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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극ㅣ영화ㅣ예술

가톨릭 예술가 이야기: 윤정희 데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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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07-25 ㅣ No.84

[백형찬의 가톨릭 예술가 이야기] (29) 윤정희 데레사 (상)


은막의 스타 윤정희, 가톨릭 영화에서 빛나다

 

 

하느님의 은총… 한센병 환자 돕는 일 나서

 

윤정희(데레사, 尹靜姬, 1944~2023)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그녀가 가톨릭 신자가 된 것은 중학생 때였다. 그녀의 집안은 할아버지 때부터 독실한 가톨릭 신자 집안이었다. 그래서 본당에서 레지오 마리애 활동도 열심히 했다. 남편인 피아니스트 백건우(요셉마리)도 신자이며 딸도 세례를 받았다. 윤정희는 자신의 데뷔작 ‘청춘극장’의 ‘1200 대 1’ 오디션을 뚫은 비결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된 것 같다”고 했다.

 

오디션을 보기 전에 명동대성당 주임 신부를 찾아갔다. 윤정희가 물었다. “영화배우를 해도 될까요?” 신부가 대답했다. “네가 부끄럽지 않은 자랑스러운 배우가 된다면.” 이 말은 윤정희가 은막의 스타가 되는 데에 큰 힘이 되었다. 윤정희는 아무리 바빠도 가톨릭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경기도 안양에 있는 라자로 마을에서 한센병 환자를 돌보고 있는 이경재 신부를 돕기 위해 ‘라자로 돕기회’라는 후원회가 만들어졌다. 후원회를 주도한 가톨릭 신자는 윤정희를 비롯해 김남조(시인), 전봉초(음악가), 신태민(언론인) 등이었다.

 

이들은 이경재 신부의 뜻을 받들어 병고와 외로움에 힘들어하는 한센병 환자들을 돕는 일에 앞장섰다. 그리고 윤정희는 가톨릭 저널리스트 서울클럽이 주최한 명동성당 문화관 자선쇼에 가톨릭 신자 연예인인 이낙훈, 여운계, 하춘화, 한상일, 양희경, 이상룡 등과 함께 출연했으며 또한 한국가톨릭연예인협회 이사직을 맡아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윤정희는 자신이 가톨릭 신자임을 나타내기 위해 오른손에 늘 세례 반지를 끼고 다녔다.

 

- 이경재 신부와 윤정희 배우

 

 

당대 최고의 여배우

 

윤정희의 본래 이름은 손미자이다. ‘윤정희(尹靜姬)’는 자신이 직접 지은 이름이다. ‘청춘극장’ 오디션을 앞두고 지었다. 배우가 되더라도 고요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에 ‘고요할 정(靜)’에 ‘여자 희(姬)’로 이름을 지었다. 성은 조선의 마지막 황후 윤비를 생각해서 ‘윤(尹)’으로 했다. 윤정희는 경남 부산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와세다 법대를 나온 엘리트로 부산에서 신문기자로 있었다. 그녀는 어린 시절을 부산에서 지냈고 전남 광주에서 청소년기를 보냈다. 문학작품을 무척 좋아해 소설을 밤새워가며 읽었다. 그래서 후에 문학작품이 원작인 영화에 많이 출연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녀는 전남여중과 전남여고를 거쳐 조선대 영문학과에 진학했다. 다시 우석대 사학과로 편입해 졸업했다. 대학 재학 중에 미스 코리아 선발대회에 참가해 미스 전남 미에 당선되기도 했다. 바로 그때 ‘청춘극장’의 여주인공이 되었다. 남자주인공은 당대 최고의 배우인 신성일이었다. 이 영화는 흥행에 크게 성공했다. 그리고 윤정희는 그해 대종상 신인상과 청룡영화제 인기상을 휩쓸었다. 윤정희는 ‘청춘극장’ 단 한 편으로 스타가 되었다. 그리고는 문희, 남정임과 함께 트로이카를 이끌었다.

 

윤정희는 50여 년 동안 300여 편의 영화에 출연했고, 29회에 걸쳐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또한 한국의 3대 영화제인 청룡상, 대종상, 백상예술대상에서 세 번씩이나 주연상을 받았다. 윤정희가 주연한 영화는 언제나 대성황이었다. 어느 해는 윤정희가 주인공인 영화 다섯 편이 동시에 개봉되기도 했다. 윤정희는 카이로국제영화제에서 리처드 기어와 함께 ‘평생공로상’을 수상했고, 전미비평가협회가 뽑은 ‘세계 여배우 2위’에 선정되기도 했다. 윤정희와 가장 많은 영화를 촬영한 신성일은 윤정희를 이렇게 기억했다. “나와 함께 가장 많은 작품을 한 여배우는 윤정희다. 무려 99편에 함께 나왔다. 엄앵란 다음으로 내 속내를 터놓을 수 있는 여배우다. … 윤정희는 타고난 자연미 덕분에 보는 이를 편안하게 해주는 캐릭터였다. 학구적이면서도 철이 든 배우였다. 촬영장에서도 미심쩍은 부분이 있으면 책을 찾아가면서 확인했다.”

 

 

공부하는 연기자

 

나는 어렸을 때 인천의 시민관과 애관극장에서 윤정희가 주연인 영화를 많이 보았다. 포스터와 극장 간판에 그려진 윤정희의 얼굴이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다. 윤정희가 나오는 영화는 무조건 보러 갔다. 기억나는 영화가 있다. 황순원 원작의 ‘독 짓는 늙은이’이다. 배우로 윤정희와 함께 황해, 남궁원, 허장강, 김희라, 김정훈(아역)이 나왔다. 이 영화는 ‘미성년자관람불가’였는데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황해가 독 짓는 늙은이의 역할을 했다. 그 강렬한 표정과 목소리는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윤정희는 그의 젊은 부인이었다.

 

윤정희는 공부하는 연기자였다. 그녀의 원래 꿈은 교수나 외교관이 되는 것이었다. 미국 유학을 꿈꾸며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하기도 했다. 그녀는 한국 최초로 석사 학위를 취득한 여자 배우였다. 중앙대 대학원에서 ‘영화사적 측면에서 본 한국 여배우의 연기’라는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학위를 받던 날에 황정순을 비롯한 원로 여배우들이 ‘경사’라며 졸업식장을 찾아 축하해주었다. 그 후에 윤정희는 프랑스 파리로 유학 가기로 결심했다. 서강대 프랑스어 교수를 찾아가 어학 교습도 받았다. 영화이론을 전공하기 위해 소르본느 대학(파리 제3대학)을 택했다. 그 대학에서 학사학위와 석사학위 과정을 마쳤다. 석사학위 논문은 ‘영화 속에 비친 한국 여인상에 대한 고찰’이었다.

 

영화 '새남터의 북소리' 중 한 장면

 

 

가톨릭 영화

 

윤정희는 일찍이 가톨릭 영화의 주인공으로 출연했다. 그 첫 번째 영화가 ‘새남터의 북소리’이다. 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천주교 박해가 극심했던 조선 말엽이다. 영의정의 서자로 태어난 민서(남궁원)는 소문난 한량이다. 어느 날, 다련(윤정희)이라는 여성을 보고 마음에 깊이 넣어두었다. 민서는 다련이 천주교 신자라는 것을 알게 된다. 다련은 미사를 봉헌하던 중에 포졸들에게 발각되어 포도청으로 끌려간다. 다련은 그곳에서 온갖 고문을 당한다. 민서는 포도청으로 들어가 다련을 구해 도망간다. 그러나 민서와 다련은 체포되고 만다. 그 둘은 새남터로 끌려가 형장에서 순교한다. 영화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은 민서가 포졸들에게 끌려가는 수레 앞에서도 신부에게 세례받는 장면이다. 이 영화의 감독과 배우는 가톨릭 신자였다. 최하원 감독도 신자이고 윤정희, 이낙훈, 김성원도 모두 신자였다.

 

이 영화에 대한 감동적인 일화가 전해진다. 고문 장면을 촬영하는데 고문은 학춤이므로 배우가 거꾸로 매달려 있어야 했다. 학춤은 죄수의 옷을 벗기고 양팔을 등 뒤로 젖혀 묶은 뒤 공중에 매달아 놓고 때리던 형벌이다. 허공에 매달린 모습이 학이 춤추는 모습과 비슷해 학춤이라 한 것이다. 윤정희는 철봉에 거꾸로 매달려 무려 10분을 있었다. 피가 솟구쳐 숨을 못 쉬겠다고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윤정희는 굳건한 신앙심으로 그 힘든 역할을 기어이 해내고 말았다.

 

또한 새남터 형장을 촬영할 때 엑스트라가 600명이 필요했다. 당시 그러한 인원을 모은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기적과 같이 대방동과 당산동본당의 신자들이 자진 참여해 촬영을 무사히 끝낼 수 있었다. 김수환 추기경은 어린이회관에서 개막된 시사회에 참석해 연기자와 제작진을 따뜻하게 격려해주었다.

 

한국가톨릭연예인협회에서 선교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목소리’라는 영화를 만들었다. 6·25 전쟁 당시 명동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원에 인민군이 주둔해 종교적 탄압을 가하는데, 수난받는 성직자와 수도자를 통해 가톨릭 신앙의 본질적 의미를 깨닫게 해주는 영화이다. 윤정희, 박노식, 이낙훈, 여운계, 김성옥 등 가톨릭 신앙을 가진 배우들이 총출연했다. 배우들은 출연료를 받지 않았다. 윤정희는 영화 속에서 동정녀 수임 역할을 맡았다. 물론 감독인 김영걸도 신자였다. 영화 제작 전에 연기자와 제작자가 모두 명동대성당에 모여 함께 미사를 봉헌했다. 당시 영화계의 관행은 돼지머리를 놓고 고사를 지내는 것이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3년 7월 23일, 백형찬(라이문도, 전 서울예대 교수)]

 

 

[백형찬의 가톨릭 예술가 이야기] (30) 윤정희 데레사 (하)


이전에도 이후에도 윤정희만한 배우는 없다

 

 

프랑스 북부 해변 도시에서 윤정희 배우.

 

 

한국의 ‘오드리 헵번’

 

윤정희(데레사, 尹靜姬, 1944~2023)는 리즈 시절에 ‘한국의 오드리 헵번’이라 불렸다. 윤정희는 외국영화에 단 한 번도 출연한 적이 없다. 외국영화사에서 일본인 또는 중국인 역을 맡아달라는 제의가 있었는데 모두 거절했다. 이유는 연기자는 자신이 맡은 역에 철저히 책임을 져야 하는데 문화가 다른 외국인 역을 맡으면 그 역을 철저히 해낼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연기자의 역할에 대해서 고지식했다.

 

윤정희 부부가 에펠탑 근처 샤요궁 현대미술관에 전시를 보러 갔다가 우연히 프랑스 배우 알렌 퀴니를 만났다. 그는 당시 프랑스의 최고 남자 배우였다. 그 배우는 전혀 모르는 윤정희를 발견하고는 다가와 말을 걸었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길 원해 소르본느 대학 근처 카페로 갔다. 자신이 10년 동안 구상한 영화가 있는데 여주인공 역을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윤정희를 처음 본 순간 동서양의 매력을 동시에 지닌 여성이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물론 그 배우는 윤정희가 한국의 유명한 배우라는 것을 전혀 모르고 한 말이었다. 윤정희는 그 제안에 정중히 거절했다. 그리고 윤정희는 브래드 피트가 주연인 영화 ‘티벳에서의 7년’에 어머니로서 출연을 제의받기도 했다. 윤정희는 영광스럽게도 프랑스 정부로부터 문화예술 공로 훈장인 ‘슈발리에 훈장’을 받았다. 이 훈장은 문학과 예술 분야에서 업적을 남긴 외국인에게 수여하는 상이다.

 

 

평생의 반려자 백건우

 

독일 뮌헨에서 올림픽 문화축전이 열렸다. 윤이상이 작곡한 오페라 ‘심청’이 공연되었다. 그런데 같은 장소인 뮌헨에서 우리나라 영화 ‘孝女 淸이’가 상영되었다. 윤정희는 그 영화에 출연했고, 신상옥은 감독을 맡았다. 두 사람은 주최 측의 초청으로 뮌헨에 왔다. 윤정희는 시간을 내어 윤이상의 오페라를 보러 갔다. 그런데 좌석을 찾기가 어려웠다. 그때 착한 모습의 한국 청년이 친절하게 안내해주었다. 그 청년은 공연이 끝난 후 뒤풀이하는 장소에서 윤정희에게 꽃 한 송이를 건네주었다. 그가 바로 백건우였다. 미국 뉴욕에서 공부하던 백건우는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 공연하러 왔다가 친한 사이였던 윤이상의 오페라 공연을 보려고 뮌헨에 온 것이었다.

 

그로부터 2년 후에 윤정희는 파리로 유학을 왔다. 어느 날 중국인 친구와 허름한 식당에 식사하러 갔다가 그곳에서 다시 백건우를 우연히 만났다. 백건우는 식사하러 막 들어오고 윤정희는 식사를 끝내고 막 나가려던 참이었다. 그것은 운명이었다. 당시 윤정희는 한국 최고의 영화배우였고, 백건우는 유망한 피아니스트였다. 윤정희는 백건우를 평생의 반려자로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파리에 사는 한 한국인 원로 화가의 집에서 조촐하게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 예복은 한복이었고, 신부 화장은 윤정희가 혼자서 했다. 예물도 실반지 한 쌍이 전부였다. 신혼집은 파리 몽마르트르 언덕의 작은 아파트였다. 결혼한 이듬해에 일명 ‘윤정희-백건우 부부 납북 미수 사건’이 일어났다. 부부는 당시 공산 국가였던 유고슬라비아의 자그레브로 연주하러 갔다. 그곳 공항에서 북한으로 납치될 뻔한 것이다. 간신히 미국 영사관으로 탈출했다. 이 사건은 윤정희 부부가 파리 주재 한국대사관에서 탈출 과정을 밝히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 1998년 6월 ‘명동 평화의 집’을 돕기 위한 백건우 자선 음악회 후 김수환 추기경과 함께한 윤정희·백건우 부부.

 

 

연주 여행은 성지순례

 

윤정희 부부는 세계 곳곳에서 이어지는 연주회가 끝나면 제일 먼저 성당을 찾았다. 그들 부부에게는 연주 여행이 곧 성지순례였다. 그들은 여행할 때마다 루르드 성지의 ‘기적의 물’과 「묵주의 9일 기도」 책을 갖고 다니며 기도했다. 윤정희는 백건우가 연주할 때면 늘 기도했다. 사람들은 백건우를 ‘건반 위의 구도자’라고 부른다. 이에 대해 백건우는 “음악을 하다 보면 하느님의 힘이 존재한다고 느낄 때가 많습니다. … 음악은 하느님과 가장 가까운 언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종교인들이 보기에는 ‘신’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저는 무대에 오르기 전에 꼭 기도합니다. ‘오늘 이 무대를 내 힘만으로는 완성할 수 없으니 하느님께서 끝날 때까지 도와 달라’고 말이죠. 늘 성수와 십자가를 지니고 다니기도 하고요. 무엇보다 모든 곡을 하느님께 바치는 마음으로 연주합니다.” 백건우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집전한 124위 시복식에서 프란츠 리스트의 ‘새들에게 설교하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를 연주했다.

 

 

따뜻한 인간미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윤정희는 신성일과 수많은 영화에 출연했다. 신성일은 정치에 입문해 국회의원이 되었다. 그는 국회의원을 마친 후에 뇌물수수 혐의로 2년 동안 감옥에서 복역했다. 그때의 일화이다. 윤정희 부부는 베토벤에 관한 책을 사 들고 교도소로 면회를 갔다. 신성일에게 베토벤 책을 선물한 까닭은 베토벤만큼 인생에서 고통을 많이 받은 사람이 없고 자기 의지로 승리한 사람이었기에 베토벤에게 힘을 얻으라는 것이었다. 신성일이 교도소에서 출소할 때 모습은 진짜 베토벤처럼 곱슬머리가 되어있었다. 베토벤처럼 변한 것이다.

 

윤정희의 따듯한 인간미가 담긴 일화가 있다. 1969년 어느 날, 윤정희는 전화 한 통화를 받았다. 전화를 건 사람은 현역 대위로 며칠 전에 베트남에서 귀국했는데 자신의 부하 때문에 전화를 걸었다고 했다. 베트남 전선에서 치열하게 전투를 벌이다가 부하 한 사람이 전사했는데 시신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철모와 주머니에서 온통 윤정희 사진만 나왔다고 했다. 국립묘지에서 거행되는 그 부하의 장례식에 윤정희씨가 꼭 참석해달라는 부탁을 간절하게 했다. 윤정희는 그 이야기를 듣고는 가슴이 아팠다. 그래서 장례식에 참석하겠다고 약속했다. 당시 그녀는 영화 여러 편을 동시에 촬영하고 있어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윤정희는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그 군인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그리고는 그의 유해 앞에서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윤정희가 마지막으로 출연한 영화는 이창동 감독의 ‘시(詩)’였다. 이 감독은 처음부터 윤정희를 주인공으로 생각하고 각본을 썼다. 윤정희는 그 작품을 300여 편의 영화 중에 최고로 꼽았다. 주인공 양미자는 어느 작은 도시에서 중학생 손자와 함께 사는 60대 여성이다. 그녀는 화사한 옷을 좋아하는 소녀 같았다. 우연히 문학 강좌 포스터를 보고 문화원에서 ‘시’ 강좌를 수강한다. 그녀는 시를 쓰면서 그동안 무심히 지나쳤던 것들을 다시 바라보게 된다. 그렇게 아름다움을 하나씩 찾아 나간다. 그런데 예기치 않은 일이 벌어진다. 손자가 저지른 일로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을 받는다. 그 일을 겪으며 현실은 시처럼 아름답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윤정희는 이 영화로 칸 영화제에서 레드카펫을 밟았고, LA비평가협회상 여우주연상을 받는 영예를 얻었다.

 

- 윤정희 배우가 마지막으로 출연한 영화 ‘시’의 포스터.

 

 

꿈꾸듯 편안한 얼굴로 하느님 곁으로

 

윤정희는 오랫동안 알츠하이머병을 앓았다. 그러다가 프랑스에서 세상을 떠났다. 백건우는 “제 아내이자 오랜 세월 대중의 사랑을 받아온 배우 윤정희가 딸 진희의 바이올린 소리를 들으며 꿈꾸듯 편안한 얼굴로 세상을 떠났다”고 고국에 알려왔다. 장례 미사는 파리 인근 뱅센 노트르담 성당에서 봉헌되었다. 장례 미사에 사용된 음악은 백건우가 직접 선택했다. 가브리엘 포레의 레퀴엠 라단조 48-7번 ‘천국에서’라는 아름다운 곡이었다. 한국 영화의 찬란한 별이었던 윤정희는 그렇게 세상과 작별했다. 윤정희가 마지막으로 출연한 영화 ‘시’의 마지막에 이런 시구가 나온다. “어느 햇빛 맑은 아침/ 다시 깨어나 부신 눈으로/ 머리맡에 선 당신을 만날 수 있기를”

 

“윤정희 이전에도 윤정희 이후에도 윤정희만한 배우는 없다.”(시인 서정주)

 

참고자료 : ▲ 동아일보(2023.1.31) ‘故 윤정희, 파리 장례식 현장 어땠나…눈물 흘리는 백건우·위로하는 이창동’ ▲ 월간조선(2023.1.20) ‘윤정희 별세… 여배우 트로이카 이끌었던 톱 여배우’ ▲ 중앙일보(2020.2.18) ‘‘파리의 나혜석’ 윤정희, 루브르박물관서 도둑 촬영’ ▲ 동아일보(2019.1.25) ‘윤정희 최대 노출작 영화 ‘시’ 만든 사람은 감독 아닌 백건우’ ▲ 동아일보.(2019.1.11) ‘“오늘 처음 듣네”…45년간 친구이자 부부, 파트너였는데’ ▲ 신성일. 「청춘은 맨발이다」 문학세계사. 2018 ▲ 가톨릭신문(2017.10.1) ‘피아니스트 백건우(요셉마리)’ ▲ 가톨릭신문(2010.6.20) ‘피아니스트 백건우·영화배우 윤정희 씨 부부’ ▲ 가톨릭신문(2010.5.9) ‘볼만한 새 영화 시’ ▲ 가톨릭신문(1988.6.19) ‘신자 인기인 탐방 배우 윤정희 씨’ ▲ 가톨릭신문(1972.12.25, 4.30, 2.6) ‘새남터의 북소리’ ▲ 가톨릭신문(1971.12.25. 10.31) ‘신앙에 빛 될 「목소리」’ ▲ 가톨릭신문(1971.2.7) ‘라자로 돕기회 발족’ ▲ https://blog.naver.com/oldcine(영화는 인생의 거울)

 

[가톨릭평화신문, 2023년 7월 23일, 백형찬(라이문도, 전 서울예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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