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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 열아홉 살의 아름다운 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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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1-09-23 ㅣ No.180

[해외 한인 공동체 소식]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 - 열아홉 살의 아름다운 청년

 

 

광활한 사바나, 그 속에서 자유롭게 사냥하는 야생동물. 남아프리카공화국(남아공)을 생각하면 누구나 아프리카가 주는 이미지를 떠올린다. 그러나 남아프리카에서 가장 발달한 남아공에서는 오염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위대함을 보려면 국립공원을 찾아야 한다. 남아공을 처음 찾은 사람들은 계획적으로 발전된 도시경관과 유럽풍의 주택을 보고 놀란다. 아프리카의 유럽이라고 불릴 만큼 유럽의 어느 도시를 옮겨다 놓은 느낌이다.

 

남아공은 아프리칸스어, 줄루어, 코사어 등등의 11개 언어가 공식 언어로 지정되어 있을 만큼 다양한 종족과 민족이 어울려 살고 있다. 90%의 부를 10%의 백인이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 부의 편중이 심한 나라이고, 1993년 아파르트헤이트(아프리칸스어로 ‘인종차별’이라는 뜻)가 폐지된 이후로 흑인의 인권신장과 사회적 평등을 위한 혼란스러운 과정을 아직까지 겪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작은 공동체, 큰 신앙심

 

1992년은 남아공에 사는 한인에게는 의미가 큰 해이다. 대한민국과 남아공의 정식수교가 이루어졌으며, 한인회가 구성된 해이기도 하다. 그 다음해인 1993년에는 대여섯 가구의 신자와 예비신자를 중심으로 남아공 천주교 공동체의 태동이 시작되었다.

 

1993년 5월, 프레토리아 신학대학에서 비교종교학을 강의하시던 김보록 바오로 신부님을 모시고 첫 미사를 봉헌하였다. 요하네스버그에서 8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보스코청소년센터를 오가며 드리는 미사였지만 흩어져 있던 교우들을 신앙으로 하나 되게 하기엔 충분했다.

 

1994년 첫 영세를 서막으로 신자 수도 점점 늘어갔다. 2년 남짓, 김보록 신부님과 행복한 신앙생활을 영위하던 중 신부님이 한국으로 귀국하시면서 교우들만으로 공소예절을 거행하게 되었다. 신부님이 계시지 않기에 성체를 모실 수 없었고, 신자수가 점점 늘어감에 따라 가정 공소예절도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우리 공동체의 신앙과 성실함을 하느님께서 알아주신 걸까? 1998년 주님의 도움으로 로즈 뱅크 성당의 교육관을 빌려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2004년 교육관이 매각되면서 또다시 고난을 겪어야 했다. 예수님께서 겪으신 험한 여정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작은 인원의 공동체는 여러 번 고행의 행보를 가야만 했다.

 

그렇지만 신앙의 뿌리가 튼실한 공동체였기에 흩어지지 않고 신앙을 지켜나가는 우리 공동체를 위해 교구에서는 빅토리아파크 성당의 소성당을 사용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희년을 맞으시거나 안식년을 지내시는 신부님, 또는 이곳을 방문해 주신 많은 신부님께서 미사를 함께 봉헌하시고 남아공 공동체를 위해 많은 기도와 격려를 해주셨다. 무엇보다도 뜻깊었던 것은 한국으로 돌아가셨던 김보록 신부님께서 1999년 로즈 뱅크 성당을 방문하시어, 교우들이 성체분배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셨다는 것이다.

 

성체분배 교육을 받고 교우 몇 분은 현지 본당에서 봉사하고, 우리 공동체 공소예절에서도 성체를 분배할 수 있게 되어 신자들이 성체를 모시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

 

 

은인들의 도움, 사랑 나눔과 실천

 

잠비아 탐부에서 선교활동을 하시던 고 유근복 빅토리노 신부님께서 바쁘신 중에도 해마다 두세 차례 방문하시어 세례와 피정을 이끌어주시며 신앙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셨다. 빅토리아 파크 성당의 피존 신부님, 에디 신부님께서도 우리 공동체와 함께 사제는 영어로, 신자들은 우리말로 응송하는 다국적 미사를 집전해 주셨다.

 

또한 지금은 말라위 선교사로 계시는 김청자 교수님과 우리 공동체의 인연도 각별하다. 휴가 때마다 방문하시어 피정을 지도하시며 기쁨과 아픔을 함께 나누는 등 끊임없이 용기를 북돋아주셨다. 그리고 음악가로서 오랜 세월 소중히 간직하시던 오르간을 아낌없이 기증하여 지금도 미사 때마다 장엄한 소리가 울려 퍼진다. 이처럼 남아공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은 많은 사람의 도움과 기도로 건립되었다.

 

남아공을 벗어나면 헐벗고 가난한, 도움의 손길이 절실한 사람들이 있다. 얼마 전 ‘울지마, 톤즈’로 알려진 수단처럼 아프리카에는 알려지지 않은 많은 사제, 수도자, 선교사가 봉사를 하고 있다.

 

이곳 남아공은 아프리카 전역으로 뻗어나가는 거점이다. 남아공을 거쳐 깊은 아프리카 내륙으로 들어가시는 신부님들을 통해 원주민의 안타까운 소식을 전해 듣곤 한다. 잠비아 탐부는 고 유근복 신부님께서 봉사를 하시던 곳이다. 신부님께서 전해주신 소식을 들으며 신자들은 사비를 털어 탐부를 방문하여 봉사를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기도 했다.

 

 

하느님의 성전 건립과 제2의 도약

 

이민 역사도 짧고 신자 수도 적지만, 2002년 월드컵 4강 진출로 대한민국이 뜨겁게 달아오르던 그때 남아공에서는 한인을 위한 성전 건립에 의견을 모았다.

 

2003년 대지 매입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마침내 성전을 건축할 부지를 우리 힘으로 마련하였다. 2006년 고 유근복 신부님과 이관희 신부님을 모시고 성전 기공식을 하였다. 2008년 9월 21일 서울대교구에서 파견되신 첫 사제, 박준호 바오로 신부님을 모시고 요하네스버그 대교구장 부티 대주교님의 집전으로 성전봉헌미사를 드렸다.

 

아직 교육관도 사제관도 없는 남아공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이지만 오랜 염원과 숙원으로 이루어진 성전이기에 우리에게 더없이 소중하고 아름다운 공간이다. 넓은 부지 위에 하나, 둘 건립되는 건물을 바라보며 행복해한다. 또한 우리는 남아공 한인 성당이 모체가 되는 아프리카 선교를 꿈꾸고 있다.

 

2011년 2월, 인천교구에서 부임해 오신 손광배 도미니코 신부님(현 주임사제)을 모시고 생활하고 있다. 여섯 가정과 몇 명의 예비신자로 시작해 어느덧 150여 명의 신자로 구성된 작지 않은 공동체를 이루었다. 남아공 전체에 살고 있는 3천여 명밖에 되지 않는 적은 이민 인구를 고려할 때 큰 신앙의 힘이 아닐 수 없다.

 

한인 공동체에 크고 작은 일이 있을 때마다 부티 대주교님께서 손수 공동체를 방문하여 신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주시며 남다른 애정을 보이고 계신다. 8월엔 견진성사도 집전해 주실 예정이다.

 

어린아이처럼 맑은 미소를 가진 손광배 신부님이 오신 뒤로 냉담하였던 신자들이 하나둘 성당으로 발걸음을 하고 있다. 우리의 성전 마련과 공동체의 화합이 1차 도약이었다면, 이젠 손광배 신부님과 함께 남아공 성소를 위한 2차 도약을 꿈꾼다.

 

 

아름다운 청년 남아공 성당

 

18년 전, 신앙으로 모여 하나 된 남아공 공동체는 어린아이였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19세 아름다운 청년으로 자라 더 큰 성전으로 발전해 나가고 있다.

 

다섯 개의 구역 모임, 성서 모임, 성서 50주간, 토요일 오전 예비신자 교리가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교인들의 친교를 위한 성당 골프대회와 주일마다 성당 잔디밭에서는 힘찬 주먹과 발차기를 하는 어린아이들의 낭랑한 기합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태권도 수련이 한창이다.

 

성경 공부를 마치고 나오는 아이들의 표정이 밝다. 미사 시간과 성경 공부 시간이 무척 즐겁다는 아이들, 그래서 우리 공동체에서도 하느님의 소명을 받들어 사제가 되겠다고 응답하는 성소자가 나왔다는 감사스러운 낭보가 터지지 않을까 살짝 기대도 해본다.

 

* 문현주 마틸다 -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신자. 소설가.

 

[경향잡지, 2011년 9월호, 문현주 마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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