오르도비스기는 무척추 동물이 번성한 시대였다. 실루리아기와 데본기는 어류의 시대, 석탄기와 페름기는 양서류의 시대였다.

중생대는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파충류 특히 공룡의 시대다. 가장 최근 시대인 신생대는 포유류의 시대이며, 현생인류(Homo sapiens sapiens)는 약 20만 년부터 출현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인류는 지구의 역사에서 가장 최근에 나타난 생물이다.

창세기에 따르면 하느님께서는 모든 식물과 동물을 창조하시고 난 다음 맨 나중에 인간을 창조하셨다. 이는 과학적으로 입증된 사실과도 잘 부합한다. 다만 시간의 단위에서는 차이가 있는데,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저녁과 아침 사이의 시간 단위가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하루라는 시간과 동일한지는 알 수 없다. 하느님의 권능은 무한하시고 그분의 뜻은 오묘하시기 때문이다.


무한한 하느님의 권능, 나약한 인간

눈을 우주로 돌려보자. 지구는 태양계의 생성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으며, 태양계는 은하계의 일부이다. 또한 우리 은하계는 수많은 은하계의 일부이다. 이렇게 볼 때, 우주의 크기란 인간의 머리로는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광대하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광대한 우주 속에 박혀있는 1,000억 개가 넘는 별들을 바라볼 때, 하느님의 무궁무진한 권능과 그 뜻을 우리가 어떻게 가늠할 수 있으리.

우리는 하느님의 권능을 다시 한번 되새김과 동시에 스스로 겸손해 질 수밖에 없고, 하느님께 우리를 온전히 맡기는 삶을 살아가야 함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우리가 우리의 한계를 잘 인식할 때,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과 순명은 더욱더 견고해질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왜 위대한 성인인가? 그가 진짜로 엄청난 지식을 가지고 있어서인가? 그는 인간의 한계를 깨달았으며, 신적인 존재에 대한 자각이 있었고, 그래서 “너 자신을 알라.”고 하였다.

인간의 위대함이란 기술과 학문의 발달에 근거한 뛰어남에 있다기보다는 겸손함에 있다. 그리고 그 겸손함은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깨달음으로부터 온다. 현대과학이 아무리 발전하였다고 한들 인간의 능력에 근거한 과학 지식으로는 자연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다만, 하느님을 통해서만 그리고 신앙을 통해서만 자연을 이해할 수 있다.

칸트에 따르면, 자연의 모든 것은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 우리 인간도 자연의 법칙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으며, 이는 곧 도덕적인 행동이 될 것이고, 최고의 선이 될 것이다. 그런데 자연의 법칙이란 누가 만든 것인가? 바로 하느님께서 만드셨다. 따라서 우리 인간은 자유롭게 사고하고 행동하는 이성적인 존재로서 최고의 선인 하느님의 뜻을 믿고 따를 수밖에 없다.


인간이 돌아갈 곳, 하느님

예수님께서는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마태 19,30)라고 하셨다. 이것은 곧 하느님의 뜻이기도 하다. 우리는 각자 온 힘을 다하여 하느님의 뜻에 맞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느님은 가장 고귀한 존재로서 당신이 이루신 업적을 완전하게 하셨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으며, 강요 때문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하느님께 순명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으니 인간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노예와 같은 존재로 취급하실 수도 있으셨으나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칸트는 인간의 자유로운 행동을 자율적인 행동으로 보았다. 자율적인 행동은 사회적인 관습이 아닌 내가 나에게 부여한 법칙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자율성을 우리에게 주신 하느님의 그 깊은 뜻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을진대, 시작부터 인간이 하느님을 무조건적으로 믿고 복종하게 하실 수도 있으셨으나 그렇게 하지 않으심으로써 스스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 보이신 것이다. 또한 아무리 좋은 일, 선한 일이라도 그것이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당신 몸소 보여주신 것이다.

인간은 하느님으로부터 존엄성을 가진 존재로 탄생하였으며, 스스로 자유롭게 행동할 능력을 부여받았으므로 우리의 행동은 도덕적인 가치를 지녀야 한다. 곧 우리의 행동 자체가 목적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마태 6,3)라는 말씀으로 우리에게 가르치셨다.

이와 같이 우리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으나, 한편으로는 주변의 타율에 따라서 종속의 세계 또는 감각의 세계 속에서도 살고 있다. 이러한 양면성 때문에 우리는 때때로 또는 자주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거나 잊고 살아가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결국 하느님께 돌아갈 수밖에 없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루카 15,21)라고 하면, 아버지께서는 죽었다고 생각한 아들이 돌아왔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뻐하신다.

우리는 가톨릭 신자로서 항상 겸손과 사랑으로 그리고 하느님께 감사하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할 것이다. 겸손과 사랑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땅을 사랑하는 마음과 연결된다. 이는 곧 하느님께 감사하고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 마음이다.

겸손은 자기 존중과도 연결된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서 겸손해질 때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힘을 주시며 이는 자기 존중의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그것은 자만심이 아니다. 자만심은 자기 자신을 스스로 자랑하며 뽐내는 마음이다. 이러한 마음에서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없다.

우리 각자에게 생명을 주심에 감사드리는 우리는, 아름답고 쾌적한 지구에서 보드라운 흙과 깨끗한 물을 그리고 온갖 생물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음을 느낄 때 하느님을 찬미하지 않을 수 없다. 참다운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느님께 순명하면서 하느님께서 주신 땅을 오염시키지 않고 지구의 생명체들과 조화롭게 살아가자.

* 함세영 마르티노 - 부산대학교 지질환경과학과 교수이며, 가톨릭교수회 회장이다.

[경향잡지, 2012년 8월호, 함세영 마르티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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