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0일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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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ㅣ순교자ㅣ성지

[성지] 교토(京都) 천주교 성지 (2) 교토에서 시작된 선교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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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2-12 ㅣ No.1433

교토(京都)에서 분 바람 - 교토 천주교성지 ② 교토에서 시작된 선교활동



1559년, 선교사 가스팔 빌레라가 교토에서 선교활동을 시작한 것은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교토를 떠난 지 10년이 지난 후였다. 때는 초겨울, 그는 허름한 오두막집에서 추위에 떨면서 처음에는 지푸라기만을 깔고 잤었고, 며칠 뒤에는 겨우 한 장의 다다미(疊:짚으로 만든 판에 돗자리를 붙였던 깔개)를 구해서 그 위에서 쉬었다고 한다. 식사라고는 밥과 무국, 소량의 멸치젓이 전부였다. 게다가 동네 사람들은 자기들과 전혀 다른 외모를 가진 그를 두려워하며 끊임없이 돌을 던지기도 하였다.

빌레라가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교토 사람들의 마음을 열려고 노력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교토 사람들은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때와 같이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았고, 빌레라 또한 교토에서의 복음선포의 어려움을 몸소 느끼고 있었다. 그의 고난은 계속 이어졌고, 방법을 찾던 그는 어느 스님에게 장군 아시카가 요시테루(足利義輝)를 만날 수 있도록 부탁을 드려 소개서를 받은 후 모래시계를 선물로 지참하여 장군을 찾아 갔다. 장군은 그 선물을 무척 마음에 들어 하며 선교사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에 대해 처벌을 하겠다는 3개의 명을 내려 방을 붙였다. 이것으로 인해 끊임없이 이어온 동네 사람들의 행패는 잠잠해졌다.

1563년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가 이미 세례를 받은 오오무라 스미타다(大村純忠 : 일본 최초의 키리시탄〈천주교인〉 대명〈大名:영주〉)의 영토인 나가사키현(長崎縣)의 요코세우라항(橫瀨浦港)에 입항 후 교토에 도착하였다. 우리를 놀라게 한 것은 이때의 그들의 옷차림이다. 일본인들의 마음에 어떻게 해서라도 복음을 전하고 싶어 했던 그들은 맨발에 조리(짚으로 엮어서 만든, 발가락에 끼우는 일본 신발)를 신고 승려의 모습으로 나타났다고 전해져 있다. 이렇게 빌레라와 프로이스의 열정적인 선교에 의해 천주교는 조금씩 교토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져서 신자들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그 기쁨도 잠시, 천주교를 밀어 주었던 장군 아시카가 요시테루는 비명의 죽음을 당하고, 그 후 그 당시 큰 힘을 가진 불교의 한 파인 텐다이슈(天台宗)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1565년에 처음으로 교토에서 천주교에 대한 금교령이 내려지자 빌레라와 프로이스는 그 곳을 떠나야 했고, 다시 교토를 찾아가게 되기까지는 몇 년을 더 기다려야만 하였다. 1569년 다시 교토를 향한 프로이스는 구니죠성을 축성(築城)하고 있던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와 만나게 되면서 선교허가를 얻어 로렌소와 함께 교토를 중심으로 열정적인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는데, 그 당시 그들의 가슴은 큰 기쁨으로 충만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얼마 후 선교사 오르간티노가 프로이스를 돕기 위해 교토로 왔고, 일본 각지에서도 영주들이 세례를 받아 천주교 신도가 되었다. 그들이 바로 ‘키리시탄 대명’이라고 불린 이들이다.

키리시탄 대명들은 교토에 성당 짓는 것을 간절히 원하고 있었고, 고생 끝에 드디어 1575년 성당을 짓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음력 7월 21일, 교토에 처음으로 본격적인 성당, 즉 난반지(난반이란 유럽이나 동남아시아의 문물을 가리키는 말, 즉 난반지는 서양식 절)가 오사카의 키리시탄 대명 타카야마 우콘(高山右近) 외 몇 명의 도움으로 완성되었다. 난반지가 완성된 7월 21일은 양력으로 8월 15일, 바로 성모 승천 대축일이었다. 그리고 이 날은 신기하게도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고난 끝에 일본에 도착한 날이기도 하였다.

이 날을 기념해서 장엄한 미사가 이 성당에서 거행되었고 푹푹 찌는 교토의 더위 속에서 많은 키리시탄들은 큰 기대감으로 충만하여 그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교토 사람들은 이 훌륭한 3층 건물의 성당을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았을까? 아름다운 목조건물로 올려 보아야만이 전체가 다 보이는 근사한 난반지! 특히나 그곳에서는 아름다운 종소리가 울려 퍼져서 교토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이 난반지를 더 이상 볼 수가 없다. 천주교를 박해한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로 인해 그 당시 두세 곳에 있었다고 하는 난반지는 모조리 다 파괴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다만 유명한 화가인 가노 모토히데(狩野元秀)가 그린 그림만이 남아 지금도 코베 시립박물관에 보존되고 있다.

그리고 1593년 프란치스코회 선교사들도 일본에 도착하였는데, 처음에는 선교사들을 받아들였던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게서 교토 시내에 광대한 땅을 물려받아 이들 역시 또 다른 성당을 지을 수 있었다. 그 당시 일본에서는 내란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라 교토에도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고 길가에 쓰러져 있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선교사들은 이러한 상황에 온 마음을 다해서 그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을 하였다. 그렇게 해서 성당 바로 옆에 성 안나병원이 건립되었고 뒤이어 성요셉병원도 건립되었다. 물론 의사, 그리고 간호를 할 사람들이 필요했던 것은 말 할 것도 없다. 키리시탄들은 그 병원에서 일을 돕기 위해 병원 근처에 옮겨 살게 되었고 나날이 헌신적으로 살았다. 이렇게 해서 생긴 마을이 다이우스마을(데우스 〈라틴어로 ‘신’〉를 믿는 사람들의 마을)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일본 나가사키로 성지순례를 다녀온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듯이 일본에는 현재 26명의 성인이 있다. 나가사키현 니시자카노 오카(長崎縣 西坂の丘)에서 순교한 26성인이라 불리는 이들이 원래는 나가사키 지방 사람이 아니라, 그 당시 수도였던 교토에서 잡혀 나가사키까지 끌려갔던 사람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선교사들이 일본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파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교토를 거쳐야만 했다. 그렇기에 교토에는 그들의 슬픈 사연들과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 있는 것이다.(참고도서 : 스기노 사카에 저서 《교토의 키리스탄사적을 돌아보다》, 산가쿠출판)

* 이나오까 아끼 님은 현재 프리랜서로 통역 및 가이드로 활동 중이며, 비산성당에서 10년째 교리교사를 하고 있다고 해요.

 

[월간빛, 2015년 2월호, 이나오까 아끼, 쥴리아(비산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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