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0일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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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ㅣ순교자ㅣ성지

[성인] 정하상 성인의 교회활동 시작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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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3-25 ㅣ No.1453

[특별 연재] 이 시대, 순교신심에서 길을 찾다


정하상 성인의 교회활동 시작 이야기



삶의 푯대를 상실한 현대인들은 인문학, 심리학, 과학의 문을 서성이며 길을 찾고 있다. 여기, 한평생 순교신심을 연구해온 손골성지 윤민구 신부는 신앙의 유산이 담긴 순교신심에서 삶의 방향키를 찾아 우리에게 들려준다. 올해는 103위 성인이 탄생한지 30주년이 되는 해이다. 성인들의 삶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규범이 되고 기준이 된다.


정하상(丁夏祥, 바오로, 1795-1839) 성인은 103위 우리나라 성인 중 평신도 대표이다. 정하상 성인의 활약상을 이 좁은 지면에 한 번에 다 담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여러 번 나누어서 소개할 것인데 우선 정하상 성인이 교회활동을 시작한 이야기를 하려 한다.

정하상 성인은 언제부터 교회활동을 하였을까? 누가 정하상 성인을 교회 지도자로 뽑았을까? 여기에 대해 《기해일기》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기해일기》는 1839년에 있었던 기해박해의 순교자들에 대해 그들의 순교를 목격한 현석문(玄錫文, 가를로, 1799-1846) 성인 등이 기록한 책이라 할 수 있다.

또 크게 불편한 사정이 있는 고로 할일없이 그 모친과 누이를 이별하고, 두어 교우를 따라 나오니, 이 때 나이 20이라. 가난한 교우의 집에 와 숨어 있음에, 그 사이 헐벗고, 주리고 간고(艱苦)한 형상은 다 기록할 길이 없으되, 주야로 기구하기를 오직 동국(東國)에 신부가 임하여 교화가 연성(連盛)하기를 위하더라(42쪽).

여기에 제시된 첫 문장의 주어는 정하상 성인이 아니고 교회이다. 그러니까 정하상 성인에게 어떤 불편한 사정이 생겼다는 것이 아니라 당시 교회에 크게 불편한 사정이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이것은 이후에 전개되는 이야기로 보아 충분히 알 수 있다. 정하상 성인이 어쩔 수 없이 집을 떠나서 한 일은 가난한 교우집에 숨어 살며 우리나라에 신부 모셔오는 일이었다. 이런 내용을 볼 때 ‘사정이 생긴 것은’ 신부 모셔오는 일과 관련이 있다. 여기에서 ‘할일없이’는 ‘하릴없이’라는 말이고 그것은 ‘어쩔 수 없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정하상 성인이 인간적으로는 어머니와 동생을 남겨두고 떠날 수가 없었지만 ‘교회 사정이 크게 어려우니’ 어쩔 수 없이 집을 떠났다는 것이다. 그렇게 정하상 성인은 20세 때 찾아온 2~3명의 교우들을 따라 서울로 올라가 교회활동을 시작하였던 것이다.

정하상 성인은 1795년에 태어났으니 20세 때라면 1814년의 일이다. 그렇다면 1814년에 교회에 무슨 사정이 있었는가? 1801년에 있었던 신유박해 때 붙잡히지 않고 용케 살아남은 천주교 신자들은 산골로 숨어들기도 하고, 고향을 떠나 다른 곳으로 이주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하지 못한 교우들은 살던 곳에서 마음을 감추며 생활하고 있었다. 그렇게 10년이 흘렀다. 그동안 숨죽여 살던 조선 천주교 신자들은 1811년에 북경의 주교와 교황에게 각각 한 통씩의 편지를 보냈다. 1811년이 신미년(辛未年)이라 이 편지들을 “신미년 편지”라고도 하고, 비단에 썼다 하여 “신미년 백서(帛書)”라고도 한다. 이 편지에서 조선신자들은 당시의 교회 상황과 신유박해 때의 순교자에 대해 자세하게 보고하였다. 그러면서 조선신자들은 성직자가 없어 성사를 받을 수 없고, 신자생활을 제대로 하기 힘들다고 호소하면서 하루빨리 성직자를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다.

1811년에 동지사(冬至使)를 따라 편지를 들고 북경에 간 사람은 이여진(요한, ?-1830)이었다. 그러나 조선신자들의 간절한 바람과는 달리 이여진은 북경에서 주교를 만날 수가 없었다. 당시 북경주교가 북경에 있지 않았던 것이다. 조선교회를 책임맡아 신유박해 이전까지 조선교회가 파견한 밀사들을 만나며 도와주었던 구베아(Alexander de Gouvea, 湯士選, 1751-1808) 북경주교는 1808년 세상을 떠났고 그 후임으로 수자 사라이바(Joaquim Souza de Saraiva, ?-1818) 주교가 북경 교구장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중국 정부로부터 입국허가를 받지 못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중국 대륙에 발을 들여놓지도 못하였다.

결국 이여진은 북경주교 대신 총대리였던 리베이로 누네스(J. Ribeiro-Nunes,1767-1826) 신부를 만나 조선교회의 사정을 이야기하였다. 그리고 선교사를 속히 파견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이여진은 1812년 봄 돌아왔다.

조선신자들은 1811년 북경에 가서 선교사를 즉시 영입하지는 못하였지만 1812년 말까지는 어떤 기별이 오기를 기다렸던 것 같다. 하지만 특별한 소식이 없어서 1813년에 또다시 밀사를 북경에 보내기로 하였다. 이때도 이여진이 밀사였던 것 같다. 이여진은 조선신자들이 ‘아오스딩’ 명의로 북경주교에게 보내는 편지를 가지고 갔다. 이 편지에서 조선신자들은 또다시 성직자를 한 분이라도 보내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나 성직자 파견 요청은 역시 성공하지 못하였다.

1813년 북경에 간 사람이 별다른 성과 없이 1814년 봄에 돌아오자 당시 조선신자 대표들은 실망하여 각각 지방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니까 정하상이 20세 때 교회에 생긴 사정이란 바로 이런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신자들은 성직자를 모셔오는 일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젊은이를 찾게 되었다. 그리고 정약종(丁若鍾, 아우구스티노, 1760-1801) 순교자의 아들 정하상에게 눈을 돌려 정하상을 찾아왔던 것이다. 앞의 《기해일기》에 정하상이 ‘두어 교우들을 따라 나왔다’고 되어있는데 이 말은 정하상 성인이 스스로 교회 지도자가 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정하상 성인에게 부탁하며 지도자로 추대하였다는 것을 밝혀준다. 먼저 하던 사람들이 포기하니까 신자들이 정하상을 찾아와 이 일을 부탁하였던 것 같다.

이렇게 해서 조선교회의 앞날을 어깨에 짊어지고 펼친 정하상 성인의 활약상을 《기해일기》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이러므로 비천함을 사양치 아니하고 노예의 본분을 즐겨 당하여 역관(譯官)을 따라 북경 내왕(來往)을 팔구차를 하니라. 주당(主堂)에 들어가 성사를 받고 주교 전에 동국을 가련히 여기사 목자를 보내시기를 간구하니...(42쪽)

정하상은 양반이었지만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낮고 천한 신분의 사람이나 하는 역관의 종이 되어 북경을 갔다는 것이다. 그것도 한 두 번이 아니라 8-9차례나 갔으며 성당에 가서는 성사를 받았을 뿐 아니라 우리나라에 선교사를 보내주십사고 북경의 주교에게 청하였다는 것이다. 정하상 성인의 성직자 영입 노력은 20년이 지난 1834년에 가서야 첫 결실을 얻었다. 중국인 여항덕(余恒德, 조선에서의 이름은 유방제(劉方濟), 파치피코, 1795-1854) 신부가 입국한 것이다.

어떤 이들은 당시 20세였던 정하상 성인이 과연 지도자가 될만한 자격을 갖추었을까 의문을 갖기도 한다. 《기해일기》는 정하상 성인의 동생 정정혜(丁情惠, 엘리사벳, 1797-1839) 성녀가 어머니 유조이(柳召史, 체칠리아, 1761-1839) 성녀에게서 경문을 배웠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니까 유체칠리아 성녀는 남편 정약종 순교자가 순교한 후 정하상과 정정혜 두 어린 자녀들에게 신앙교육을 철저히 하였던 것이다.

어머니로부터 신앙을 배운 정하상 성인은 교회를 위해 활동하기에 앞서 신유박해로 함경도 무산(茂山)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던 조동섬(趙東暹, 유스티노, 1739-1830)을 찾아간 적이 있다. 조동섬은 유체칠리아의 외가쪽 친척이다. 그리고 그는 교회활동 중에 정약종과도 접촉이 있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따라서 유 체칠리아로서는 아들 정하상을 조동섬에게 보내 학문도 익히고 교리 공부도 더 체계적으로 하고 아버지에 대해 알게 하는 것이 유익하리라 판단하였을 것이다.

“이 영예는 어느 누구도 스스로 얻는 것이 아니라 아론과 같이 하느님에게서 부르심을 받아 얻는 것입니다”(히브 5,4). 정하상 성인은 나이는 많지 않았지만 배움과 훈련을 통하여 이미 잘 준비된 지도자였다. 하느님은 좋은 가정에서 잘 준비된 정하상을 선택하여 조선교회의 일꾼으로 삼으신 것이다.

* 윤민구 도미니코 신부 - 1975년 가톨릭대학교를 졸업하고 사제로 서품되었다. 이탈리아 로마에 유학하여 1983년 라떼란대학교에서 사목신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2003년까지 수원가톨릭대학교에서 강의하였다.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사무차장으로 일하였고 안성 대천동, 성남 수진동, 이천, 분당 야탑동성당 주임신부를 지낸 후 현재 손골성지 전담신부를 맡고 있다.

[외침, 2014년 2월호(수원교구 복음화국 발행), 윤민구 도미니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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