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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철학ㅣ사상

과학칼럼: 네가 가져간 나의 반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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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03-06 ㅣ No.479

[과학칼럼] 네가 가져간 나의 반쪽

 

 

저는 소싯적에 물리학을 전공하던 자연과학도였습니다. 제 과거를 듣고 열에 일고여덟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곤 합니다. “신부님, 저는 학창 시절에 가장 싫어하는 과목이 물리였어요.”

 

많은 사람들이 물리를 어렵고 까다롭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실 물리보다 더 보편적으로 어려움과 싫어함의 대상이 되는 과목이 있습니다. 바로 수학입니다. 물리가 어려운 이유는 수학이라는 도구로 자연현상을 이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안 그래도 어려운 수학을, 심지어 자연현상에 적용하고 분석해야 한다니 이렇게 난감할 데가 없지요.

 

하지만 어디나 예외는 있기 마련입니다. 극소수의 사람들은 그 어떤 과목보다 수학을 좋아하고 나아가 수학으로 자연을 분석하는 것을 즐기기도 합니다. 그 흔치 않은 사람들 중에 오늘날 우리가 근대 철학의 아버지라 칭하는 데카르트(R. Descartes, 1650)가 있고, 시계처럼 정확한 철학자로 유명한 칸트(I. Kant, 1804)도 있습니다. 수학 시간에 우리를 그토록 힘들게 하던 x-y 좌표계를 처음으로 고안한 사람이 바로 데카르트였습니다. 칸트는, 말만 들어도 아득하고 복잡할 것 같은 천체 물리를 심도 있게 연구하여 박사학위 논문을 썼지요. 오늘날 윤리 교과서나 철학 강의에서 만날 법한 이 사람들은 실상 뛰어난 수학자이고 물리학자이기도 했습니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말로 유명한데, 이 말은 확실한 지식, 분명한 참됨(眞理)을 찾기 위한 그의 출발점입니다. 데카르트에게 끊임없이 생각하는 ‘나’는 모든 확실성의 출발점이고, 이 ‘생각하는 나’가 가장 분명하고 확실하게 얻는 지식 중 하나가 바로 수학 지식입니다. 데카르트는 수학이야말로 모든 종류의 확실한 참됨(眞理)의 모범이고 기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칸트는 여기에 물리학을 덧붙입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수학과 물리학, 그리고 물리학의 방법론을 본뜬 다른 자연과학 분과들만이 엄밀한 의미에서 학문(science)이라고 선언합니다.

 

칸트 이후, 원래는 학문 일반을 가리키던 ‘science’는 점차 특정 학문, 곧 자연과학을 주로 지칭하는 말로 굳어집니다. 과거에는 철학이 학문 전체를 다루고 숙고하는 일을 했는데, 거기서 과학이 독립을 선언하고 스스로 유일하게 참된 ‘science’라 일컫게 된 것이지요.

 

물리학을 비롯한 자연과학에 점차 어렵고 수준 높은 수학이 사용되면서 이런 경향은 더 심해집니다. 오늘날 우리가 위대한 물리학자로 알고 있는 뉴턴(I. Newton, 1727)은 원래 스스로를 철학자로, 특별히 자연에 대해 고민하고 탐구하는 자연철학자라 여겼습니다. 하지만 ‘철학자’ 뉴턴 이래 물리학은 저 악명 높은 미적분과 다른 복잡한 수학으로 인해 더 이상 철학으로 이해하기 힘든 그 무엇이 되고 말았습니다.

 

보편에 대한 동일한 관심으로 출발한 철학과 과학은 그렇게 서로 멀어졌습니다. 예전의 한 유행가 가사처럼 과학은 철학의 품을 떠나면서 그 ‘반쪽’을 가져가 버렸고, ‘반쪽’을 내준 철학은 점차 위축되고 초라해졌습니다. 그리고 이는 우리 그리스도교 신학과 신앙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치기 시작합니다.

 

* 칼럼 제목과 말미에 철학과 과학의 관계를 “일과 이분의 일”이라는 90년대 유행가 가사에 빗대어 표현했는데, 이는 필자가 학부 시절 들었던 김영 교수님의 과학철학 강의에서 빌려왔음을 밝혀 둡니다.

 

[2023년 3월 5일(가해) 사순 제2주일 서울주보 6면, 조동원 안토니오 신부(가톨릭대학교성신교정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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