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8일 (일)
(백) 부활 제5주일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종교철학ㅣ사상

여가와 관조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2-12-27 ㅣ No.472

[조찬 세미나 02] 여가와 관조

 

 

오늘 제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분야인 그리스 고대 철학에서 말하는 행복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먼저 코헬렛 3장 10절에 나오는 성서 구절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나는 인간의 아들들이 고생하도록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일을 보았다. 그분께서는 모든 것을 제때에 아름답도록 만드셨다. 또한 그들 마음속에 시간 의식도 심어주셨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시작에서 종말까지 하시는 일을 인간은 깨닫지 못한다. 인간에게는 살아있는 동안 즐기며 행복을 마련하는 것밖에는 좋은 것이 없음을 나는 알았다. 모든 인간이 자기의 온갖 노고로 먹고 마시며 행복을 느끼는 것. 그것이 하느님의 선물이다. 나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이 영원히 지속됨을 알았다. 거기에 더 보탤 것도 없고 거기에서 더 뺄 것도 없다. 하느님께서 그렇게 하시니 그분을 경외할 수밖에, 있는 것은 이미 있었고 있을 것도 이미 있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사라진 것을 찾아내신다.”(코헬 3,11-15)

 

하느님은 영원하시지만 인간은 유한하고 하느님은 모든 것을 다 주관하시지만 우리는 우리 눈앞에 있는 것도 잘 모르고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이 하느님과 함께 하는 튼튼한 기반 하에서, 행복의 길이 무엇인지 한번 생각을 해보려고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우리의 삶에서 어떤 삶의 모습을 가지고 사는지, 그리고 삶의 완성은 어디서 오는가를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지금은 대학에서 철학을 전문 학술 분야로 생각하지만, 고대 철학자들은 철학을 삶의 기예(art of living)라고 했습니다. 20세기 중반 이후 윤리학을 한마디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부흥이라고 합니다. 현대 도시인들에게 일과 자신의 삶에 여가를 조화시키는 일종의 비즈니스 에틱(etic)이라는 철학 이념은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현대적으로 응용한 거라고 보시면 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가 가지고 있는 모습은 바로 좋은 삶이고 다양하면서도 너무 이상적이지 않은데 이것이 플라톤 철학과는 다른 면입니다. 플라톤 철학은 이상주의가 강해서 플라톤의 철학대로 살려고 하면 정말 성인이 되거나 아니면 학자가 되거나 해야 할 것 같은데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냥 내 생업에 최선을 다하고 사회에서 나름대로 인정을 받고 또 가정도 잘 꾸리고, 또한 공적 기여도 열심히 하는 가운데 재미와 흥미를 찾아가는 삶에 아주 적합하며 건전한 철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행복에 대해서 논의한 책을 니코마코스 윤리학이라 합니다. 동양에서 가장 중요한 책이 논어, 맹자라고 한다면 서양에서 가장 중요한 책은 플라톤의 국가론과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이 책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사람들에게 ‘행복이 뭐냐?’고 물어봅니다. 처음부터 답을 준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말하는지, 즉, 토론을 해보자라는 거죠. 그때도 건강, 부유함 그리고 쾌락 그리고 명예, 안전, 편안함 등 현대의 우리의 생각과 거의 비슷한 의견이 나옵니다. 돈이 없으면 행복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지만 돈만 있으면 행복한 것 또한 아닙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을 eudaimonia라고 정의하는데 eu는 영어로 well과 같은 의미로 좋음이라는 것 또는 뭔가 잘 되어가는 것을 뜻합니다. 제가 보기에 아리스토텔레스가 얘기하는 행복에 가장 어울리는 이미지는 막 피어나는 꽃의 느낌, 그게 바로 행복의 da(본질)임을 알 수 있습니다. 꽃이 그렇게 피어나기 위해서는 물도 주고 비료도 주어야 하겠습니다. 행복이란 그렇게 피어나는 것이지, 뭔가 피어날 수 있다는 가능성만 있어서는 행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eudaimonia에서 daimonia라는 말은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데 인간이 가지고 있는 좋은 가능성을 가능한 잘 실현시키는 것이 행복이라는 뜻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좋은 가능성을 실현하지 못하게 하는 것, 예를 들어 나쁜 습관, 부실한 건강을 개선하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게 행복하기 위한 길이라는 것이고 내가 가지고 있는 아주 고귀하고 수준 높고 뭔가 가치 있는 가능성을 실현하는 것이 좋은 삶이라는 것입니다. 잘 먹고 잘살고, 편안하고, 걱정 없는 것들을 떠올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아리스토텔레스가 권하는 것처럼 어떻게 하면 내 삶이 좀 더 격조 높은 삶이 될 수 있을까? 좀 더 품위 있는 삶이 될 수 있을까? 조금 더 의미 있는 삶이 될 수 있을까? 이런 쪽으로 생각해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를 아리스토텔레스는 오이프락시아라고 정의를 합니다. 프락시스는 우리 삶에 있어서 여러 가지 행동들을 얘기합니다. 그 행동들이 모아진 총체를 프락시스라고 합니다. 직장에서 내가 하는 일, 퇴근해서 집에서 하는 일, 시민으로서 투표를 하는 일, 또 지역사회에 기여하는 일 이런 것들을 묶여서 프락시스라고 얘기합니다. 전반적으로 바라봤을 때 그게 좋은 거면 그게 바로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이 나에게도 만족스럽고 내 삶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에도 저 삶은 존중할만한 삶이라고 한다면 이미 우리는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오이프락시아 곧 좋은 삶의 실천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이런 오이프락시아를 위해 덕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덕을 그리스어로 아네떼라고 하는데 이 말은 좋다(good)는 뜻의 아가톤에서 나왔습니다. 뭔가 잘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고대철학에서는 덕을 표현할 때 excellence라는 말을 씁니다. 뭔가를 탁월하게 해내는 게 덕인데 무엇보다도 한 인간으로서의 탁월함을 말합니다. 현대의 경제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설득력을 갖는 이유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덕이 도덕성과 유능함을 합쳐진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도덕성 없는 유능함도 아니고 유능함이 없는 도덕성도 아닌 것이죠. 자신의 주어진 여건에서 가능한 한 자신의 삶을 잘 이끌어가는 것이 행복의 굉장히 중요한 요소라는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가 행복할 수 있기 위해 지혜로워야 한다고 합니다. 그걸 라틴어로 프로네시아라고 이야기 하는데 현명함 또는 실천적 지혜와 윤리적 판단이 다 포함된 개념입니다. 사람이 덕을 갖게 되면 그 선택은 자연스럽게 자신과 타인을 위한 최선의 것을 선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혜롭고 현명한 사람의 특징이고, 그러한 삶을 살 때 그 사람이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무조건 이타주의만 얘기하는 것이 플라톤 철학이라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상당히 현실주의적이어서 지금 내가 당장 갖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 내 욕망이 말하는 것을 얻는 게 행복이 아니라 내 삶을 균형 있고 훌륭한 실천을 하는 사람으로 이끌어가야 된다는 깨달음이 있어야 된다는 거죠. 이거를 프로네시스라고 말합니다. 인생을 놓고 봤을 때 장기적으로 중요한 일을 잃지 않는 것과 혼란에 빠지지 않도록 스스로 생각해볼 시간이 필요합니다. 여가를 영어로 leisure라 하는데 여가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가 열심히 일하기 위해서 쉬는 게 아니라 사실은 여가를 갖기 위해서 일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여가가 있을 때 이런 실천이 가능하다는 이야기입니다.

 

휴식은 일을 하기 위해서 몸을 잠깐 회복하는 것입니다. 휴식은 그야말로 노동에 종속된 개념입니다. 우리가 일요일이라고 얘기하는 것과 주일이라고 얘기하는 건 굉장히 큰 차이가 있습니다. 주일은 매 주일의 시작이지만 일요일은 한 주간의 끝을 의미합니다. 그냥 일하기 위해서 잠시 몸을 회복하는 것으로만 여가를 누린다면 그건 진정한 여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여흥이 있는데 현대인들이 많이 빠져있는 함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여흥은 아이들이 하는 거와 비슷해서 잠깐씩은 필요하지만 여기에만 빠져 있으면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덕스러운 품성을 망치게 된다고 합니다. 또 현대는 한가함이 중요하지만 고대 로마 때 키케로나 세네카 등 현인들은 한가함이라는 거는 꼭 인간에게 좋은 것만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진정한 여가에 해당되는 단어로 아름다운 단어인 오티움이라는 단어를 씁니다. 이 오티움은 사람을 조금 더 좋은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그러한 시간과 활동을 의미 합니다. 오티움의 반대말이 잘 아시는 네고시에이션(negotiation)입니다. 오티움이 없다는 거죠. 분주하게 움직이는 것, 뭔가 계속 쉬지 못하고 온갖 일을 꾸며야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오티움은 그 자리에서 조용히 머물면서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는 본질적인 일에 집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관조라는 의미의 테오리아가 있습니다. 진정한 여가는 관조로 충만한 여가이고, 관조하기 위해서는 여가가 자유로운 시간이 필요하다고 얘기합니다. 고대사회에서 생각한 관조와 자유, 고대사회에서 생각한 나 자신의 온전한 모습이 현대와는 차이점이 좀 있습니다. 고대사회에서는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와 팔레스 때부터 내려온 전통인데 행복한 삶, 관조적 삶을 가진 사람의 특징은 별을 볼 줄 아는 사람이라는 얘기가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7현 중의 1명인 팔레스는 별을 바라보는 관조적 삶의 중요성을 상징하는 인물입니다. 우리가 일상에 주어진 일들을 다 훌륭하게 해내고, 그것들을 통해서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 경제적인 기반과 사회의 인정을 받으며 살지만 과연 그러한 것만 있으면 행복한 것인가? 거기서부터 한발 더 나아가서 별을 바라보면서 경외감을 느끼고, 또 아름다운 예술 작품을 체험하며, 종교생활을 통해서 뭔가 초월적인 그러한 존재에 대한 내면에 경심의 마음 없이 그 삶이 온전한 삶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제 이러한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여가는 일에 끼어들어 관여하는 사람의 태도가 아니라 자신을 열어두는 사람의 태도입니다. 그것은 움켜쥐는 사람의 태도가 아니라 놓아주는 사람, 자신을 놓아주고 내맡기는 사람의 태도입니다. 여가를 향유할 줄 아는 사람은 좀 너그럽게 다른 사람의 이익이 나와 다르게 생각하는 소리를 들을 수가 있습니다. 독일의 히틀러 시대를 보면 당시 수많은 교양 있는 사람, 놀라운 지식을 가진 사람이 많았는데 어떻게 히틀러 같은 사람이 나왔을까요? 그 당시 사람들이 교양이 많고 지식이 많았지만 어떤 상황에 대해서 자신의 고유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능력들이 약해서 그냥 이끌어지는 대로 갔다는 것입니다. 여가가 있는 사람은 사유를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지식이 아니라 내가 정말 이럴까? 하고 곰곰이 그걸 따져볼 수 있다는 거죠. 그걸 비판적으로, 그리고 뭔가 반성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로마시대 청렴한 정치가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는 “사람은 그가 아무것도 행하지 않을 때보다 더 활동적인 적이 없으며, 그가 혼자 있을 때보다 더 외롭지 않은 적도 없다.”고 했습니다. 혼자 있으며 자유롭고 풍요로운 시간에서 나오는 결정들은 그 사람의 행동을 더 올바르게 하고 더 좋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여가는 우리로 하여금 더 좋은 행동을 할 수 있고 더 좋은 삶을 살 수 있는 사유의 기회를 주며, 여가와 함께 삶의 균형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일에만 몰두하는 사람의 특징은 놀 때도 너무 격렬하게 노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그걸 탐닉이라고 합니다. 고대 철학자 에피큐로스는 “우리가 무엇을 먹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누구와 먹느냐가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친한 친구들과 함께 하는 기분 좋은, 그리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함께 나누는 그 식탁 자리는 음식이 소박해도 굉장히 훌륭한 자리지만, 불편한 사람과 함께 하면 미슐렝 몇 개가 붙어 있다 한들 훌륭한 식사라고 보기 어려운 것입니다. 무엇인가를 소비하거나 탐닉하는 게 아니라 향유하기 위해서 여가가 필요합니다. 시간을 충분히 가지고 또 이것이 갖는 내 일상에서의 일들의 의미를 생각해보는 게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가를 통한 미적 체험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특히 예술이 인간에게 주는 그 유용함이 굉장히 큽니다. 기본적으로 고대인들, 혹은 예전에 비해서 현대인들에게 주어진 가장 큰 축복은 문화 예술을 즐길 수 있는 기회가 많이 늘어났다는 것입니다. 고상한 아름다움이 우리에게 주는 즐거움을 알면 그것이 우리의 삶에 굉장히 큰 플러스가 된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 여가는 사람을 개방하게 합니다. 인간의 유한함을 넘어서는 경이감을 가진 사람은 결국은 초월적인 것을 갈망하게 되는데, 이러한 갈망은 인간의 종교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런 것이 없다 하더라도 어려서부터 받은 신앙 교육에 따라서 정말 습관처럼 매주 의무를 하듯 신앙생활을 할 수도 있지만 참 기쁨을 느끼며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 여가에 나오는 그 정신처럼 자기를 개방하는 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뭔가 아름다운 것, 숭고한 것 그리고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것에 자신의 마음을 여는 것은 바로 여가에서부터 오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일단 쓸모가 있는지, 도움이 되는지와 같은 유용성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사람을 대할 때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여가를 즐길 줄 아는 사람은 무용한 것이 가지고 있는 가치를 알아차립니다. 그리고 다른 무엇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 목적이 있다는 것을, 즉 저 사람이 쓸모가 있어서 우정을 갖는 것이 아니라 우정 자체가 목적인 것입니다.

 

요셉피퍼라는 분이 쓰신 책에 보면 여가의 근원은 결국은 하느님을 향한 경신의 마음, 즉 주인을 온전하게 따른다는 것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가치 있는 걸 생각하는 데 본질이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신학에서는 아낌없이 쉬고 아낌없이 하느님께 나를 개방한다면 자유롭게 포기하는 그러한 삶을 통해서 훨씬 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고 말씀드릴 수가 있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성서 구절 하나 좀 읽어드리려고 합니다. 여가는 쉼이기도 하지만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행복한 삶을 위한 여가는 사실 실천과 함께 다른 방식으로 나를 도야하는 시간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실천이 열심히 뛰면서 내가 좀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이라면 여가는 자기 안에 머물면서 내가 좀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세네카가 남긴 잠들기 전에 자신에게 물어보는 아름다운 질문입니다. ‘어제보다 눈곱만큼이나 더 나은 사람이었는가?’ 우리가 죽을 때까지 조금이나마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한 하루하루가 인생인 것이지, 그것에서 벗어났을 때는 결국은 인생에 있어서 삶이 어그러지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 11절에 굉장히 아름다운 구절입니다.

 

“모든 훈육이 당장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것으로 훈련된 이들에게 평화와 의로움의 열매를 가져다줍니다. 그러므로 맥 풀린 손과 힘까진 무릎을 바로 세워 바른 길을 달려가십시오. 그리하여 절름거리는 다리가 접질리지 않고 오히려 낫게 하십시요.”(히브 12,11-13)

 

훌륭한 일을 하며, 그리고 사회에 기여하면서 그리고 내 몸만 챙기는 것이 아니라 사회와 또 타인들을 위해 살아가는 삶은 숭고한 삶입니다. 이런 숭고한 삶을 지치지 않도록 하는 게 건전한 여가라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훌륭한 여가의 삶은 주님과 함께 만나는 시간이라는 것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2022년 8월 23일, 명동 로얄호텔 그랜드볼룸)

 

[평화가 넘치는 샘물, Autumn 2022 Vol. 32, 최대환 세례자요한 신부(대신학교 교수)]



252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