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8일 (일)
(백) 부활 제5주일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성극ㅣ영화ㅣ예술

영화칼럼: 영화 아빠의 화장실 - 여백의 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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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07-02 ㅣ No.79

[영화칼럼] 영화 ‘아빠의 화장실’ - 2009년 감독 세자르 샬론


여백의 몫

 

 

지난 2014년 여름에 있었던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한국 방문은 교회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에 커다란 이정표가 되어주었습니다. 특히 권위 대신 겸손과 포용의 자세를 앞세운 모습을 방한 중에도 고스란히 보인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행보는 시대의 징표로서 교회의 역할에 대하여 성찰하도록 이끌어주었습니다.

 

그러나 교황님의 한국 방문은 교회와 우리 사회의 일부 어두운 면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교황님의 방한 기간 동안 교황님의 행보를 대대적으로 보도한 언론들은 ‘교황 특수’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교황님의 한국 방문을 경제적인 맥락에 가두기도 했습니다. 교황 관련 서적으로 가득했던 대형 서점에는 특수를 노린 듯 급히 출간된 것처럼 보이는 교황 관련 서적들이 일부 눈에 띄었습니다. 방한 이후에는 교세 확장이나 교회의 이미지 제고와 같은 차원에서 교황 방한의 의미를 좁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분석도 있었습니다. 이같이 교황님의 한국 방문을 세속적인 관점으로만 바라보았던 일부 시선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글이 있습니다. 한현수 시인의 ‘여백의 몫’이라는 제목의 시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 첫날, / 가능한 큰 글씨의 친필서명을 받기 위해 / 주교단은 큰 종이를 교황에게 내밀었다 // 교황은 돋보기로 봐야 할 정도의 작은 글씨로 / francisco라고 썼다 // 모두 함께 웃었다 / 주교들은 깨알 같은 이름 때문에 웃었고 / 교황은 여백이 커서 웃었다.

 

우루과이에서 만들어진 영화 <아빠의 화장실>은 한현수 시인이 언급한 ‘여백의 몫’을 향한 고민을 안겨주는 작품입니다. 1988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우루과이 순방길에 일어났던 실제 사건을 소재로 삼은 이 영화는, 우루과이와 브라질 국경 사이에 놓인 작은 시골 마을 ‘멜로’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방문 계획이 알려지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이 소식에 마을사람들은 교황님을 따라 방문하게 될 관광객들을 상대로 장사를 해서 돈을 벌 생각에 들뜹니다. 이때 주인공 비토(자르 트론코소 분)는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삼는 ‘유료 화장실’을 만들어 돈을 벌겠다는 아이디어를 떠올립니다. 비토는 한 가정의 가장으로 밀수를 통해 생계를 유지해왔지만, 걸핏하면 국경을 지키는 군인들에게 밀수품을 뺏기는 통에 생활고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교황님의 마을 방문은 놓칠 수 없는 일확천금의 기회이자 가족들을 궁핍한 일상으로부터 구해낼 수 있다는 희망이 됩니다.

 

주인공 비토를 비롯한 마을 사람들이 교황 방문에 맞추어 품었던 희망은 얼마 지나지 않아 허황된 꿈이었음이 드러납니다. 그런데 이를 단순히 비토와 마을 사람들이 무리한 욕심을 부린 결과로 치부할 수만은 없습니다. 영화는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교황님의 방문을 일확천금의 기회로 여기게 만들었는지를 물으며, 영화를 마주한 관객들이 영화 속 등장인물들과 함께 ‘하얀 여백’의 가치에 더욱 몰두할 수 있는 세상을 꿈꾸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이는 자연스레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방한 때 우리의 모습을 떠오르게 합니다. 교황 주일을 맞으며, 9년 전의 우리는 과연 무엇 때문에 교황님의 방문과 방문 중의 행보에 열광하였는지를 진중하게 되물어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2023년 7월 2일(가해) 연중 제13주일(교황 주일) 서울주보 7면, 구본석 사도요한 신부(행당동성당 부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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