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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한국의 베네딕도회 순교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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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8-11 ㅣ No.831

한국의 베네딕도회 순교자들

 

 

중세 유럽을 복음화한 주역들을 ‘성인들’이라고 부르는 데는 아무런 의심이 없다. 여러 세기를 거쳐 성인으로 공경해 온 것만 봐도, 돌아가신 지 천년이나 되는 그분들의 성덕을 의심할 이유는 전혀 없다. 게다가, 7세기와 10세기 사이 선교를 하다가 살해된 수도승들의 죽음은 의문의 여지없는 ‘순교’였다. 중부 유럽에 그리스도교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그들은 목숨까지 바쳤다.

 

올해로 백년이 되는 베네딕도회 한국 선교의 경우에도 많은 훌륭한 수도승 선교사들이 있는데, 그중에 보니파시오 사우어(Bonifaz Sauer, 辛上院 , 1877-1950) 주교 아빠스가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성 보니파시오와 같은 고향인 풀다Fulda에서 태어난 이분은 동아시아 선교 임무와 당신의 수호성인을 직접 연관 지었다. 보니파시오 주교 아빠스가 바란 선교방법은 작업장과 학교, 사회사업 시설을 갖춘 큰 수도원이 선교의 거점이 되어 그 영향력이 수도원 담장을 넘어 밖으로도 끼치게 하는 것이었다. 물론 수도원 안에서는 성 베네딕도의 수도규칙을 따르는 수도승 생활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보니파시오 주교 아빠스는 이런 구상을 담은 장문의 편지를 1920년대를 전후로 해서 피델리스 당시 수석아빠스에게 보냈으며, 그 편지들은 지금 성 안셀모 수도원의 문서고에 보관되어 있다. 보니파시오 주교 아빠스는 마리아라흐Maria Laach 수도원 출신인 수석아빠스에게 베네딕도회가 수도승 생활과 선교사로서의 삶을 서로 연결하지 않는다면 우리 수도회의 핵심부분을 잃게 된다는 사실을 납득하도록 애썼다. 하지만, 내가 말하려는 것은 그런 아이디어가 어떤 것이며 또 그런 생각이 결국 얼마만큼 현실로 이루어졌나 하는 것이 아니라, 전 생애를 통해 그런 생각과 마주하며 살았던 사람들에 대해서이다. 이들에 대해 이야기하기란 중세의 수도승들과 순교자들에 관해 말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 한편으로는 시간적 거리도 가깝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 내 공경도 부족하기 때문이다.

 

순교의 영광은 아무에게나 허락되지 않는 모양이다. 연길 수도원 소속 선교사들은 모진 정신적 육체적 핍박을 당했음에도 살아남아 본국으로 귀환하였다. 테오도로 브레허(Theodor Breher, 白化東, 1889-1950) 주교 아빠스가 1950년에 교황 비오 12세를 개인적으로 알현하였을 때 교황이 그에게 분명히 드러낸 그 멸시적 태도는 그 뒤로 오랫동안 오딜리아 연합회를 따라 다녔다. 그래서 오딜리아 연합회의 한국진출 100주년을 맞은 이 시점에 사람들의 관심은 연길에서 활동했던 남녀 베네딕도회 수도자들보다, 북한 땅에 있었던 원산 수녀원과 덕원 수도원의 수도자들에게 모아지고 있다. 두 수도원 모두 1949년 5월 공산정권에 의해 해산되었다. 수도자들 및 수도원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이들 중 약 쉰 분이 살해되거나 외딴 강제수용소에서 영양실조로 희생당했다. 이 중 서른여섯 분에 대해서 시복시성 절차를 시작한다는 교령을 2008년 5월 10일 이 시몬 아빠스가 왜관 수도원 성당 제대 위에서 서명하였고, 이를 근거로 오딜리아 연합회에서 시복시성 절차를 밟고 있다.

 

그들의 자취가 얼마나 생생하게 남아 있는지는 왜관 수도원의 연로한 수사들과 대화를 해보면 알 수 있다. 몇 년 전의 일이다. 그러니까 시복시성 절차를 착수하기도 전이다. 젊은 시절 그들과 함께 수도생활을 했던 원로 수사들과 만나서 뭔가 좀 더 알아내고 싶었다. 그런데 대화는 늘 “그분들은 성인이셨어요.” 하는 말로 시작되었다. 똑같은 말을 하도 여러 번 들었기 때문에 저는 통역하는 분께 부탁해서, 그렇게 그냥 성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으니 제가 기록에 남길 수 있는 사실들을 이야기해달라고 청했다. 노규채 아우구스티노 신부는 매우 친절하게 그 당시 보니파시오 주교 아빠스가 수련자들과 나누었던 긴 대화들을 떠올리며, 심한 천식 때문에 어기적어기적 걸어가던 그의 걸음걸이를 흉내 내 보여주었다. 그가 형제들 맨 앞에 서서 쌕쌕거리는 숨소리를 내며 성당에 입장하곤 했는데, 사람들은 이 때문에 그를 “기관차”라고 불렀다. 기도를 선창할 때에도 한 번도 비슷한 음을 못 내셔서 사람들이 정말 우스워했다. 원장과 부원장도 노래를 못하기는 비슷한 처지여서 이들과 함께하는 공동기도는 젊은 형제들에게 거룩한 즐거움 외에 또 다른 즐거움이 되었다. 이석철 미카엘 수사는 또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는 덕원 수도원의 실제적인 선교 총책임자였던 루치오 로트(Lucius Roth, 洪泰華, 1890-1950) 신부에 대해서 말하며, 한 번은 곡식 창고에 사고가 생기자 루치오 신부가 수도원 마당을 뛰어가던 모습을 흉내 내어 보여주었다. 또한 루치오 신부가 병든 형제들을 밤새 지키며 돌보던 이야기를 할 때는 칭찬이 마르지 않았다. 이와 비슷하게, 황춘흥 다미아노 신부의 증언을 통해 덕원 신학교 교수들을 생생하게 다시 만나게 된다. 그레고리오 기게리히(Gregor Giegerich, 奇, 1913-1950) 수사는 평수사 지망자들에게 얼마나 좋은 인상을 심어주었는지 이들은 “우리도 그레고리오 수사님처럼 되고 싶어요” 하고 자신들의 결심을 말하곤 했다. 베트비나 체사르(Bertwina Casar, 蔡仁淑) 수녀는 원산 수녀원과 옥사덕 수용소에서 같이 지냈던 동료 수녀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들 중 한 사람에 대해서 수녀는 주저 없이 이렇게 이야기했다. “그 수녀님은 공동생활이 어려웠어요. 하지만 일은 참 잘했죠.” 이어서 베트비나 수녀는 다시 한번 말했다. “그 수녀님은 공동생활이 어려웠어요.” 수많은 칭찬 일색 가운데 이러한 증언은 오히려 우리를 위한 위로처럼 들린다. 연길 수도원의 테오도로 주교 아빠스가 쓴 편지에서도 그러한 위로를 만나게 되는데, 덕원에서 나온 첫 인쇄물들이 엉망이란 내용과 또 중국인 제화공들이 미래의 성인이 될 이 덕원 수사들이 만든 장화 솜씨를 보고 웃었다는 내용이 그것이다.

 

로마 성 안셀모 수도원 문서고에는 보니파시오 주교 아빠스가 쓴 편지가 수백 통 보관되어 있다. 하지만 어떤 편지를 읽어봐도 그가 돈 없다고 불평하는 내용은 단 한 군데도 없다. 당시에 살던 이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들의 힘과 약점들이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나는 솔직히 이런 것에 그리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는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축복된 삶으로 나아가는 길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덕원 수도원과 원산 수녀원의 최후를 말해주는 일면은 내게 특별히 중요하다. 수도원 해산은 철저히 공산당에 의해서 계획되었다. 독일인 신부, 수사, 수녀들과 한국인 신부들이 체포되었다. 다른 한국인 수사들은 각자 고향으로 돌려보내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아직 수도원에 완전히 받아들여지지 않은 이들을 포함한 그 젊은 남녀 수도자들은 자신들을 공동체의 일원으로 여겼다. 그들을 덕원이나 원산에서 쫓아낼 수는 있었겠지만 공동체에서는 그럴 수 없었다. 원산 수녀들은 공산당원들한테서 “떠나가서 시집가라”는 말을 들었다. 수도복이 벗겨진 채 정말 끔찍한 꼴이 된 서로를 쳐다보면서 울음을 터트리며 서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수녀를 만드는 것은 수도복과 봉쇄구역이 아니라 마음과 정신입니다.” 공동체를 해체하려는 시도는 예전에 연길에서 실패한 것처럼 덕원과 원산에서도 성공하지 못했다. 쫓겨난 수도자들은 붙잡혀간 이들과 여전히 마음으로 연결되어 있었으며 그들과 즉시 새롭게 출발을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붙잡혀간 이들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이는 1949년 6월 오틸리엔 수도원에서 보낸 회람편지에 나오는 문장이다. 이 말은 수용소에 있던 이들과 연합회 전체에 긴 악몽을 뜻했지만, 한국인들한테는 똘똘 뭉치게 해주는 힘이 되었다. 생존자들이 독일로 송환되어 온 1954년 1월 23일, 그때 이 사건을 본 사람이라면 아무도 그날의 환영 인파, 생존한 수도자들과 함께 기뻐하던 모습, 그리고 많은 수가 죽었다는 사실을 듣고 충격을 받던 일을 잊지 못할 것이다.

 

그때 돌아가신 분들을 공적으로 성인으로 공경하는 것이 이미 허락되어 있는가? 성 베네딕도는 자신의 수도규칙에서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 “성인으로 불리어지기를 바라지 말고 먼저 성인이 되어라”(4,62) 이 말씀대로라면 이분들을 성인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교황이나 교황청에 가야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관심은 사람들 사이에 실제로 살아 있는 수도승들이다. 그리고 돌아가신 이분들 모두가 우리 가운데 살아계심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그분들은 우리 삶의 한 부분이요 또한 당신들이 사셨던 수도원 역사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죽임을 당한 것은 수도회의 회원이었기 때문이요, 그 수도회가 독일인과 한국인, 사제와 평신도 그리고 남자와 여자가 함께 하며 개방된 삶의 모범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공산주의자들은 이를 용인할 수 없었다. 사실 공산주의 조직은 오직 세속적인 목적을 향해 있고, 그 때문에 결국 실패로 끝났다. 그분들이 사셨던 삶의 의미를 엿보게 해주는 세 가지 다음과 같은 작은 일화가 있다.

 

베드로 게르네르트(Petrus Gernert, 1882-1949) 수사는 1882년에 태어나 1911년에 한국에 와서는 이제껏 자신이 배워본 적도 없는 일을 평생토록 하였다. 늘 궁핍한 처지에 있었던 그는 수도원이 맡은 선교 지역 내에서 벌어졌던 큰 규모의 건축공사를 대부분 책임졌다. 몇 번의 큰 사고에서 살아나기도 했는데, 이분이 다녀간 뒤라야만 그곳의 주거환경이 비교적 괜찮아졌다. 평양 감옥에 계신 몇 달 동안 쇠약해진 데다 강제 수용소로 끌려가며 기력을 너무 탕진하여 그만 1949년 7월 3일에 사망했다. 그리하여 그는 옥사덕 수용소에 희생된 첫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또 한 달 만에 마르코 메쯔거(Markus Metzger, 丁洋利, 1878-1949) 수사도 사망하였다. 이분 역시 1911년에 한국에 왔고, 사람들의 눈길을 끌던 작업장들에 비해 별로 화려하지 않은 영선 일을 담당하였다. 이분 이름이 처음 언급되는 곳은 서울 성 베네딕도 수도원의 연대기인데, 여기를 보면 그는 남들보다 아침에 훨씬 일찍 일어나 경당에 난로를 켜고 기름 등잔에 불을 붙였다고 되어 있다. 그가 사망하고 한참 뒤에, 그의 이름이 왜관 수도원 연대기에 또 등장하는데, 연대기 사가는 왜관에 세워진 새 수도원이 마르코 수사가 관리했던 덕원 수도원만큼 깨끗하지 않다는 불평을 적어 놓았다.

 

조용한 수사들보다는 본당에서 활동하던 신부들의 일이 더 드러나 보였습니다. 앞서 말한 두 수사보다 스무 살이나 적었던 그레고르 슈테거(Gregor Steger, 全五範, 1900-1950) 신부는 본당사목의 방법을 바꾸었다. 그는 고작 신자들이 교리문답을 글자 그대로 잘 외우고 있나 없나를 확인하려고 외딴 동네까지 일주일씩이나 걸려 찾아갈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가졌다. 그래서 교리서의 의미를 명확히 설명하고 본당신자들을 그리스도교 공동체로 탈바꿈시키기 위한 모델이 될 교리교수법을 창안하였다.

 

이러한 사례들 때문이기도 하지만 내게는 “덕원 순교자들”이 시성되느냐 못되느냐 하는 문제도, 도대체 언제쯤 시성될까 하는 물음도 중요하지 않다. 시성식에 이르는 예비 절차는 공식 행위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런 절차를 거치면서 우리는 지금껏 우리 의식 속에 없었던 점을 깨닫게 된다. 즉, 현재 남한이 발전하고 있는 것도, 그리고 언젠가 북한이 다시 성장할 날이 오게 되는 것도 한국 교회가 소위 공산주의 아래에서 두 세대 이상 억압과 침묵의 시기를 이미 극복하고 살아남았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그 진짜 뿌리는 순교자들이 보여준 생명력에 있습니다. 그분들에게서 나온 새순들이 왜관, 대구, 부산에서 공동체로 성장하였다. 지금 현재 왜관 수도원에는 새로운 성당 종탑이 도시 위에 우뚝 세워지고 있다. 그 종탑은 6.25 전쟁 때 파괴된 덕원 수도원의 종탑을 모델로 하고 있다. 이 종탑이 형상화하듯이, 새 성당은 현재를 사는 이들이 돌아가신 분들과 만나서 오딜리아 연합회의 한국 베네딕도회 공동체를 함께 이루는 장소가 될 것이다.

 

[분도, 2009년 가을호, 글 요한네스 마르 박사, 번역 최종근 파코미오 신부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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