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4일 (화)
(홍) 성 마티아 사도 축일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선교ㅣ복음화

선교와 문화: 종교와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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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8-11 ㅣ No.376

[선교와 문화] 종교와 여성

 

 

모든 종교에서 여성성은 초월적으로 존재하고 묘사된다. 인간은 여성에게서 태어나므로 어머니라는 존재와 역할은 위대하다. 어머니만이 신의 창조 사업에 직접 참여하기 때문이다. 가톨릭 종교 신심에서 성모 마리아의 중요성 역시 하느님께서 육화하는 과정에 여성의 자궁을 빌려 역사하셨음에 근거한다. 여러 종교에서 여성의 존재와 어머니의 위대함을 강조하는데, 성서도 예외는 아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길과 죽음에 이르는 모든 과정에 남성 제자들은 다 도망갔지만 여성 제자들은 함께했다. 부활의 첫 목격자이자 증인들 역시 여성들이었다. 이른바 거룩한 예루살렘 부인들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면서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에 동참했던 여성들의 존재와 역할은 현대 종교에서도 변함이 없다. 

 

종교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 욕망인 다산과 풍요를 기복과 연결시킨다. 이 실존적인 욕구를 채워 주는 것이 종교의 여신성이다. 종교는 인간에게 안식처를 제공해 주는 ‘품어 주는 신’을 설정하고, 인간은 그 종교에 귀의한다. 신앙은 이성과 감성의 조합이다. 아무리 고등 종교, 계시 종교라 하여도 이성만으로 종교를 설명할 수 없다. 인간성 안에는 아니마(여성적이며 감성적 경향)와 아니무스(남성적이며 이성적 경향)가 존재하는데 이 두 성향은 하느님의 모상(Imago Dei)에 기인한다. 하느님 안에는 남성성과 여성성 모두의 성향이 구분 없이 존재한다. 세상의 어떤 종교 안에도 그 구성 요소 안에는 남성적인 요소와 여성적인 요소가 있기 마련이고 이 양자가 균형을 이루어야 건강한 종교적 삶을 표현해 낼 수 있는 것이다. 

 

 

1. 노자의 철학에는 여성성이 특히 강조된다. 도덕경에 ‘곡신불사(谷神不死)’라는 말이 있다. ‘곡신(谷神)은 죽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곡신(谷神)이란, 인체의 골짜기로 말하자면 여성의 사타구니 사이에 있는 생식기를 뜻하는데 단전에 형성된 기를 말한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여성의 생식 능력의 원천인 이 기(氣)는 결코 죽지 않고 면면히 인류의 생명을 이어오고 있다. 그러나 어떤 문화는 지나치게 부권적인 경우가 있다. 그런 배경에서 표현되는 종교는 신의 부성(父性)이 지나치게 강조되거나 심지어 신의 여성성이 완전 배제된다. 이스라엘의 유다이즘과 유교의 가부장적 문화, 그리고 이슬람 사회의 종교 문화 등은 극단적으로 신의 남성성과 초월성을 강조한다. 개신교 역시 절대적인 남성 편향의 종교 요소가 자리 잡고 있어 그 안의 여성성을 부정하고 거부한다. 

 

 

2. ‘신이 남성이면 남성은 신이 된다.’는 말이 있다. 메리 데일리라는 개신교 신학자가 남성 편향성을 지적하면서 가부장적 종교가 지니는 폭력성과 권위를 드러낸 말이다. 힌두교나 인도 사상 역시 이런 경향이 강한데, 그 안에서 성장한 원시 불교도 본디 강한 부권적 종교였다. 그러나 중국에 들어오면서 중국인들의 심성에 맞게 변형되었는데 바로 관음보살의 여성화와 선종의 감성화이다. 특히 관음보살은 관음낭랑(觀音娘娘), 송자관음(送子觀音)으로 탈바꿈하여 여성성이 부각되었다. 

 

신은 성을 초월하는 존재이다. 그러나 인간의 삶과 연결될 때는 신에게도 성이 가미되는데 대체적으로 남성성이 강조된다. 남성이 지니는 초월성과 강한 힘이 신과 쉽게 연결되기 때문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표현은 이스라엘의 부권 문화적 표현이다. 그러나 정확하게 물어보자. 신은 남성인가? 아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어머니’ 같은 분이시기도 하다. 렘브란트 역시 ‘탕자의 비유’의 하느님을 묵상하다가 신의 두 손을 아버지와 어머니의 손으로 복합시켜 그리게 되었나 보다. 탕자의 형으로 대표되는 이스라엘의 부권 사회는 용납되지 않는 동생의 행동에 강한 불만을 표시한다. 정의의 입장에서 보면 당연한 논리이다. 그러나 유다이즘은 구약의 정서와 가치관에 머무른 채 몇 천 년의 시간이 흘렀어도 성숙하지 못하였다. 신약의 사랑 개념이 없었기 때문이다. 

 

신약에는 연약하신 하느님의 모습이 자주 표현된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설명되는 신약의 하느님은 구약에서 표현된 하느님과 달리 한없이 인간적이고 부드러우며 약하신 분이시다. 그 연약하심은 사랑에 기인한다. 가냘픈 비둘기나 미풍, 함께 아파해 주고 치유해 주는 의사의 모습, 오 리를 가자면 십 리를 함께 가고, 겉옷을 원하면 속옷마저 넘겨주는 신은 분명 여성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 응징하는 강력한 정의와 폭력마저 정당화시키는 심판적인 구약의 남성적 하느님과 상반된다. 그래서 ‘슬프고 울고 배고프고, 실패한 것이 복이다’라는 진복팔단의 말씀은 복음의 여성적 혁명인 것이다. 

 

신의 남성성이 강조되는 종교는 선교 의식이 강하고 강력한 주체 의식을 포함한다. 이슬람교나 개신교의 전투적이며 공격적인 선교 경향은 어느 정도 부권 종교적, 남성 중심적 신관에 기인한다고 본다. 개신교가 성모 마리아를 공격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단순히 성서적 성찰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천주교에 반하여 일어난 종교 개혁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자신의 종교 개혁성을 정당화하고 주체성을 확립하자는 취지에서 그리스도교 안에서 신의 여성성을 제거한 것은 자해적인 행동이다. 유럽의 어느 개신교 신학자는 성모의 존재와 가치를 폄하하고 부정하는 자신들을 반성하며 “우리 개신교는 왜 엄마 없는 고아가 되고 싶어 안달인지 모르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종교의 여신성은 신학이나 교의를 떠나 전인적이고 정서적인 차원에서도 바라보아야 하는 문제일 것이다. 유물론자인 마오쩌둥마저도 여성의 존재와 가치를 긍정하는 명언을 남겼다. “여성들도 하늘의 반쪽을 받칠 수 있다(婦女能?半邊天)”라는 말을 통해 인민의 반은 여성이고 여성과 남성은 동등하다는 교시를 내렸다. 그 후로 중국 공산당은 여성을 중시하는 태도가 강조되었고 부녀절(婦女節)도 창설되었다. 그런데 현대에서는 3월 8일 부녀절(三八節)이 여성을 욕하는 ‘산빠(3.8)’라는 말로 타락해 버려 마오쩌뚱의 명언이 무색해져 버리긴 했지만 말이다. 

 

성모 마리아가 여신이라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가톨릭교회 안에서 하늘로 승천한 성모 마리아는 더 이상 순수 인간적 존재는 아니다. 천사들과 모든 성인들의 존재를 뛰어넘는 위치에서 절대적 신이라 말할 수는 없지만 신성이 부여된 존재이다. 마리아의 위격 안에 이시스와 아세라, 밀리타, 아르테미스라는 고대 종교 문화의 여신들의 신성이 분여(分與)되어 있다. 에페소는 아르테미스의 판도이다. 거기 에페소의 한가운데에서 공의회가 열렸고 성모 마리아를 천주의 모친이라 선포한 데는 강력한 여신 아르테미스를 제압하고자 하는 선교적 의도가 엿보인다. 

 

대만에서는 그리스도교 전교가 쉽지 않다. 그 이유 중 하나가 대만판 아르테미스가 있기 때문이다. 처음 대만에 선교사로 도착해 교구청으로 가는 길에 커다란 붉은 글씨로 ‘天上聖母’라고 쓰인 간판을 많이 보았다. 나는 성모 마리아를 떠올렸지만 실은 마조(瑪祖)라는 여신을 표현한 것이다. 마조라는 처녀신이 지니는 도교의 민중성과 분산성은 가히 전국적이다. 마조의 생일에 거행되는 도교의 ‘빠이빠이(拜拜)’ 행사는 무척 화려하고 풍부하며 재미있어 주일 미사와 겹치는 날에는 성당이 텅텅 빈다. 마조를 극복하거나 그 존재를 전환시키지 않으면 대만에서의 전교는 힘들다. 여신성이 지니는 기복성과 풍요로움이 인간의 근원적 욕망에 기인하는 풍요와 다산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남미 안데스 산맥의 중턱에 서서 산 아래 넓게 형성된 드넓은 평원을 바라본 일이 있다. 잉카의 후예들이 수백 년 동안 부쳐 먹던 땅이다. 그런데 잉카 평야의 논두렁이 내게는 참 특이하게 다가왔다. 산 밑에서 시작된 유선형의 긴 곡선이 지평선 멀리까지 끊이지 않고 쭉 뻗어 있다. 마치 물결처럼 번져 간 논두렁 한 겹이 끝나면 다음 줄에서 다시 똑같은 유선형의 파장이 길게 퍼져 간다. 그 유선형의 논두렁은 마치 잔잔한 호수 위의 파문이 끝없이 퍼져 가는 형세다. 그 모습이 오밀조밀하고 각진 내 고향의 논두렁과는 너무나 다른 아름다운 곡선 문양이어서 바라보는 자체가 가히 감동적이었다. 가이드에게 물어보았더니 잉카인들은 대지를 어머니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 자애로운 어머니의 품이 우리를 먹여 살리기에 대지를 엄마의 유방 모양을 닮은 논두렁을 만들어 놓은 것이라 한다. 그러면서 대지를 굽어 내려다보는 잉카의 후손들은 엄마의 품을 더듬는 듯 시야를 멀리 지평선에 두고 있었다. 참으로 선량하게 살아온 잉카 문명의 후손들, 그 문명을 종교와 제국의 야만성이 멸망시킨 것이다. 

 

현대인은 생태학적 위기 속에 살고 있다. 인간의 유일한 삶의 공간인 지구의 자연 환경이 훼손되어 인간 생존의 필수 조건인 공기, 물, 땅이 오염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태계의 파괴는 이제 우리들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절박한 문제가 되었다. 환경 보호는 하느님의 창조 사업을 이어 가야 하는 신앙인의 입장에서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한다. 생태 사상과 페미니즘의 만남으로 에코페미니즘이 등장했는데 이는 우연이 아니다. 지구와 인간을 정복하고 통치하려 했던 남성성의 문화는 이제 품어 주고 양육시키는 어머니의 마음으로 바뀌어야 한다. 인류의 최대 관심사로 등장한 자연 환경의 보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열쇠가 신의 여성성, 모성(the Mother)의 회복에 있지 않을까? 노자의 ‘곡신불사’를 현대 문명의 아픔을 치유해 줄 가르침으로 되새겨 볼 일이다. 

 

[땅끝까지 제88호, 2015년 7+8월호, 김병수 대건 안드레아 신부(한국외방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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