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8일 (일)
(백) 부활 제5주일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성극ㅣ영화ㅣ예술

가톨릭 예술가 이야기: 정채봉 프란치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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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07-11 ㅣ No.82

[백형찬의 가톨릭 예술가 이야기] (27) 정채봉 프란치스코 (상)


‘성인의 영혼이 깃든’ 동화작가 정채봉

 

 

- ‘한국의 안데르센’이라 불리는 정채봉 작가는 김수환 추기경의 어린 시절을 담은 글을 신문에 연재했으며,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을 담은 글을 쓰기도 했다.

 

 

“그이와 난 닮은 점이 참 많다. 어려서 엄마와 아버지를 잃은 것이 같고 글을 써서 평생을 살았다는 것이 또한 같다.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 사랑스런 딸이 있어 행복했다는 것이 똑같은 축복일 것이다. 그 역시 나처럼 좋은 점이 있다면 엄마한테 받은 것이요, 많은 결점은 엄마를 일찍이 잃어버려 그의 사랑 속에서 자라나지 못한 때문일 것이다.”(피천득)

 

“그날 병실을 나오면서 나는 그를 안아 주었다. 일찍이 없었던 일이다. 이것이 이 생에서 우리 사이에 마지막 하직 인사가 된 셈이다. 산으로 돌아오는 길에 뼈만 남아 앙상한 그의 모습이 자꾸만 떠올라 몇 차례 길가에 차를 세워야 했다. 살아서 다시 만난 날이 없을 것 같은 예감이 들어서였다.”(법정)

 

 

정채봉과 법정 스님

 

정채봉(프란치스코, 丁埰琫, 1946~2001)은 존경할 수 있는 스승이 가까이 있다는 것은 커다란 행복이라고 했다. 그는 피천득과 법정 스님을 존경했다.

 

정채봉이 법정을 처음 만난 것은 ‘샘터’였다. 신입사원이었던 정채봉은 법정의 원고를 받으러 한강 건너 봉은사 다래헌으로 찾아가곤 했다. 법정은 전남 순천 송광사 불일암으로 옮겨가서도 「샘터」에 글을 썼다. 그런데 글에서 오자가 여러 개 발견되었다. 법정은 기분이 상했다. 전화를 걸어 더 이상 원고를 보내지 않겠다고 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에 정채봉이 갑자기 찾아왔다. 사과하려고 밤차를 타고 내려온 것이다. 풀이 죽어있는 모습을 본 법정은 마음이 누그러졌다. 그러고는 함께 부엌에서 아침밥을 지어 먹었다.

 

그러던 어느 해 봄에 정채봉은 법정에게 소포를 보냈다. 그 속에 편지가 들어있었다. 편지에는 스님의 생신을 축하드린다고 하면서 할머니 이야기를 썼다. 할머니는 손자를 키우면서 절 구경을 다니고 싶어 했다. 절을 가려면 여비가 필요했다. 그래서 한푼 두푼 돈을 모았다. 여비가 어느 정도 모이면 정채봉은 ‘이다음에 제가 돈 벌면 절에 모시고 갈게요’라는 말을 하며 돈을 가져갔다. 그런데 할머니는 정채봉이 첫 월급을 받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첫 월급을 타던 날, 누군가가 어머니 내복을 사 드리라고 했다. 그런데 내복을 사드릴 어머니도 할머니도 없었다. 스님의 생신 선물로 무엇을 살까 생각하다 내복을 샀다. 스님이 자신의 마음을 짚어 주리라 믿은 것이었다. 법정은 마루에 앉아 보내온 내복을 만지면서 편지를 두 번이나 읽었다. 그 후, 정채봉은 할머니와 어머니의 묘를 이장하고 나서 법정에게 편지를 썼다. “기억에 없는 어머니와의 첫 만남이 유골로 이루어지게 되어 눈물을 좀 흘렸습니다. 저의 나이 든 모습이 스무 살의 어머니로서 가슴 아파하실까 봐 머리에 검정 물을 들이기도 하였습니다.…” 법정은 마루에 앉아 편지를 읽다가 눈물을 흘렸다.

 

 

성모자상에 늘 인사

 

정채봉은 샘터사에 있을 때 ‘예수의 작은 자매회’ 수녀원의 난지도 분원을 방문했다. 그 수도회는 가난한 이웃들과 함께 일하는 것을 수도와 전교로 삼는 곳이었다. 두 수녀가 난지도 사람들과 함께 쓰레기 뒤지는 일을 하고 있었다. 수녀들이 사는 집은 세 평의 간이 막사였다. 한 평에는 현관과 부엌이 있고, 또 한 평에는 숙소가 있으며, 마지막 한 평에는 성당이 있었다. 그 작은 성당에 성탄 때 쓰레기 더미에서 주워온 헌 바구니에 아기 예수님이 누워있었다. 그런지 얼마 후에 그곳 수녀가 정채봉이 일하는 곳을 찾아왔다. 수녀들이 농한기에 빚었다는 성모자상을 선물로 놓고 갔다. 성모님과 아기 예수님을 갈색 점토로 빚은 것이었다. 그 성모자상을 집으로 모셔 왔다. 그러고는 출근할 때마다 “다녀오겠습니다”하고 인사를 드렸다. 또한 술에 취해 들어와서도 “한잔했습니다”하고 인사드렸다. 그런데 어느 날, 퇴근해 집에 왔는데 큰아이가 “동생이 성모자상을 넘어뜨려 아기 예수님한테 상처가 났어요”라고 했다. 방에 들어가 보니 아기 예수님의 어깨에 금이 가고 거기에 접착제가 발라져 있었다. 정채봉은 화가 나서 아이 방으로 달려가 문을 활짝 열었다. 성모자상에 상처를 낸 작은아이가 구석에서 쪼그리고 잠을 자고 있었다. 아이의 등을 잡아 일으켰더니 아이의 손바닥에서 주르르 미끄러져 나오는 것이 있었다. 묵주였다. 아이 뺨에는 눈물 자국이 말라 있었다.

 

- 류시화 시인과 정채봉 작가

 

 

김수환 추기경 어린 시절 이야기를 책으로

 

정채봉은 김수환 추기경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글로 썼다. 그 글은 소년한국일보에 ‘저 산 너머’라는 제목으로 연재되었다. 그 후에 「바보 별님」으로 출간되었다가 다시 「저 산 너머」라는 책으로 나왔다. 정채봉은 책 속에서 “그분(김수환 추기경)을 우리가 가야 할 내일의 길에 길잡이 등불로 삼을 수 있다면, 그리고 ‘저 산 너머’의 세계까지도 알 수 있게 하는 만남이 된다면 얼마나 큰 복이겠느냐.”고 했다.

 

김 추기경은 정채봉과 함께 어린 시절을 보냈던 군위를 방문했다. 그곳을 걸으며 이런 말을 들려주었다. “사람한테는 세 사람의 자기가 있지요. 한 사람은 남이 아는 자기이고, 또 한 사람은 자기가 아는 자기이며, 나머지 한 사람은 자기가 모르는 자기이지요. 바라건대 제가 이 일(‘김수환 추기경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책으로 만드는 일)을 하는 동안 남들이 아는 나보다, 그리고 내가 아는 나보다도, 내가 모르는 내가 진실로 나타나서 쓸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정채봉은 이렇게 꾸밈없고 순박한 추기경의 모습에 깊이 감동했다.

 

1993년 평화신문 제3회 신앙체험수기를 심사하고 있는 정채봉(오른쪽)과 정호승 작가.

 

 

어머니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

 

어머니는 열일곱에 시집와서 열여덟에 정채봉을 낳고 스무 살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아들은 어머니의 얼굴을 모른다. 그렇지만 어머니의 내음은 기억한다. 바닷바람에 묻어오는 해송(海松) 타는 내음이 어머니 내음이었다. 어린 채봉은 밖에서 친구들과 놀다가 어머니가 보고 싶으면 돌을 차면서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중학생 때 작문 시간에 ‘어머니 냄새’라는 글을 지었다. 담임선생은 가정을 방문해 할머니에게 정채봉이 쓴 글의 내용을 알려주었다. 집에 돌아온 손자에게 할머니는 장롱에서 무언가를 꺼내 보여주었다. 한지로 곱게 싸여있는 낡고 오래된 사진 한 장이었다. 그것은 바로 그렇게 보고 싶었던 어머니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었다. 정채봉의 표현대로 ‘둥근 턱에 솔순 같은 눈, 바람받이에 있는 해송 같은 낮은 코에 작은 입. 정말 멍이 든 데라곤 어디 하나 보이지 않는, 하얀 박속 같은 여인’이었다. 할머니가 말했다. “네 어미는 너한테서 엄마라는 말을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하고 죽었어.”

 

정채봉은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엄마가 휴가를 나온다면’이란 시를 지었다. ‘하늘나라에 가 계시는 엄마가 하루 휴가를 얻어 오신다면’ 좋겠다고 했다. 아니 하루가 아니라 ‘반나절’만이라도 아니 ‘반 시간’만이라도 그래도 안 된다면 ‘단 5분만’이라도 엄마를 만나고 싶다고 했다. 단 5분만 만나도 ‘원이 없겠다’고 했다. 엄마를 만나면 ‘얼른 엄마 품속에 들어가 엄마와 눈맞춤을 하고’ 엄마의 ‘젖가슴을 만지고’, ‘그리고 한 번만이라도 엄마! 하고 소리내어 불러보고’싶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제까지 ‘숨겨놓은 세상사 중’에서 ‘딱 한 가지 억울했던 그 일’을 엄마에게 일러바치고는 ‘엉엉 울겠다’고 했다. 정채봉을 ‘형’이라 부른 시인 정호승(프란치스코)은 이 시를 읽고 가슴은 눈물로 가득 찼다고 했다. 그리고 엄마가 얼마나 보고 싶었으면 그런 시를 썼을까, 삶이 얼마나 고단했으면 지천명(知天命)의 나이에도 엄마를 부를까 싶어 목이 메었다고 했다. 그리고 시의 끝 부분에 가서는 그만 가슴 밖으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고 했다. 정호승은 정채봉을 ‘프란치스코 성인의 영혼이 깃든 시인’이라 했다. 들녘에서 풀잎 하나라도 따면 들의 수평이 기울어질 것이기에 힘들게 발견한 네 잎 클로버 잎마저 따지 못한 시인이 바로 정채봉이라 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3년 7월 9일, 백형찬(라이문도, 전 서울예대 교수)]

 

 

[백형찬의 가톨릭 예술가 이야기] (28) 정채봉 프란치스코 (하)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해준 ‘맑은 영혼’ 하느님께 돌아가다

 

 

- 정채봉 작가가 김수환 추기경의 고향인 대구시 군위를 찾아 김 추기경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출처=「김수환」

 

 

정채봉(프란치스코, 丁埰琫, 1946~2001)은 전남 승주의 작은 바닷가 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일찍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는 일본으로 가 소식을 끊었다. 할머니는 어린 오누이를 힘들게 키웠다. 홀로 농사를 지었고, 읍내에서 풀빵 장사와 국수 장사도 했다. 그런 할머니는 정채봉이 군에서 제대하자 세상을 떠났다. 손자는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날, 할머니에게 간절히 말했다. “할머니, 내가 은혜를 갚을 수 있게 조금만 더 살아요.” 그런 손자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할머니는 세상을 떠났다.

 

정채봉은 소년 시절에 늘 혼자였다. 내성적인 성격이라 친구들도 적었다. 혼자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날이 많았다. 그 외로움이 소년을 후에 동화작가로 키웠다. 중학교를 마치고 명문고에 합격했다. 그런데 돈이 없어 등록할 수가 없었다. 그때 중학교 때 선생님의 도움으로 학비를 전액 면제받을 수 있는 농업고등학교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온실 관리를 책임졌다. 그런데 나무를 돌보는 일보다는 책에 빠져 살았다. 그러다가 나무에 물 주는 것을 잊어 꽃나무가 말라 죽게 되었다. 이때 갑자기 나타난 선생님이 화를 내며 “네 이놈, 이 아우성이 들리지도 않느냐?” 하면서 정채봉을 따끔하게 혼냈다. 그 후로 온실 당번을 그만두고 도서실 당번을 맡게 되었다.

 

 

「어린왕자」로 동화 세계에 빠져

 

도서실 당번은 그가 작가의 길로 들어서는 계기가 되었다. 도서실에서 세계고전을 비롯해 모든 책을 읽었다. 또한 친한 친구에게 매일 편지를 써서 보냈다. 그 수백 편의 편지는 작가로서 습작의 시작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동국대 국문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3년 때, 일간지 신춘문예 동화 부문과 소설 부문에 응모했다. 동화에서 ‘꽃다발’이 당선되었다. 소설은 최종심까지 올라갔으나 떨어졌다. 당시 동화는 그렇게 인기 있는 문학 장르가 아니었다. 그래서 다시 소설을 쓰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우연히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를 읽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저 그런 내용이겠거니 하고 누워서 읽었다. 점점 읽다 보니 그게 아니었다. 자세를 바르게 하고 무릎까지 꿇어가며 책을 읽었다. 동화가 이렇게도 깊은 감동을 줄 수 있다는 것을 깊이 깨달았다. 정채봉은 「어린왕자」를 계기로 다시 동화로 뛰어들었다.

 

이후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도 했다. 아이도 태어났다. 신춘문예로 등단했으나 작품만으로 가족을 먹여 살리기는 힘들었다. 그러다가 어느 선배의 소개로 ‘샘터사’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곳은 ‘글로 먹고살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었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은 그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정의와 진실이 무엇인지 회의가 들었다.

 

정채봉은 가족과 함께 가톨릭에 입교했다. 불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한 것이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할머니 손을 잡고 순천 선암사에 줄곧 다녔다. 불교는 그의 정신적 바탕을 이루고 있었다. 이후 그가 쓴 동화와 수필 그리고 시에서는 가톨릭 신앙이 들어간 글이 많이 등장했다. 특히 서울대교구 주보 ‘간장종지’에 간결하고 함축적인 메시지를 써서 신자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리고 김수환 추기경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저 산 너머’라는 장편 소설로 썼다. 또한 생각하는 동화 ‘멀리 가는 향기’는 독자들로부터 대단한 인기를 누렸고, 단행본으로 발간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는 「물에서 나온 새」로 대한민국문학상을 수상했고, 「오세암」으로는 새싹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푸른 수평선은 왜 멀어지는가」로 소천아동문학상을 수상했다.

 

정채봉과 어린 자녀들.

 

 

작고 고마운 인연들 속에서

 

정채봉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아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신문을 배달했다. 그때 마음이 아름다운 두 사람을 만났다. 한 사람은 우체부 아저씨였다. 그 아저씨는 마을에서 우편배달을 20년 넘게 했다. 집집의 가정사를 훤히 알고 있었다. 정채봉은 신문을 배달하다가 무서운 개가 짖는 바람에 그 자리에 멈춘 적이 있었다. 그때 우체부 아저씨가 신문을 대신 배달해주면서 이런 말을 했다. “무서워하면 더욱 깔보는 것이 개의 습성이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여유 있게 대하거라. 그러면 더러 기가 죽는다.” 우체부 아저씨가 들려준 그 작은 지혜는 정채봉이 살아가면서 큰 지혜가 되었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은 도장방 아저씨였다. 그 아저씨는 한쪽 다리가 없었다. 대서소 한쪽 구석에서 도장을 새기는 일을 했다. 신문 배달하던 집이 대금도 주지 않고 이사를 가버려 정채봉은 속상했다. 그럴 때 도장방 아저씨는 “빙그레 웃으며 훈훈한 마음으로 사는 거야”라고 다독거려 주었다. 후에 이 말이 도산 안창호 선생의 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도장방 아저씨는 정채봉을 서점으로 데려가서 시를 읽어주었다. 그래서 윤동주의 ‘서시’와 이육사의 ‘광야’도 알게 되었다. 또한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은 아예 외우게 되었다. 정채봉이 중학교에 진학했을 때 두 아저씨는 기뻐하며 격려해주었다. 특히 도장방 아저씨는 입학 기념으로 도장을 파서 선물해 주었다. 그 나무 도장은 중고등학교 입학원서에, 대학 입학원서에, 이력서에, 혼인 신고서에, 아이 출생 신고서에, 작품집 인지에 찍은 귀한 도장이 되었다.

 

 

삶을 너무 사랑했지만

 

정채봉은 동국대 국문과 겸임교수로 또한 평화방송TV 진행자로 정력적인 활동을 했다. 그러던 그에게 병이 찾아왔다. 그에게는 B형 간염이 있었다. 그래서 병원에서 정기적으로 검사를 받았다. 정기 검진을 앞두고 오른쪽 하복부에 통증이 왔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런데 체중이 1㎏씩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검사를 했더니 간암이었다. 입원 전날 밤에 가족들에게 당분간 병원에 나타나지 말라고 했다. 슬퍼만 하다가는 병을 극복할 힘을 일찍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입원해서는 병실 앞에 ‘면회 사절’이란 명패를 걸었다. 명패 밑에 면회를 사절할 수밖에 없는 사정을 적어놓았다. 그러고는 ‘면회 사절’이라는 시를 지었다. 시에서 면회를 ‘오지 마라’고 세 번씩이나 반복해서 말했다. 그러면서 ‘이대로 죽음을 맞이하면 나의 수의는 너의 사랑’이라고 했다. ‘아직은 절망하기 싫다’고 하며 ‘면회를 사절할 수 있는 것도 살고 싶기 때문’이라고 했다. 정채봉은 삶을 너무나 사랑했다. 그래서 죽을 수가 없다고 한 것이다. 이 시를 읽으면 병실에 누워있는 정채봉의 야윈 모습이 떠올라 가슴이 아리다.

 

세밑 아침이었다. 정채봉은 병원 밀차에 누워 수술실로 향했다. 어린 딸이 슬리퍼 두 짝을 들고 따라왔다. 간호사가 딸에게 말했다. “아버지는 한동안 신발을 신을 필요가 없을 거예요. 갖다 두고 와요.” 그 말을 들은 정채봉은 슬펐다. 신발을 영영 신을 수 없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정채봉은 중환자실에 누워있었다. 입에는 마우스가 물려 있고, 링거와 고무호스는 팔과 코 그리고 옆구리에 꽂혀 있었다. 일곱 시간이나 걸린 대수술이었다. 목이 말랐다. 손짓으로 물 먹고 싶다고 했다. 그랬더니 간호사가 ‘환자에게 물을 뿌려 주라’고 했다. 그러자 물은 튜브를 통해 곧바로 몸속으로 들어왔다.

 

기나긴 투병 생활은 정채봉의 삶에 큰 영향을 주었다. 병이 깊어가면서 쓴 것이 「눈을 감고 보는 길」(수필집)과 「푸른 수평선은 왜 멀어지는가」(동화집)이다. 뒤의 책으로 아동문학상을 받았다. 그는 수상소감을 말했다.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하느님이 그렇고 마음이 그러하며, 동심이 또한 그렇지 않습니까? 문학인의 사명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보이게 하는 것입니다.” 정채봉은 죽음을 향해가면서도 「너를 생각하는 것이 나의 일생이었지」(시집)를 완성했다. 정호승은 이 시집을 ‘삶과 죽음의 세계를 넘나들었던 한 동화작가의 삶에 대한 통찰의 한 결정체’라고 했다.

 

정채봉은 함박눈이 펑펑 내리는 날, 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하얀 눈이 내리는 날 세상을 떠나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주신 영혼을 맑게 해 하느님께 다시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 그의 소망대로 이루어졌다.

 

참고자료 : ▲ 정채봉 「물에서 나온 새」 샘터. 1983 ▲ 정채봉 「그대 뒷모습. 제삼기획」 1990 ▲ 정채봉 「너를 생각하는 것이 나의 일생이었지」 현대문학북스. 2000 ▲ 정채봉·정리태 「엄마 품으로 돌아간 동심」 샘터사. 2002 ▲ 정채봉 「오세암」 샘터사. 2003 ▲ 정채봉 「눈을 감고 보는 길」 샘터사. 2006 ▲ 정채봉 「저 산 너머」 리온북스. 2018 ▲ 정채봉 첫 「마음」 샘터. 2020 ▲법정 「텅빈 충만」 샘터사. 2001 ▲ 가톨릭평화신문(2001.1.14) ‘맑은 영혼으로 하느님께 돌아가’ ▲ 가톨릭신문(2001.1.21) ‘고(故) 정채봉 씨의 삶과 문학’

 

[가톨릭평화신문, 2023년 7월 16일, 백형찬(라이문도, 전 서울예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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