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8일 (일)
(백) 부활 제5주일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종교철학ㅣ사상

과학칼럼: 과학, 철학 그리고 신앙의 말[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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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01-01 ㅣ No.473

[과학칼럼] 과학, 철학 그리고 신앙의 말[言]

 

 

얼마 전 책을 읽다가 재밌는 글귀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종교는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며,

철학은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며,

과학은 말할 수 있는 것만 말하는 것입니다.

(조정래, 『황홀한 글감옥』, 36쪽)

 

저자의 의도를 온전히 파악할 수는 없겠지만, 제가 받아들인 뜻은 이러합니다. 과학은 엄격하고 명확한 범위와 방법론 안에서 자신이 풀어낼 수 있는 것만 말하며, 철학은 우리가 상식적으로 다 알고 있는 것들을 굳이 끄집어내어 어렵게 말하는 것이고, 종교는 인간의 언어를 뛰어넘는 일종의 신비의 영역으로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무엇이다.

 

나름대로 종교, 철학, 과학의 특징을 단순화해서 절묘하게 표현한 이 말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종교와 철학, 과학에 대해 갖고 있는 피상적 ‘이해’와 ‘오해’를 드러내는 듯합니다. 확실히 과학, 특히 자연과학은 말할 수 있는 것들을 엄격하게 제한하고 철저히 그 안에서만 움직이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러한 엄격함과 명확함, 단순함은 한편으로 오늘날 자연과학의 눈부신 성공을 견인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과학의 시야를 대단히 좁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때로 어떤 이들은 과학의 이름으로, 그 강력하지만 제한된 도구를 이용하여 과학이 말할 수 없고 말해서도 안 되는 것까지 말하려 합니다.

 

철학은 우리가 상식적으로 당연하게, 별다른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것들을 애써 끄집어내어 질문하고 고민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철학이 현실과 떨어진 고담준론으로 보이기도 하고 무의미한 말장난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적인 생각이나 경험, ‘상식’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닙니다. 철학은 우리로 하여금 일상의 모든 것들을 다른 방식으로, 좀 더 깊은 눈으로 바라보게 하며, 그리하여 일상 저 너머에 있는 그 무엇에로 우리를 인도하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철학의 말(言)은 필요 없는 말이 아니며, 오히려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데 반드시 필요한 말(言)입니다.

 

종교는 초월적인 것, 저 너머의 세상을 다룬다는 점에서 인간의 말을 무한히 뛰어넘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말(言)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람이 되신 말씀을 믿는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감히 말로 담을 수 없는 분으로 우리의 언어를 무한히 초월해 계시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분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말로 끊임없이 우리에게 말씀을 건네 오셨습니다. 심지어는 그분의 말씀이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되시어, 하느님께서 누구이신지 남김 없이 들려주시고 보여주셨습니다. 바로 이분, 곧 사람이 되신 말씀 덕분에 우리는 감히 하느님에 대해 말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일 년 동안 매달 한 번씩 이어질 열두 번의 연재를 통해 저는 신앙과 과학에 대해 말하고자 합니다. 진리를 향한 열망에서, 혹은 진리 그 자체에서 탄생하여 자라난 이 둘이 어떤 점에서 비슷하며 또 어떤 면에서 다른지 말해 보고자 합니다. 또한 그 과정에서 철학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왜냐하면 철학이야말로 온전하게, 그리고 어떤 점에서는 유일하게 신앙과 과학을 이어주는 다리이기 때문입니다.

 

이 쉽지 않은, 그러나 우리 시대에 꼭 필요한 말(言)의 여정을 조심스럽게 시작합니다.

 

[2023년 1월 1일(가해)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세계 평화의 날) 서울주보 5면, 조동원 안토니오 신부(가톨릭대학교성신교정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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