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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마산교구의 순교자 5위: 순교자 신석복 마르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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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07-15 ㅣ No.1312

죽어 영원을 사는 사람들 - 마산교구의 순교자 5위


1. 순교자 신석복 마르코



순교자 신 마르코는 밀양시 하남읍 명례리(明禮里)에서 살았다. 그는 누룩과 소금 행상(行商)을 한 것으로 알려 지고 있는데 원래는 농사를 지었고 장사는 부업이었다.

명례지방은 일찍이 피난 교우들이 모여 살았던 곳이다. 마르코와 그의 가족들은 이들의 권면으로 신자가 된 듯하다. 그의 형제들은 마르코가 순교할 때는 신자가 아니었 고 훗날 모두 입교하였다.

순교자는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대구에서 내려온 포졸들에게 붙잡힌다. 창원 쪽으로 장사 갔다가 돌아오던 길이었다. 함께 갔던 오(吳) 야고보도 체포된다.

『병인치명사적』에 따르면 포졸들은 마르코가 신자인 것을 동네로 잡으러 왔었다. 그러나 장사 나가고 없었기에 포졸들은 며칠을 기다린 뒤 돌아오는 마르코를 길에서 체포한 것이다. 그들은 순교자를 밀양으로 압송한 뒤 하루를 지냈다. 그동안 형제들이 포졸들에게 돈을 주고 빼내려 했지만, 순교자는 완강히 거절했다.

마르코는 대구로 압송되었고 혹독한 심문을 받으며 배교를 강요당했지만,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수차례의 문초와 형벌로 유혈이 낭자하고 뼈가 부러졌다. 그렇지만 마르코는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저를 놓아주신다 해도 다시 천주교를 봉행할 것입니다.” 하고 응답하였다.

이 말에 관장은 화를 냈다. 순교자는 9일간 더 감옥에 있다가 1866년 2월 15일(음) 교수형(絞首刑)을 받아 순교하였다(양력 1866년 3월 31일). 그의 나이는 39세 때였다. 이후 마르코의 가족들이 그의 시신을 찾아다 고향에 안장하였다.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에 의하면 마르코는 김해 사람 김 베드로와 또 한 사람의 김씨와 함께 순교하였고 김씨 부인이 순교 장면을 목격하였다고 증언하고 있다. 한편 치명일기에는 순교자의 이름이 이냐시오로 잘못 기록되어있다. 이냐시오는 마르코의 아들인데 치명일기를 편집하던 과정에서 잘못 전해진 것으로 보고 있다.
 
마르코의 유해는 그의 아들 이냐시오가 돈을 가지고 대구로 가서 모셔왔다. 그러나 명례에는 지방 유지들의 반대로 모시지 못하였고 부득이 낙동강 건너 한림정(翰林亭) 뒷산의 노루목(김해시 한림면 장방리)에 안장하였다. 그 후 진영본당에서는 순교자의 묘소가 야산에 있음을 안타깝게 여겨 본당 공원묘지로 이전하였다(1975년 12월 1일).

순교자의 증손자인 신현기(바오로)의 증언과 일제 강점기의 호적초본을 통해 신 마르코의 속명이 신석복(申錫福) 임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순교자의 후손 중에는 신순균(申順均, 바오로) 신부가 있다. 신 신부는 고성 황리 본당 초대주임으로 마산교구와 인연을 맺었었다. 그러나 1948년 38세의 젊은 나이로 선종했고 현재 대구교구 성직자 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순교자 관계 사료집
치명일기 795, 병인순교자 증언록2번, 병인치명사적 3권, 병인치명사적 18권, 박순집 증언록 3권 34면, 하느님의 종 106(299쪽)

신석복 마르코 순교자 묘소
주소 : 경남 김해시 진영읍 여래리 247(진영성당 공원묘지)
문의 : 055)343-2018

[2014년 7월 6일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가톨릭마산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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