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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ㅣ순교자ㅣ성지

[성인] 성년광익과 성인 공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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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3-26 ㅣ No.1460

[특별 연재] 이 시대, 순교신심에서 길을 찾다


《성년광익》과 성인 공경



삶의 푯대를 상실한 현대인들은 인문학, 심리학, 과학의 문을 서성이며 길을 찾고 있다. 여기, 한평생 순교신심을 연구해온 손골성지 윤민구 신부는 신앙의 유산이 담긴 순교신심에서 삶의 방향키를 찾아 우리에게 들려준다. 올해는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의 시복이 이뤄진 기쁨의 해이다. 우리나라의 성인 공경은 중국에서 들여온 《성년광익》을 통해 시작되었다.


지난 8월 16일 우리나라를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한국천주교회가 요청한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의 시복(諡福)식을 거행하셨다. 교황께서는 시복식을 통해 우리나라 124위 순교자들을 복자명부에 올리고 정성되이 공경하라고 명하셨다. 참으로 감격스럽고 뜻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는 언제부터, 어떻게 성인들을 공경해왔을까? 이 물음에 답부터 말한다면 우리나라에서 천주교회가 시작된 그때부터 아주 열심히 성인 공경을 하였고 그 전통이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성년광익》이라는 책이 있다. 《성년광익》은 중국에서 활동하던 프랑스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 마이야(Mailla, 馮秉正, 1669-1748) 신부가 쓴 책으로서 교회 전례력에 따라 기념하는 성인(聖人)들과 그 행적을 소개한 후 묵상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묵상서이다. 성인들에 대해 소개하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때로는 전례력의 중요한 시기를 설명하기도 하는데 1738년 처음 출간되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도 도입되어 신자들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그러면 《성년광익》을 누가, 언제 우리나라에 들여왔을까? 아마도 1784년 초에 이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은 후 가지고 온 책들 중에 포함되었을 것 같다. 달레(Ch. Dallet) 신부는 《한국천주교회사》를 쓰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갑진년(1784) 봄에 이승훈 베드로는 북경에서 얻은 많은 책과 십자고상과 상본과 몇 가지 이상한 물건을 가지고 서울로 돌아왔다. 그에게 제일 급한 것은 이벽에게 자기 보물의 일부를 보내는 것이었다 …(중략)… 이벽은 친구가 보내 준 많은 서적을 받자마자 외딴 집을 세내어 그 독서와 묵상에 전념하기 위하여 들어앉았다.

이제 그는 종교(천주교)의 진리의 더 많은 증거와, 중국과 조선의 여러 가지 미신에 대한 더 철저한 반박과, 7성사의 해설과, 교리문답과 복음성서의 주해와 그날 그날의 성인행적과 기도서 등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을 가지고 그는 종교(천주교)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전체적으로 또 세부적으로 대강 알 수 있었다. 그러므로 책을 읽어나가는 데 따라서 새로운 생명이 자기 마음 속에 뚫고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이승훈은 조선에 돌아온 즉시 이런 책들을 이벽에게 보여주었다. 그러자 이벽은 외부와 일체 단절한 채 몇 날 며칠을 그 책들을 읽는 데만 몰두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그런 책들을 통해 비로소 천주교가 어떤 종교인지 그 전체 윤곽을 ‘대강’이나마 알 수 있게 되었다. 달레가 전하는 “그날 그날의 성인행적”이 적힌 책은 《성년광익》일 것이다.

이렇게 우리나라 천주교회 신자들은 이승훈 때부터 가지고 있던 《성년광익》을 읽음으로써 성인들이나 순교자들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성인들에 대한 공경을 잘 해왔다. 그것은 그들이 세례명을 선택하는 것에서부터 드러난다.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에서는 이벽, 권일신, 정약종 등 초기교회의 평신도 지도자들이 세례명을 택한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그 무렵 북경에서 영세한 이승훈 베드로가 이 성사를 이벽과 권일신에게 주었다. 세례명 선택은 되는 대로 한 것이 아니었다. 이벽은 조선의 개종사업을 시작하여 구세주가 오시는 길을 준비하였으므로 세례명을 세례자 요한으로 하였고, 권일신은 복음 전파에 헌신하기로 결심하고 동양의 사도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을 주보로 하여 그를 모범으로 삼고 그를 보호자로 모시기로 하였다.

천주교가 조선에 전파되자 정약종은 곧 그것을 배웠다. 그러나 즉시 따르지는 않았다. 그는 이벽이 참된 길에서 벗어나고 있다고 자주 뇌었고, 4 · 5년 뒤에야 비로소 은총의 권유에 순종하였다. 그리고 자기가 그렇게 주저한 것에서 아우구스띠노 성인의 망설임과 비슷한 점을 발견하고, 영세할 때에 이 성인을 주보로 삼기를 원하였다.

아마도 이승훈에게는 세례를 준 그라몽(J.J. De Grammont, 1736-1812?) 신부나 북경에 있던 선교사들이 한국교회의 기초가 되라는 의미에서 베드로라는 세례명을 정해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다른 평신도 지도자들이 세례명을 성인들의 생애에 맞추어 선택한 것을 보면 우리나라 교회 초창기부터 성인이나 순교자들에 대한 공경이 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성인 공경은 우리나라 순교자들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던 것 같다.

《죄인지츙일기》라는 것이 있었다. 신해박해(1791) 때 순교한 윤지충(尹持忠, 바오로, 1759-1791)이 체포되어 심문 받은 내용과 과정 등을 적은 공술기(供述記)다. 그런데 이 자료가 신유박해(1801) 때 윤현(尹鉉)의 집에서 압수한 책들 가운데 나타난다. 윤현은 윤유일(尹有一, 바오로, 1760-1795) 순교자의 삼촌이다. 이런 사실은 초기교회 신자들이 성인 공경뿐 아니라 우리나라 순교자들에 대한 관심도 컸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리고 성인이나 순교자들을 잘 공경하는 이러한 전통은 황사영(黃嗣永, 알렉시오, 1775-1801)이 신유박해 때 쓴 《백서》에서 잘 나타난다. 황사영은 신유박해로 인해 순교한 교회지도자들의 삶과 그들의 순교과정을 비단천 위에 깨알 같은 글씨로 써서 북경교회에 알리려고 하였다.

조선 천주교 신자들의 순교자 공경 전통은 그 후 《신미년(1811) 편지》에서도 잘 드러난다. 신유박해가 끝나고 10년 뒤인 1811년에 조선신자들이 북경주교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그 중 많은 부분이 신유박해 때 순교한 분들에 대한 보고로 이루어져 있었던 것이다. 조선 신자들은 신유박해 때 순교한 대표적 인물 6분(강완숙, 윤점혜, 이순이, 최필공, 정약종, 황사영)을 소개한 후 그들의 신앙생활과 순교과정에 대해 자세하게 보고하였다. 그런 다음 신유박해 때 순교한 그 이외의 신자들의 명단을 대단히 자세하게 알리며 보고하였다.

그리고 신자들은 기해박해(1839)와 병오박해(1846) 후에도 《기해일기》를 통해 순교자들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기해일기》에는 기해박해 순교자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1821-1846) 신부님을 비롯한 병오박해 순교자들에 대한 기록도 있다.

100여 년 동안 이어져 온 극심한 박해 속에서도 조선천주교회가 스러지지 않고 면면히 이어져갈 수 있었던 데에는 이렇게 힘든 가운데서도 노인부터 어린아이에 이르기까지 성인들을 잘 공경하는 전통을 따르며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려고 안간힘을 썼던 신자들의 노력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대(代)를 이어가며 전해진 신앙의 전통이 있었기에 대(代)를 이은 순교가 가능할 수 있었다.

이제 한국천주교회는 103위 성인 뿐 아니라 124위 복자(福者)를 모시게 되었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속담이 있다. 훌륭한 신앙의 선조들을 모시고 있지만 후손들이 그분들을 제대로 알고 공경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오늘부터라도 성인들과 복자들 한 분 한 분에 대해 공부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분들을 사랑하고 본받으려 할 때 우리는 순교자들을 닮게 될 것이고, 순교자들과 함께 주님을 닮게 될 것이다.

요컨대 한국천주교회는 그 초기부터 성인들을 잘 공경하며 출발하였으니만큼 그 전통을 이어 오늘을 사는 우리들도 우리나라 성인들과 복자들부터 잘 공경하는 후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 윤민구 도미니코 신부 - 1975년 가톨릭대학교를 졸업하고 사제로 서품되었다. 이탈리아 로마에 유학하여 1983년 라떼란대학교에서 사목신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2003년까지 수원가톨릭대학교에서 강의하였다.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사무차장으로 일하였고 안성 대천동, 성남 수진동, 이천, 분당 야탑동성당 주임신부를 지낸 후 현재 손골성지 전담신부를 맡고 있다.

[외침, 2014년 9월호(수원교구 복음화국 발행), 윤민구 도미니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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