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8일 (토)
(백) 부활 제7주간 토요일 이 제자가 이 일들을 기록한 사람이다. 그의 증언은 참되다.

주일학교ㅣ청소년 주일학교 청소년 관련 통합자료실 입니다.

청소년을 둔 부모에게 - 용기와 교육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1-12-21 ㅣ No.122

[청소년을 둔 부모에게] 용기와 교육


‘노는 아이’에게 자전거를 빼앗겼는데

얼마 전 한 선배로부터 급한 전화가 왔다. 아이가 학교에서 자전거를 ‘노는 아이’에게 빼앗겼는데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는 전화다. 아이가 어떻게 하려고 하더냐고 물었더니 학교에 가서 자전거를 돌려달라고 말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럼 아이가 원하는 대로 해야 하지 않겠냐고 말했더니, 그러다가 혹시 잘못되면 어떻게 하냐며 땅이 꺼지게 한숨을 쉬었다.

아이가 불의와 부딪치는 것은 매우 훌륭한 일이지만 그 용기를 칭찬하기에는 세상이 너무 무섭고 위험하다며 부모로서 어찌해야 할지를 몰라 하고 있었다.

일단 아이가 먼저 부딪쳐보고 두드려 맞거나 자전거를 돌려받지 못한다면 교사에게 말을 해야 한다고 했더니 그것도 또 걱정이란다. 교사가 그리 아이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현명하게 개입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아이에게 2차적인 피해가 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아이들의 세계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것, 왕따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실 아이들의 세계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그들만의 이야기’를 어른들에게 고자질하는 것이다. 이거야말로 왕따가 될 수 있는 가장 지름길이다. 그러다 보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걱정만 태산이었다.

다행히 그날 저녁에 아이가 자전거를 돌려받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아이의 얼굴에도 뿌듯함과 자부심이 가득하더란다. 학교에 갈 때까지만 하더라도 아이 스스로도 자기가 과연 부딪칠 수 있을지에 대해 걱정했는데 잘 해결이 된 것이다.

다시 전화한 선배의 목소리에도 안도감과 뿌듯함이 가득했다. 아이에게 큰 칭찬을 해주라고 했더니 그렇지 않아도 칭찬을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경고’도 잊지 않았단다. 이번에는 ‘재수가 좋아서’ 돌려받은 것이지만 나중에도 꼭 그렇게 되는 법은 없다고 일러주며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상기’시켜 주었다고 한다.


교육의 가장 큰 목적은 ‘용기’

교육의 목적 가운데 하나는 ‘용기’이다. 용기를 가지고 세상에 나아가고 부딪치면서 성장을 꿈꾸는 것이 교육의 가장 큰 목적이다. 그런데 이 아이의 이야기에서 잘 알 수 있는 것처럼 우리 교육현장은 아이들에게 용기를 북돋아주기는커녕 오히려 용기를 잘못 내었을 때 어떻게 생명이 위험할 수 있는지를 실시간으로 알려주는 공간이 되고 말았다. 용기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어떤 아이들에게는 하루하루가 자신의 비겁을 확인하고 절망하는 시간이 된 것이다.

왕따가 되는 아이들만큼은 아니더라도 다른 아이들 역시 용기를 내는 것이 아니라 불의를 외면하거나 또는 자기가 살아남으려고 ‘공모’하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따라서 아주 일찍부터 우리의 정서를 지배하는 것은 비겁에서 나오는 ‘굴욕감’이지 결코 용기에서 나오는 ‘뿌듯함’이 아니다.

그렇다고 아이에게 혼자서 용기를 내고 세상과 맞서 싸우라고 할 수도 없다. 누가 감히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그건 아이를 죽음에 몰아넣는 일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개인이 생명을 내거는 그런 영웅적인 용기가 아니라면 우리는 어떻게 용기를 낼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바로 내 옆에 동료가 있을 때이다. 내가 용기를 내었을 때 나를 응원하고 지지하며 나랑 같이 싸울 수 있는 동료가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용기를 낼 수 있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용기의 쌍둥이 동생이 바로 ‘의리’이다.

물론 이 의리는 무턱대고 친구를 옹호하고 아무것이나 같이 하는 그런 조폭의 의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한 논객의 표현을 빌린다면 친구의 불의를 덮어주는 것이 조폭의 의리라면 친구가 불리할 때 그의 편에 서는 것은 ‘염치’이다. 이 염치를 우리는 의리라고 부른다.


아이들이 용기를 낼 수 있도록

문제는 우리 교육현장이 점점 더 의리도 용기도 없는 공간으로 가고 있다는 점이다. 의리가 없으면 용기라도 내고, 용기가 없다면 의리라도 가지도록 격려해야 하는 것이 교육인데 정작 현실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은 반대다.

왕따 문제만 해도 그렇다. 학생들에게 물어보면 왕따는 나쁜 것이지만 왕따의 원인을 제공하는 것은 왕따 자신이라고 대부분 이야기한다. 왕따가 되는 아이가 어눌하거나 말귀를 못 알아듣거나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있기 때문에 왕따가 된 것이라고 말한다. 정말 그럴까?

대부분 왕따가 되는 아이들은 이유 없이 되는 경우가 많다. 왕따의 원인은 오히려 왕따가 되고 난 다음에 합리화하려고 사후에 붙인 경우가 많다. “그 아이가 이렇기 때문에 왕따가 된 것이에요.”라는 말이 가장 비겁한 말인 셈이다.

프랑스의 철학자인 르네 지라르는 이것을‘희생양 메커니즘’ 이라고 부른다. 희생양은 무고하지만 그 희생양에게 죄를 뒤집어 씌워서 다른 사람들은 면죄되는 것이 희생양 메커니즘의 가장 큰 특징이라는 것이다. 지라르는 예수님을 이 희생양 메커니즘을 고발하고 폭로하여 더 이상 작동하지 못하게 막은 ‘어린양’이라고 말한다.

예수님은 자신이 희생양이 되는 것을 기꺼이 감수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죄인이라고 고백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자신을 ‘무고한 어린양’이라고 부르면서 모든 희생양의 무고함을 만천하에 드러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다른 희생양 사건과 차원이 다른 이유이다. 그가 희생양이 됨으로써 희생양 메커니즘을 종식시켜 버린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용기란 이런 것이다. 불의에 맞서는 것이 아니라 불의를 계속 재생산하고 합리화하는 메커니즘 자체를 종식시키는 것이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용기의 핵심이다.

그런데 교회에서 우리는 이 용기를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있는가? 이 용기를 아이들이 낼 수 있도록 서로 격려하고 북돋아줄 수 있도록 아이들을 동료로 묶어주고 있는가? 교육현장에서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교회에서라도 아이들을 ‘용기의 공동체’로 초대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 엄기호 미카엘 - 연세대학교 문화학과 박사 과정 수료, 가톨릭지식인문화운동 아시아 태평양 부회장을 역임하고 ‘교육공동체 벗’ 편집위원이다.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 등의 저서가 있다.

[경향잡지, 2011년 12월호, 엄기호 미카엘]


2,227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