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0일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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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ㅣ순교자ㅣ성지

[성인] 정하상 성인의 활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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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3-25 ㅣ No.1454

[특별 연재] 이 시대, 순교신심에서 길을 찾다


정하상 성인의 활약



삶의 푯대를 상실한 현대인들은 인문학, 심리학, 과학의 문을 서성이며 길을 찾고 있다. 여기, 한평생 순교신심을 연구해온 손골성지 윤민구 신부는 신앙의 유산이 담긴 순교신심에서 삶의 방향키를 찾아 우리에게 들려준다. 올해는 103위 성인이 탄생한지 30주년이 되는 해이다. 성인들의 삶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규범이 되고 기준이 된다.


지난 번에 윤유일(尹有一, 바오로, 1760-1795) 순교자에 대해 설명하면서 우리나라 천주교회가 태생적으로 갖고 있었던 두 가지 약점을 말하였다. 하나는 천주교 신앙생활에서 가장 핵심적 요소인 미사와 성사(聖事) 등을 집전할 성직자가 없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왕정체제에서 천주교를 자유스럽게 믿고 널리 알리기 위해서는 왕이나 정치권력과 어떤 형태로든 대화가 있어야 했는데 그 창구가 없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윤유일 순교자와 초기 교회 지도자들처럼 1814년 교우들의 추대를 받아 교회 지도자가 된 정하상(丁夏祥, 바오로, 1795-1839) 성인 역시 당시 교회가 가지고 있던 이 두 가지 약점을 해결하는 일에 온 힘을 쏟았다. 그래서 정하상 성인의 활약상을 이야기하려면 먼저 그분이 펼치신 ‘성직자 영입’ 노력을 언급해야 할 것이다. 사실 성직자 영입을 위한 노력은 정하상 성인의 부친 정약종(丁若鍾, 아우구스티노, 1760-1801) 순교자도 한 일이라서 정하상 성인은 대를 이어 같은 일을 한 것이다.

정하상 성인의 성직자 영입 운동은 처음부터 쉽지 않았다. 이미 살펴본 대로 북경교구장이면서도 중국 정부로부터 입국허가를 받지 못해 북경에 들어가지도 못한 사라이바(Saraiva, ?-1818) 주교가 조선신자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정하상 성인은 실망하지 않고 매년 북경을 방문하여 성직자 파견을 요청하였던 것 같다. 그 결과 아주 일찍 결실을 얻을 수도 있었다. 《기해일기》는 정하상 성인의 활동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이러하므로 비천함을 사양치 아니하고 노예의 본분을 즐겨 당하여 역관(譯官)을 따라 북경 내왕을 8 · 9차를 하니라. 주당(主堂)에 들어가 성사를 받고 주교 전(前)에 동국을 가련히 여기시어 목자를 보내시기를 간구하니, 처음에 준허(准許)치 아니하다가 제5차에 준허하심에 변문(邊門)으로 기약하고 때맞추어 영접하러 간즉 신부가 아니 오신지라.

그러니까 조선으로 성직자를 모셔오기 위해 정하상 성인은 비천한 일도 마다 않고 노예가 되어 역관을 따라 8-9차례 북경에 가서 북경교회에 신부를 청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처음에는 허락되지 않다가 정하상이 북경을 다섯 번째로 방문하였을 때 신부를 약속받았다. 그래서 변문에서 만나기로 약속하였고, 약속한 때를 맞추어 갔는데 어찌된 일인지 신부가 오지 않아 영입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언제 이런 일이 있었을까? 1817년 1월 23일 사라이바 주교는 교황청 포교성에 편지를 보내면서 북경교구 총대리 신부를 통하여 중국인 선교사 두 사람을 조선에 보냈다고 보고하였다. 그들은 플로리아노(Florianus Xin Vellozo) 신부와 요한(Joannes Vam) 신부인데 남경교구 소속이었다. 이들은 남경에서 배를 타고 해로로 조선에 입국할 계획을 갖고 1817년 1월 4일 출발하였다. 만일 해로로 입국이 어려우면 배를 타고 국경까지 가서 주문모 신부가 택했던 장소를 거쳐 조선으로 들어가려 하였다. 하지만 이들의 입국 시도는 실패하고 말았다. 조선 신자들을 만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러다 플로리아노 신부가 세상을 떠나서 선교사 파견은 성공하지 못한 채 끝나버렸다.

만일 《기해일기》에서 말하는 상황이 이때를 말하는 것이면 정하상 성인과 중국인 신부들이 서로 만나지 못한 때는 1817년이다. 여기에 대한 《기해일기》의 기록을 보면 성직자 영입을 위해 노심초사한 정하상 성인은 북경을 일 년에 두 번 간 적도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정하상 성인은 1814년에 비로소 북경을 다니기 시작하였는데 제5차 북경방문 때 선교사 파견을 약속받았고 선교사가 1817년에 조선 입국을 시도하였다면 정하상 성인과는 그 이전에 이미 약속이 이루어졌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1814년부터 1817년 이전까지 3년도 안 되는 기간 동안 8~9차례나 북경을 방문하였다는 이야기이다. 이런 사실을 볼 때 결국 정하상 성인은 성직자 영입을 위해 3년 동안 1년에 2~3차례 이상이나 북경을 다녀오는 초인적인 노력을 기울였던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첫 번째 시도는 실패하였고 정하상 성인의 성직자 영입 노력은 1834년에 가서야 첫 결실을 얻을 수 있었다. 중국인 여항덕(余恒德, 파치피코, 1795-1854) 신부가 입국한 것이다. 정하상 성인은 그 후에도 유진길(劉進吉, 아우구스티노, 1791-1839) 성인과 조신철(趙信喆, 가롤로, 1795-1839) 성인의 도움을 받아 성직자 영입 운동을 계속하였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는 정하상 성인의 결안(結案)에 이렇게 쓰여 있다.

수만리 이역의 양인(洋人)을 맞아들여 사부(師父)와 주교(主敎)로 모시고 은밀히 관계를 맺을 복심(腹心)을 품고 3년 동안 이일에 힘써 왔으며 유진길, 조신철을 자신의 사환으로 부리고 사학의 와굴 (窩窟) 을 점차 불려나갔으며 …

즉 정하상 성인이 서양 선교사를 영입하여 3년 동안을 그들과 협력하여 일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유진길 성인과 조신철 성인을 마치 사환처럼 부리면서 천주교 신자들의 수를 불려갔다는 것이다.

정하상 성인이 성직자 영입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교회 지도자로서 그분이 한 일이 그것만은 아니다. 정하상 성인이 국내에 머물 때는 신자들을 돌보는 지도자였으며 대표였다. 이러한 사실은 여러 문헌을 통하여 입증되는데 우선 시복(諡福)을 위해 작성된 시복조서에 이 베드로의 증언이 다음과 같이 수록되어 있다.
 
나와 모든 신자들이 증언할 수 있는 바이지만, 그는 참으로 덕성스럽고 굳세었으며 충직한 사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교리에 무척 밝고 놀라울 정도로 열심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그의 이러한 재능과 덕 때문에 신자들은 그를 진정으로 장상(長上)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정하상 성인이 재능과 덕이 많아 신자들이 정하상 성인을 지도자로 받아 들였으며 그를 진정으로 신자 대표로 생각하였다는 것이다. 《기해일기》에서는 정하상 성인의 신앙생활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봉재(封齋) 외에 40일 엄재(嚴齋)를 하여 고극(苦克)하기를 힘쓰며 왕왕히 또 첨례 육(六)에 대재(大齋) 하며 집이 가난하나 가용(家用)을 존절(?節)하여 애긍을 즐겨하며 애주애인의 정성이 간절하여 힘써 교중 모든 일을 지휘 정당함이 많더니…

그러니까 정하상 성인은 사순시기 외에도 40일 동안 재를 지켰고, 고통을 잘 극복하였으며, 매월 첫 금요일에는 대재를 지켰다는 것이다. 그리고 가난하였지만 씀씀이를 아껴 나누기를 즐겨하였고, 주님과 사람들을 사랑하고 정성을 다하여 신자들을 돌보고 지휘하였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정하상 성인은 외적인 일에만 힘쓴 것이 아니라 기도하고 덕을 쌓는데 열심이었고 이웃에게 사랑을 베푸는 등 자신의 신앙을 실천하는데도 큰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정하상 성인의 이러한 삶은 신자들이 정하상 성인을 지도자로 삼고 그를 따르도록 하기에 충분하였던 것이다.

실제로 우리나라 최초의 방인 사제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1821-1846) 신부의 아버지 김제준(金濟俊, 이냐시오, 1796-1839) 성인은 자신이 회개하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게 된 동기가 정하상 성인의 권고 덕이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저의 백부께서 일찍이 천주학을 배웠으므로 저도 역시 이를 믿다가 신유박해 시에 나라의 금령이 지엄하여 다시 학습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후 정하상이 제게 권하여 다시 배우게 하였으므로 저는 1년에 여러 차례 정하상의 집에 왕래하며 수계(受戒)하였습니다.

* 윤민구 도미니코 신부 - 1975년 가톨릭대학교를 졸업하고 사제로 서품되었다. 이탈리아 로마에 유학하여 1983년 라떼란대학교에서 사목신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2003년까지 수원가톨릭대학교에서 강의하였다.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사무차장으로 일하였고 안성 대천동, 성남 수진동, 이천, 분당 야탑동성당 주임신부를 지낸 후 현재 손골성지 전담신부를 맡고 있다.

[외침, 2014년 3월호(수원교구 복음화국 발행), 윤민구 도미니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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