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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ㅣ복음화

선교와 문화: 종교 간의 대화, 정말 가능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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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9-17 ㅣ No.377

[선교와 문화] 종교 간의 대화, 정말 가능한 것인가?

 

 

어느 대학에서 주최한 국제 세미나에서 논문을 발표한 적이 있다. 주제는 종교 간의 대화였다. 각기 다른 종교의 대표자들이 나와서 입장을 발표하고 토론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발표는 주제에 맞추려는 노력이 엿보이기도 했지만 모두 자신의 종교에 대한 선교 전략과 호교론적인 입장을 고수하였다. 종교 간의 대화가 필요하다는 당위성을 말했지만 대화를 위해서 양보하고 타 종교의 신발을 신어 보려는 노력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종교 간의 대화 역시 넓게는 선교 전략 안에서 다루어지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었다. 

 

마지막 부분에서는 각 발표자들과 함께하는 토론의 장이 열렸다. 그러나 토론을 하는 중에 다툼이 있었다. 먼저 기독교 측에서 불교의 신관에 대한 이의 제기를 하면서 스님의 화를 돋우어 놓았다. 토론은 점차 격렬해지다가 급기야 삿대질까지 벌어졌고 결국 국제적 망신을 당하면서 종교 간의 대화 세미나는 끝이 났다. 그때 느낀 것이 종교 간의 대화가 쉬운 일은 아니라는 것. 말은 종교 간의 대화라 하지만 그 속에는 각자 자신의 종교를 우선시하는 우월주의가 숨어 있고 거기서 파생되는 배타주의가 어느 정도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모든 종교는 저마다 각기 자신의 선교 전략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종교 간의 대화에는 원칙이 있어야 하고 또 한계성도 있음을 인정하고 출발해야 한다. 

 

부부 간에 서로 다른 종교를 믿는 경우 부딪히는 현실적인 문제를 푸는 방법을 통해 종교 간의 대화를 이해할 수 있다. 

 

첫째, 상대방을 인격적으로 존중해야 한다. 부부라고 해서 상대방에게 일방적으로 종교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 부부가 상대의 인격과 존재의 가치를 인정하고 수용할 수 있어야 가정이 평화로워지듯이 종교 간의 대화는 타자에 대한 존중과 긍정에서 출발해야 한다. 

 

둘째, 각자의 개성 속에서 공동선, 공통분모를 찾아야 한다. 부부는 각자의 종교를 통해 자아를 실현할 수 있지만 가정에 돌아와서는 가족이 지니는 존재와 삶의 방식에서 공통점을 찾고 실현해 나가야 한다. 자신의 종교가 지향하는 종교적 진리, 가치, 이상을 가정 안에서 강요하거나 배우자의 종교를 폄하해서는 가정의 평화를 지킬 수 없다. 제사 문제로 명절 때마다 갈등을 겪고 불화가 끊이지 않는다면 그 종교적 행위는 근본을 훼손하고 있는 것이다. 종교 간의 대화에서도 공존과 평화를 위해 공통분모를 찾아내지 않으면 세상은 언제나 평행선 속에서 긴장과 대립을 겪게 될 것이다. 

 

셋째, 자녀의 종교 선택 문제이다. 부모의 종교가 다를 때 자녀의 종교를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 양쪽 모두 평행선일 경우 자녀가 성인이 될 때까지 기다려 자녀의 자유로운 의사 결정을 통해 종교를 선택하도록 성숙한 자세로 기다리는 게 좋다. 타 종교와의 대화에서 결국 선교의 문제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데 아전인수식의 태도나, 비방, 모략 등의 선교 전략은 세상을 평화로 이끌 수 없다. 타 종교와의 선의의 경쟁은 서로 존중되고 인정되어야 하지만 결국 자유로운 의사 결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선교를 전략적이고 공격적으로만 이해한다면 종교 간의 대화는 불가능하다. 원론적인 측면 같지만 이것이 종교 간의 대화에서 지켜야 할 원칙이고, 실현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 시대의 종교적 스승이었던 김수환 추기경과 법정 스님의 친분 관계에서 종교 간 대화의 원칙과 실제를 읽어낼 수 있다. 우선 두 사람은 각기 자신이 속한 종교적 가치와 삶의 방식에 충실하였지만 깊은 우정을 나누고 인류애라는 공동선을 지향하였다. 불교에서 말하는 자비와 그리스도교의 사랑이라는 가치가 충돌하지 않는 것처럼, 두 사람은 서로 존중하며 공존하고 평화를 견지하는 데에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한 대화와 존중의 길에서 서로는 더욱 풍요로워질 수 있었다. 석탄일에는 성당에서 부처님의 탄생을 경축하고, 성탄절에는 절에서 예수님의 탄생을 경축하는 현수막을 서로 내걸었다. 길상사 개사식 때는 법정스님이 김수환 추기경과 함께 축사를 했다. 

 

길상사의 관음상은 종교적 심성을 아름답게 표현한 작품이다. 절제된 여인의 미를 승화시켜 경건하고 단아한 한국적 아름다움이 우러나오는 석조각상이다. 그런데 절에 세워진 관음상을 조용히 보고 있노라면 성모상을 닮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지난 1999년 법정스님이 천주교 신자인 동갑내기 최종태 전 서울대 교수에게 의뢰해서 길상사 마당에 만든 것이다. 법정스님이 종교간 화합을 위해 천주교 조각가에게 부탁을 하였던 것이다. 종교계를 포함해서 세상에는 이런 저런 경계와 벽이 있지만 위 두 분에겐 종교 간 갈등과 편견이 존재하지 않았으니 진정한 종교 간 대화를 실천하신 모범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가톨릭교회에서 먼저 손을 내밀며 사용한 ‘종교 간의 대화’ 문제가 타 종교인들에게도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다. 많은 신학자들도 이러한 주제 아래 논문을 발표하였고 세미나도 적지 않게 열렸다. 그러나 본인 역시 타종교와의 대화에 대한 글을 쓰고 세미나에 참석하면서 현장에서 느낀 바는 종교 간의 대화라는 단어가 지니는 한계를 인정하며 그 안에서 이론과 실제를 구분하여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종교는 폭넓게 문화라는 영역에 편입될 수 있다. 문화는 유기체이기에 생로병사 현상을 지니고 있으며 각 종교마다 지니는 감성 지수 역시 다르다. 어떤 종교는 타 종교 문화에 대해 비교적 포용력을 지니고 있는 반면(inclusivism) 어떤 종교는 매우 배타적인(exclusivism) 경우도 있다. 그러나 모든 종교가 지니는 한 가지 공통점은 각 종교는 본성상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을 유지하고 확장시키려 한다는 점이다. 이는 모든 종교는 선교적이고(propaganda) 전략적이라는 말이다. 제도적 종교일수록 그 지수는 확산성 종교에 비해 강하게 표출된다. 한국의 5대 종단들이 모여 종교 간 대화를 한다고 하지만 예외 없이 모든 종교가 자신의 정체성을 주장하고 확대하려는 선교 의지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종교 간 대화를 논할 때 그 개념과 범위를 제한하여 사용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만물은 관계 속에 존재한다. ‘나와 너’는 상호관계에서 자아를 인식하고 타자를 인식하는데 다름 속에서 공통점을 찾아내려는 노력이 있어야 관계가 형성되는데 이것을 ‘부동이화(不同而和)’라 말할 수 있다. 곧 서로 다르지만 그 속에서 조화를 이루고자 할 때 만남이 이루어지고 ‘나와 너’는 성숙되며 풍요로워진다. 이것이 만남의 시작이요, 관계의 물꼬를 트는 것이다. 종교의 두 요소인 초월과 내재를 구별해야 한다는 말이다. 초월적 요소는 그 종교의 정체성(identity)을 결정하는 교의를 말한다. 이것은 변하지 않는 특성으로 매우 민감한 요소이다. 그러기에 종교 간 대화에서 이 문제를 언급한다면 해결보다는 충돌의 여지가 많다. 반면, 내재적 요소는 종교 문화, 곧 전례를 말한다. 이것은 가변적이고 사회적이며 문화적이다. 각 종교 간 공통분모는 여기에 있고 이것이 종교 간 대화에서 다루어야 할 부분이다. 

 

다름이란 정체성, 곧 각 종교마다 지니는 불변적이고 초월적인 요소를 말하는데, 교의(dogma)가 바로 그것이다. 이에 반해 조화는 모든 종교가 지니는 보편적인 요소로서 공통분모(공동선)에 해당되는 정신적 가치들과 이를 표현하는 문화적 요소(祭儀)를 말하는데, 이런 것들은 상황적이며 가변적이다. 그러니까 종교 간 대화를 할 때 정체성에 해당되는 불변적인 요소를 피하고 유연성이 많은 주제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선교 전략을 접고 동일한 삶의 공간인 사회에서 공존하려는 자세가 전제되어야 한다. 만남이 깊어지고 승화되면 비로소 다음 단계인 ‘화이부동(和而不同)’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일치를 이루고 있지만 역시 다름을 발견하고 인정할 때 관계는 지속될 수 있다. 문화의 만남에는 충돌이 있기 마련이고 그 충돌 안에서 융합되기도 하지만, 대체(replace)되기도 하고, 극복(overcome)하기도 하며, 정복되거나 소멸되기도 한다. 그러나 화이부동으로 존재할 때 인류의 문화는 더욱 더 풍성해지고 아름다워질 것이다. 진정한 종교 간 대화는 세상에 다른 꽃들이 함께 피어 더 아름다워진다는 진리를 배우면 가능하다. 

 

[땅끝까지 제89호, 2015년 9+10월호, 김병수 대건 안드레아 신부(한국외방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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