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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일본 나가사키 순례기: 평화를 외치는 땅, 나가사키를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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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1-02-04 ㅣ No.898

[일본 나가사키 순례기] 평화를 외치는 땅, 나가사키를 가다

 

 

연평도 사건이 일어난 바로 다음 날(11월 24일)이다. 일본 가톨릭교회의 박해와 순교 역사에 원폭 피해의 아픔까지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땅, 나가사키를 순례하게 되었다.

 

한반도 평화를 위한 기도가 더욱 절실한 때라 그 의미가 더욱 깊게 다가왔던 4일간의 여정이었다.

 

 

그리스도교의 일본 전파와 거센 박해

 

일본은 한국보다 235년이나 먼저 복음의 씨앗이 뿌려졌다. 1549년 선교의 수호성인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먼 바닷길을 건너 가코시마에 첫발을 디뎠고, 1550년에는 히라도 섬으로 건너와 일본인들에게 세례를 주고, 첫 신자 공동체가 탄생하였다. 이후 나가사키 땅은 그리스도교 전파의 본거지가 되어 많은 성당과 신학교가 세워지는 등 번성하였다. 그러나 이도 잠시 1587년 외국인 선교사 추방령을 시작으로 1614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금교령이 내려지면서 기나긴 박해의 시기에 들어간다. 이를 증명하듯 나가사키 곳곳에서는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목숨을 잃은 순교터가 존재한다.

 

일본 최초의 순교자인 26성인은 예수님처럼 모욕과 멸시를 받고 십자가 위에서 창에 찔려 많은 이가 지켜보는 가운데 니시자카 언덕에서 순교했다. 26성인 기념비가 시성 100년 뒤 그 순교터에 세워졌다. 하늘을 응시하고 있는 간절한 눈과 굳게 합장한 손, 성인들은 그 이후 펼쳐질 기나긴 박해를 예감했을까?

 

금교령이 내려진 뒤, 추방되었다가 다시 일본 땅에 숨어 들어온 카미로 콘스탄츠오 신부는 많은 선교사가 드나들었을 히라도 해협이 내려보이는 곳에서 화형을 당했다. 그의 순교비는 그를 이곳 일본 땅으로 인도했을 하비에르 성인의 기념성당과 마주하고 서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의 부활신앙을 두려워하여 순교자의 머리와 몸통을 따로 묻은 곳인 쿠비즈카와 도오즈카, 헤엄치지 못하도록 열 손가락을 모두 잘라 차가운 바다에 던졌다는 시마바라 순교지는 모두 평화로운 시골 마을에 있다. 시마바라 순교지에 서니 이토록 눈부시게 아름다운 바다가 순교자들이 손가락 잘려 허우적거렸던 그 참혹한 순교터였다는 사실과 도저히 합쳐지지 않았다.

 

 

일본 땅에서 만난 조선 신자들

 

순례를 하면서 일본 그리스도교 역사 속조선 신자들의 존재를 드문드문 만날 수 있었다. 임진왜란 때 일본에 끌려가 포로생활을 하다가 세르게이라 주교의 인신매매 금지로 해방된 조선인들은 1610년에 성 라우렌시오 성당을 세우고 함께 모여 신앙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박해 때 성당이 파괴되고, 지금은 ‘고려교’ 다리만이 남아있지만, 2010년 8월 10일 나가사키 교구는 한국의 주교와 신자들을 초청하여 라우렌시오 성당 400주년 기념행사를 가졌다.

 

일본 땅에서 박해받는 사람 가운데서도 더 박해받는 신분이었던 우리 조상들이, 이때 이미 복음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이 감격스럽게 다가왔다. 일본의 393위 복자가운데 지금까지 밝혀진 조선인 순교자는 15명이다. 호오코 바루 순교지에서는 한글로 쓰인 13명 순교자의 순교 현양비를 만날 수 있다.

 

 

숨어서 지킨 신앙이 다시 피어나다

 

일본 교회에는 한국 교회에 없는 독특한 역사가 있다. 바로 250여 년간의 ‘잠복기간’이다. 마음속으로 통곡하며 ‘후미에’(천주교 신자를 색출하려고 성모 마리아나 그리스도의 성상을 밟고 지나가게 한 방법)를 해야 했던 신자들은 불교도로 위장한 채 산속이나 외딴 섬에 모여 신앙을 유지하고 전수하였다.

 

히라도 섬과 연결되어 있는 이키츠키 섬에서 이들 ‘가쿠레 기리시탄(잠복 그리스도인)’의 흔적을 접할 수 있다. 시마노야카타 박물관에는 이들이 250년간 몰래 숨어 바친 ‘오라시오’가 계속해서 흘러나온다. 이는 라틴어 기도문이 7세대를 내려오는 동안 변형된 것으로 이제는 더 이상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되어버렸지만, 발각되면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 속에서도 자녀들에게 세례를 주고, 함께 기도를 바쳤던 간절함이 묻어난다.

 

이들은 박해가 끝나고 대부분 가톨릭교회로 왔지만, 몇몇은 언제 박해가 다시 닥칠지 모른다며, 또 자신들을 보호해 준 절을 버릴 수 없다며 그대로 남았다. 이 소수 공동체가 이키츠키 섬을 비롯한 몇몇 지역에 여전히 존재한다. 가쿠레 기리시탄이 있었기에 박해가 끝나고 그리스도교가 부활의 꽃을 활짝 피울 수 있었지만, 지금은 토속신앙과 불교와 혼합된 형태로 가톨릭교회와는 다른 길을 걷고 있음은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오늘날에는 가톨릭과 가쿠레 기리시탄, 불교도들이 일 년에 한 번 카레마쯔 신사(가쿠레 기리시탄의 전설적 인물인 산 지완을 기리는 곳)에서 공동 기도회를 가지며, 일본 교회에서는 가쿠레 기리시탄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1865년, 외국인들을 위해 지어진 오우라 천주당(일본 국보로 지정)에 10여 명의 가쿠레 기리시탄들이 프치잔 신부를 찾아왔다. 그들은 “당신과 같은 마음”이라며 성모 마리아 상이 어디에 있는지 물었다. 이는 잔혹한 박해의 땅에 남아있으리라 상상하지 못했던 그리스도인들이 처음으로 세상에 드러난 사건[신도 발견]이었다. 이후 1873년 금교령이 철폐되고, 굳었던 나가사키 땅에 그리스도 신앙이 새순처럼 다시 돋아났다.

 

그동안 표현하지 못했던 것을 만회라도 하려는 듯 곳곳에 아름다운 성당이 세워졌다. 조개껍데기를 빻아 반죽한 것으로 벽돌을 이어붙인 타비라 성당, 질이 좋지 않은 나무로 성전을 덮을 수 없다고 하여 신자들이 일일이 나뭇결을 그려 넣은 쿠로시마 섬 성당에는 가난한 신자들의 정성이 고스란히 배어있다.

 

 

80년 뒤에 다시 닥친 참화

 

그러나 신도 발견으로부터 꼭 80년 뒤 나가사키 땅에는 또 다른 엄청난 시련이 불어 닥친다.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인 1945년 8월 9일 11시 2분, 원자폭탄이 나가사키 한복판에 떨어진 것이다. 원폭 중심지에서 500m 떨어져 있던 우라카미 성당에서는 성모승천대축일을 준비하려고 사제 2명과 신자 20여 명이 모여있었다. 이들을 포함하여 신자 8,500여 명이 죽음을 맞았다(나가사키 전체 사망자 73,884명, 부상자 74,909명).

 

우라카미 성당 앞마당에는 검게 그을린 성상들이, 소성당에는 무너진 성당 잔해 속에서 발견한 성모상이 모셔있어 당시의 참혹했던 순간을 증언하고 있다.

 

성당 가까이에 있는 나가사키 원폭 자료관에서 당시의 참상을 더욱 선명하게 체험할 수 있었다. 부서지고 무너진 거리, 피투성이가 된 희생자들의 참혹한 모습에 현기증이 밀려와 오래 있지 못하고 자료관을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언제나 그렇듯 전쟁의 희생자는 힘없고 무고한 사람들이다. 그렇지만 그런 전쟁의 참화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사랑은 또 다시 한 송이 꽃으로 피어났다. 자신도 피해를 당했으면서도 생이 다하는 날까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如己愛人].”는 말씀을 실천한 나가이 다카시 박사의 이야기가 많은 사람의 마음을 울린다.

 

다시 시간을 거슬러 나가사키의 순교자들을 떠올려 본다. 박해라는 엄청난 폭력 앞에 자기 목숨을 내놓는 가장 무력한 방식을 택한 순교자들이야말로 사랑의 꽃, 평화의 증인들이 아니었던가. 하느님은 이 땅에서 침묵하고 계시지 않았다. 순교자와 원폭 피해자의 피가 스민 나가사키의 온 땅이 세상을 향해 전율하듯 외치고 있다.

 

“평화!”

 

[경향잡지, 2011년 1월호, 글 · 사진 이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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