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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 순교 영성 강학1: 칠극 입문 - 한역서학서와 조선 천주교 수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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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3-16 ㅣ No.1444

[시복시성추진위 ‘순교 영성 강학’ 지상중계] (1) 칠극 입문 : 한역서학서와 조선 천주교 수용


교리서 보급, 초기교회 성장에 큰 힘



교구 시복시성추진위원회(위원장 김상순 신부)는 3일 ‘순교 영성 강학’을 시작했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는 신자들의 순교신심 함양을 위해 ‘순교 영성 강학’을 지상중계한다. 이번 순교영성강학은 ‘칠극과 천주실의’를 주제로 진행된다.

한국 천주교 전래는 선교사가 아니라 학자들이 학문을 통해 자생적으로 받아들인 세계사에서 유례가 없는 사건이다. 이후 한국교회는 1925년 79위 시복식, 1968년 24위 시복식, 1984년 103위 성인 탄생, 그리고 30년 뒤인 2014년 124위 복자 탄생의 기쁨을 누리고 있다.

18세기 서학에 관심을 갖는 것은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 유행이었다. 천주교 서적은 유교 사상만을 중시해온 조선학자들에게 매우 충격적이었다. 조선은 엄격한 신분사회였으므로, 천주님을 닮은 인간은 모두 존귀하며 평등하다는 사상과 함께 세상이 천주님에 의해 창조됐다는 사실에 당시 사람들은 놀라워했다.

학문 중심에서 신앙으로의 성장은 광암 이벽을 중심으로 한 젊은 선비들에게서 시작됐다. 이벽이 이끈 강학회는 유교와 천주교에 관한 학문을 읽고 토론하면서 기도했던 곳이다. 그래서 다블뤼 주교는 조선천주교의 창립자를 이벽으로 간주했다.

그들은 북경에서 가져온 과학, 산수, 종교에 관해 예수회 신부들이 지은 책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 중에는 천주의 섭리와 영혼이 없어지지 않음을 가르치는 「천주실의」, 「성리진전」, 「칠극」 등 유명한 교리서도 있었다. 학문으로 천주교를 연구하던 이벽은 당시 중국 왕래가 비교적 쉬웠던 서장관의 아들 이승훈을 북경에 파견했다.

1784년 세례를 받은 이승훈은 선교사들로부터 얻은 서양의 각종 기기와 천주교 서적, 그리고 십지가상, 성화, 묵주 등을 가지고 그 해 3월 말 귀국을 했다. 그가 가져온 천주교 서적들은 초기 신자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는 이벽을 중심으로 세례를 줘 마침내 1784년 명례방 신앙공동체를 탄생시켰다.

1785년 명례방 김범우의 집에서 전례를 집전하다가 적발돼 최초로 박해를 입는 사건이 일어났다. 을사추조적발사건을 계기로 천주교 수용 계층이 양반에서 평민을 중심으로 변화돼간다.

박해로 주춤했지만 1786~1788년 평신도 중심의 임시 준성사 집행제도가 도입되면서 한국 천주교는 점차 활성화 되었다. 소위 가성직제도는 신품 성사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볼 수 있지만 결국 이를 계기로 1795년 주문모 신부가 최초로 조선에 입국, 조선교회는 체계적으로 발전한다.

주문모 신부는 사목활동의 중점을 교리교육에 두고 사제 직무를 수행하는 동시에 한문으로 된 천주교 서적을 한글로 번역하거나 저술했다. 교리서는 서로 빌려보거나 필사돼 여러 신자들에게 보급됐고 부녀자나 하층민들이 널리 익혀 교리공부에 많은 도움이 됐다.

박해시대 신앙생활의 바탕이 된 것은 교회 서적이었다. 신자들은 교회서적을 신앙의 상징으로 중히 여겨 자신들의 목숨보다 더 아꼈고, 고문 앞에서도 책이 있는 곳을 알리지 않고 순교를 택할 정도였다.

1857년 베르뇌 주교가 파리외방전교회에 보낸 서한을 보면 선교사가 부족해 책으로 밖에 가르칠 수밖에 없는데 책이 없다고 하소연을 한다. 당시 다블뤼 신부, 프티니콜라 신부는 사전류 편찬을, 최양업 신부는 기도서 번역을 마쳐가는 중이었다. 1861년 드디어 서울에 인쇄소가 설립돼 「성교일과」, 「천주성교공과」, 「주교요지」 등 많은 교회서적이 간행됐다.

조선천주교 설립 당시 많은 학자들에게 읽혀졌던 한역서학서들, 특히 「천주실의」와 「칠극」은 학문을 신앙으로 전환하는 계기를 마련했고, 천주교를 뿌리내리는 데 큰 영향을 줬다. 박해시기 성직자가 부족한 상황에서 한글 기도서와 신심서들은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도왔고, 이러한 신앙심은 순교로 이어졌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15년 3월 15일, 
김귀분 수녀(한국순교복자수녀회 수원관구), 정리 이승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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