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5일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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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의신학ㅣ교부학

[교회] 어떤, 교회: 차리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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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4-04-24 ㅣ No.813

[어떤, 교회] “차리는 마음”

 

 

최근에 히로세 나나코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책 종이 가위」를 봤습니다. 일본의 ‘명장’ 북디자이너 기쿠치 노부요시의 작업과 삶을 다루는 영화입니다. 요즘은 대부분 컴퓨터 프로그램을 통해 디지털화된 작업으로 책표지를 만들지만, 기쿠치 노부요시는 종이를 직접 구기고 가위로 자르고 붙이면서 수만 권의 책표지를 만들었죠. 글씨체를 고르고 미세하게 위치를 옮기고 다듬는 과정을 숨죽이고 지켜보면 “꼭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지만 “저렇게 책 하나하나 섬세한 손길로 다듬었기에 명장이라는 칭호가 붙었겠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기쿠치 노부요시가 자신의 작업에 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 주는데 그중에서도 ‘코시라에루: 차린다’라는 표현을 하면서 해석을 붙이는 장면이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할머니가 자주 쓰시던 에도 사투리라는데, 명절에 오랜만에 할머니 집에 가면 넘칠 듯 차려 나온 푸짐한 밥상이 생각나지요. 기쿠치 노부요시는 책을 디자인하는 것을 ‘차리는 행위’와 가깝다고 얘기합니다.

 

“할머니가 썼던 말이야.

‘엄마가 없으니까 대신 할미가 점심 차려줄게. 간식 차려줄게’ 식으로,

내 안에 스며든 말이지 ……

누군가를 위해 하는 행위니까, 만드는 건 내가 하지만 타인 없이는 성립이 안 돼.

디자인도 타인을 위한 거야.”

- 영화 「책 종이 가위」 중에서

 

기쿠치 노부요시는 단순히 책의 표지만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글자를 통해 책을 쓴 작가의 마음을 읽고, 그 책을 읽을 독자의 마음을 헤아리면서 책표지라는 하나의 틀이 거기에 가 닿는 모든 마음을 잘 드러내길 바라는 마음으로 차려 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책표지는 거대하고 알 수 없는 언어의 세계로 들어가는 작은 문이 되는 것이죠.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교회를 세우셨고, 그 안에 말씀과 성체(성혈)의 식탁을 차리셨지요. 우리를 사랑해서 십자가에서 온전히 죽으셨고, 우리를 사랑해서 말씀과 성체의 밥상을 차리신 예수님의 마음이 전례라는 형식을 통해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전례는 타인을 위한, 모두를 위한 마음을 담아내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처음에 남긴 그 마음이 수천 년 시간이 지나며 여러 형태의 틀을 거치게 되었죠. 전례가 복잡해지고 정형화되고 분위기는 차분해졌습니다. 조용하고 정적이라 좋다는 분도 있지만, 차갑고 흥겹지 않고 지루하다는 분도 있으시죠. 말씀의 식탁에서 말씀을 풀이하는 강론과 성체성혈의 식탁을 차리는 일은 온전히 사제에게만 그 권한이 있습니다. 교우들은 정해진 형식의 응답을 소리내어 말하면서 전례에 참여합니다. 사실 ‘참여’, ‘참례’한다고 말하지만 교우들 대부분은 미사를 ‘본다’라고 말하죠. 우리의 미사는 함께 밥상을 차리고 함께 각자 자기의 이야기를 말하고 듣는 게 아니라 ‘보는 것’이 되었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가 사랑해서 세운 교회, 사랑해서 차린 말씀과 성체의 밥상을 우리는 어떻게 차려 내고 있는지 돌아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조금 더 서로의 마음을 담아 주님을 위해 밥상을 차릴 수 있는 교회가 되어 간다면 어떨까요. 누군가 차려 놓은 밥상이 아니라 미사(성사)에 참여한 모든 사람이 더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자기의 마음과 진솔한 이야기를 차려 낼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교회가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미사 전례 중에 제단에 빵과 포도주를 바치고 사제가 예물기도를 올린 후에 감사기도를 바치는 부분을 좋아합니다. 사제가 “마음을 드높이” 하면 교우들은 “주님께 올립니다.” 하고 응답하죠. 이천여 년 전 우리를 사랑해서 이 땅에 내려와 사람이 되신 말씀, 우리를 사랑해서 온전히 죽어 남겨 준 주님의 몸과 피, 그렇게 차려 놓은 당신의 사랑을 이제는 마음을 다해 우리가 주님께 올리는 일을 합니다. 그 거룩한 일이 모두의 마음과 삶의 진솔한 이야기를 담을 수 있는 일이 되기를 바라봅니다. 

 

[월간빛, 2024년 4월호, 박태훈 마르티노 신부(성김대건성당 보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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