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8일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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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철학ㅣ사상

과학칼럼: 전직 과학도의 철학사 수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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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02-06 ㅣ No.476

[과학칼럼] 전직 과학도의 “철학사 수업”

 

 

저는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신학생으로서 이 학교에서 7년 동안 가르침을 받았고, 바로 그 모교(alma mater)로 돌아와 학생들에게 신학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지요.

 

신학대학에서 학생들은 신학만이 아니라 철학도 상당히 심도 있게 배웁니다. 첫 2년의 커리큘럼은 거의 철학 과목으로 짜여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지금도 그렇고 저희 때도 그러했습니다만, 많은 학생이 철학을 배울 때 어렵고 힘들어합니다. 심지어 우리는 신학도인데 왜 이렇게까지 철학을 배워야 하냐는 볼멘소리도 나옵니다.

 

저도 처음에는 철학 과목이 낯설었습니다. 특히 고대철학사 수업 때 첫 부분에 나오는 자연철학자들, 곧 탈레스를 필두로 아낙시만드로스, 아낙시메네스 등, 이름만 들어도 현기증이 날 것 같은 학자들을 배우며, 도대체 이 이름 긴 사람들 각자가 말했던 황당한(?) 이론들을 왜 배우는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나름 일반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한 제게, 만물의 근원(archē)을 물, 불, 공기, 흙, 사랑/미움 등으로 설명하는 고대 자연철학자들의 이야기는 그저 어린아이 소꿉장난같이 들렸습니다.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을 들으며, ‘제법 현실에 가깝기는 하지만 그 정교함은 돌턴 할아버지의 원자론에도 턱없이 못 미치는구나.’라는, 어찌보면 현대 과학을 배운 사람의 교만함이 잔뜩 묻어나는 생각을 하고 있었지요.

 

몇 주 후, 고대철학사 수업은 저 유명한 소크라테스에 대한 내용으로 접어들고 있었습니다. 처음엔 혼잣말로 심드렁하게 “아하, 소크라테스, 너 자신을 알라고 했던 그 양반!” 하고 뇌이던 저는, 소크라테스의 중요성은 바로 그가 보편적인 진리, 보편적인 선(善)을 추구했다는 데 있다는 교수 신부님의 설명을 듣고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또한 보편적인 옳음(眞)과 선함(善)을 얻기 위해 이 위대한 철학자는 가장 먼저 어떤 개념에 대한 보편적인 정의(定義, definition)를 내리려 했다는 이야기를, 저는 귀를 쫑긋 세우고 들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지점이야말로 제가 자연과학에 매료된 곳인 동시에, 그러나 결국은 ‘과학 신봉자’가 아닌 가톨릭 신앙과 사제의 길을 택하게 된 결정적인 갈림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철학과 과학은 하늘과 땅이 먼 만큼이나 서로 멀어 보입니다. 하지만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자연과학은 바로 철학의 품에서 탄생했고, 역으로 철학은 ‘자연과학적인’ 관심사에서 그 첫걸음을 내딛었습니다. 철학사 수업이, 현대 과학의 세례를 받은 우리 눈에 황당하게만 보이는 ‘자연철학자들’의 이야기에서 시작하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스스로 저작 하나 남기지 않은 소크라테스가 그토록 중요하고 위대한 이유는, 그가 바로 보편적인 앎과 선함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켰고, 그것이 이후 철학과 과학의 역사를 결정지었기 때문입니다. 철학과 자연과학은 모두 보편성에 대한 추구에서 시작되고 발전했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철학과 과학은 서로 결별한 것처럼 보입니다. 다음 연재 때 좀 더 자세히 말씀드릴 이 ‘결별’은, 신앙과 과학 사이의 오랜 오해와 ‘갈등’의 역사와도 맞물려 있습니다.

 

[2023년 2월 5일(가해) 연중 제5주일 서울주보 6면, 조동원 안토니오 신부(가톨릭대학교성신교정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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