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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가르멜의 성인들: 복자 프란치스코 빨라우 이 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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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12-15 ㅣ No.1075

[가르멜의 성인들] “저는 교회를 위해 살고 교회를 위해 죽습니다”

복자 프란치스코 빨라우 이 께르


통상 가르멜수도회는 봉쇄, 관상 수도회로 알려져 있지만 이러한 통념을 넘어 교회가 필요로 하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 교회의 가장 아프고 힘든 부분을 어루만져주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함으로써 가르멜수도회가 지극히 교회적이며 사도적인 카리스마를 갖는 공동체임을 보편교회에 알려준 분이 있다. 전교가르멜수녀회의 창립자로 지난해 탄생 200주년을 맞이한 복자 프란치스코 빨라우 이 께르가 그분이시다.


교구 신학생에서 가르멜 수사가 되다

복자 빨라우는 1811년 11월 29일 스페인 북동부의 우에스카 주에 있는 아이토나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828년 레리다 신학교에 입학,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으며, 연학 과정 중 가르멜수도회의 영성에 매료되어 1832년 10월 23일 수도회에 입회하게 된다. 그리고 수련을 받은 뒤 이듬해 11월 15일 수도서원을 했다.

당시 스페인에는 반교회적인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반교회적, 반성직자적인 정치인들이 정권을 잡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노선을 표방한 멘디사발 정부는 1836년 스페인 내에 있는 모든 수도회의 재산을 몰수했으며 수도자들에게 수도회를 떠나 환속하도록 강요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빨라우 수사 역시 가르멜수도회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카탈루냐 교구로 입적한 그는 1836년 4월 2일 바르바스트로에서 교구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러나 스페인의 상황이 악화되자 얼마 뒤 프랑스로 망명, 페르피냥과 몬토반 그리고 리브롱에서 활동했다.


이비사에서의 유배생활과 신비체험

1851년 스페인으로 돌아와 바르셀로나 교구로 입적한 그는 성 아우구스티노 본당 주임사제로 활동하면서 ‘덕행학교’라는 일종의 교리신학원을 설립, 효과적인 방법을 활용해서 많은 신자들에게 교회의 가르침을 전하며 신자들을 영적으로 인도했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노동파업으로 인한 정치 소요에 휘말리면서 이 학교는 1854년 강제 폐교되고 만다.

이에 그는 공권력의 개입에 맞서 항거했지만 오히려 상황이 악화되어 이비사 섬으로 유배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그런 상황에 굴하지 않고, 이비사 섬에서도 험준하기로 소문난 부속 섬인 베드라에서 수덕생활에 정진, 교회의 신비에 대한 심오한 신비체험을 하게 된다.

1860년 해금된 뒤, 그는 주로 바르셀로나 근처에 있는 오르타의 성 십자가 동굴과 이비사, 베드라에서 기도생활과 전교활동 그리고 구마활동을 했다. 그리고 1872년 3월 21일 타라고나에서 파란만장했던 생을 마감했다. 그로부터 약 100년 뒤인 1981년 9월 15일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는 그를 복자품에 올리셨다.


다양한 사도직에 투신

우여곡절이 많았던 생애만큼이나 그는 다양한 모습을 갖고 있다. 무엇보다도 그는 19세기라는 격동의 세월을 살았던 대표적인 가르멜 회원으로서 열정적인 설교가이자 교리교사, 영성 저술가, 학술지 저자, 구마사 그리고 무엇보다도 두 개의 수도회를 창립한 창립자였다.

우선, 그는 카탈루냐, 아라곤, 발레아레스 군도 등 스페인 전역을 돌아다니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교구로부터 공식적으로 ‘사도적 선교사’라는 칭호를 받았다. 또한 그가 바르셀로나에서 창시한 ‘덕행학교’는 어른들을 위한 독창적인 교리 학교로서 그 뒤 스페인 전역에 보급되어 당시 세속정부에 의해 황폐해 가던 교회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심오하고도 다양한 영성서적을 우리에게 남겼다. 대표작으로는 1861년부터 1867년 사이에 집필한 「교회와 나의 관계」가 있는데, 그는 여기서 교회에 대한 자신의 독특한 시각을 바탕으로 인격적 교회론을 펼쳤다. 영신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주옥같은 작품으로는 「서간집」과 「하느님과 영혼의 씨름」을 꼽을 수 있다.

또한 그는 여러 학술지를 통해 다양한 신학 주제를 체계적으로 제시함으로써 신자들의 계몽에 힘썼다. 예를 들어, 그는 바르셀로나의 「엘 앙코라」에 여러 해 동안 글을 실었으며 1868년에는 손수 「정치 - 종교 연구회」, 「엘 에르미타뇨」를 창간해서 편집장으로 활동했다. 특히 그는 당시의 반교회적 상황이 악의 세력에 의해 부추겨진 것이라는 판단 아래 「엘 에르미타뇨」를 통해 사탄의 활동과 반교회적인 자유주의 사상을 공격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교회 전반에 퍼져있는 사탄의 활동을 추방하는 데 앞장섰다.


전교가르멜수도회 · 수녀회의 설립

빨라우 복자가 일생을 통해 맺은 결실 가운데 가장 빛나는 것이라면 역시 수도회의 창립을 들 수 있다. 그는 살아생전 두 개의 수도회를 창립했다. 그는 이미 프랑스에서 망명생활을 하던 시절, 당시의 시대적 징표를 읽고 그에 대한 자신의 새로운 카리스마를 통해 교회와 사회에 새로운 힘을 불어넣을 수 있는 신심 깊은 젊은이들로 구성된 공동체를 리브롱에서 구상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이 공동체를 통해 기도와 희생을 바탕으로 쓰러져가던 스페인 교회를 일으키고자 했다. 이것이 구체적인 결실을 보게 된 것은 이비사에서의 유배생활 마지막에 즈음해서였다.

그는 1860년 마요르카에서 ‘전교가르멜수도회’를 창립했으며, 1861년 메노르카의 시우다델라에서 ‘전교가르멜수녀회’를 창립했다. 전교가르멜수녀회의 경우에는, 성인의 사후, 수녀회가 지향해야 할 노선을 두고 두 그룹으로 나뉘게 됐는데, 한 그룹(노게스 신부 지도하의 그룹)은 ‘데레사전교가르멜’로 불리며 발레아레스 군도 내에 국한해서 전교활동을 벌였다.

반면, 다른 한 그룹(빨라우 복자의 첫 번째 제자인 후안나 수녀를 중심으로 모인 그룹)은 스페인을 비롯해 전 세계로 빨라우 신부의 카리스마를 전파했다. 이 그룹을 통상 ‘전교가르멜’이라 부르며 현재 한국에 들어온 공동체는 후자인 ‘전교가르멜수녀회’이다.


현대 교회 영성의 선구자

빨라우 신부의 영성의 중심에는 ‘교회’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자리 잡고 있다. 그가 관상한 교회는 단순히 추상적, 관념적인 공동체가 아닌 살아있는 ‘인격체’였다. 더욱이 그는 교회가 ‘하느님의 신부’라고 하는 교회 전승을 단순히 상징으로서가 아니라 실제로 받아들이고 교회에 대한 열정으로 한 생을 불살랐다.

그가 삶을 통해 그리고 여러 작품을 통해 제시한 교회에 대한 전망은 삼위일체적이며 그리스도 중심적이었다. 그리고 성모님을 교회의 표상으로 보았다. 이런 그의 시각은 그보다 약 100년 뒤 1960년대 개최될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와서야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신앙 고백의 형태로 자리 잡게 된다.

세속화 시대, 다원주의 종교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날, 자칫 교회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릴 수 있는 상황에서, 교회는 누구이며 교회의 사명은 무엇인지 그리고 교회의 자녀인 우리는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구체적인 그리스도인 실존을 살아가는 데에 빨라우 복자의 교회 영성은 그 어느 때보다도 우리에게 천상의 빛을 비춰줄 것이라고 믿는다.

* 윤주현 베네딕토 - 가르멜수도회 수도사제. 2001년 로마 테레시아눔에서 신학적 인간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2003년부터 2011년까지 스페인에서 가르멜 영성을 전공하고 아빌라신비신학대학원에서 교수로 활동했다. 「은총론」, 「교회론」, 「신학적 인간학」을 비롯해 가르멜 총서 시리즈 등 다양한 저서, 역서, 논문을 발표했다. 현재 대전가톨릭대학교 교수로서 은총론과 영성신학입문을 강의하고 있다.

[경향잡지, 2012년 12월호, 윤주현 베네딕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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