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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다시 보는 최양업 신부1: 최양업 신부의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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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6-26 ㅣ No.1557

[다시 보는 최양업 신부] (1) 최양업 신부의 생애


매년 2800여㎞ 11년간 걸으며 교우촌 찾아다닌 참 목자

 

 

- 가경자 최양업 신부는 매년 2800여km를 걸으며 교우촌을 방문, 성사를 집전했다. 그래서 최양업 신부를 ‘땀의 순교자’라 부른다. 사진은 최 신부의 사목 중심지였던 청주교구 배티성지 초막에 세워진 최양업 신부상.

 

 

시복 운동 20년 만의 결실이다.

 

한국 교회가 최양업(토마스, 1821~1861) 신부의 시복 시성 추진을 본격화한 것은 1996년 10월이다. 주교회의가 그해 가을 정기총회에서 최 신부의 시복 추진을 공식 승인한 이후 20년 4개월 만인 지난 4월 26일 프란치스코 교황은 최양업 신부를 ‘가경자’로 선포했다. 이어 주교회의 시복시성특별위원회는 15일 가경자 최양업 신부 기적 심사 법정을 종료하고 교황청 시성성에 그 자료를 제출했다. 

 

이를 계기로 평화신문은 가경자 최양업 신부의 시복을 기원하며 ‘다시 보는 최양업 신부’ 연재를 시작한다. 가경자 최양업 신부가 남긴 편지들을 토대로 국내 사목 발자취를 더듬어 가며 최 신부의 삶과 영성을 살펴보는 연재 기획이다. 그 첫 번째로 이번 호에는 최 신부의 생애를 개략적으로 알아본다.

 

 

가경자 최양업 신부는 1821년 3월 1일 충청도 청양 다락골에서 성 최경환(프란치스코)와 복녀 이성례(마리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최양업은 이곳에서 만 6살 때까지 살았다. 1827년 무렵, 가족은 서울 낙동으로, 이후 강원 김성, 경기 부평, 안양 수리산으로 박해를 피해 이주를 거듭하면서 신앙을 지켰다.

 

 

한국인 첫 신학생 

 

1836년 2월 6일 경기 부평에 살던 15살 최양업은 모방 신부로부터 한국인 첫 신학생으로 선발됐다. 뒤를 이어 신학생으로 선발된 최방제, 김대건과 함께 그해 12월 3일 마카오 유학길에 올랐다. 정하상(바오로), 조신철(가롤로), 이광렬(요한)이 국경 넘어 변문까지 동행했다. 이후 중국 서만자 출신으로 앵베르 주교와 샤스탕 신부의 조선 입국 길을 안내했던 서만자와 마카오 사이의 파발꾼 투안 마리아노와 첸 요아킴이 세 신학생을 데리고 마카오까지 갔다.

 

1837년 6월 7일 마카오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에 도착해 신학 공부를 시작한 세 신학생에 대한 신부들의 평가는 좋았다. 교장 칼르리 신부는 “3명의 조선 소년들은 훌륭한 사제로서 바람직스러운 덕목이나 신심, 겸손, 면학심, 스승에 대한 존경 등 모든 면에서 완전하다”고 평했다. 

 

시련은 곧 닥쳤다. 그해 11월 27일 최방제가 열병으로 숨졌다. 또 마카오 민란으로 1839년 4월에서 11월까지 최양업과 김대건은 교수 신부들과 함께 필리핀 마닐라 근교 롤롬보이로 피신했다. 이 시기 조선에서는 기해박해(1839년)로 아버지 최경환이 서른다섯의 나이로 순교했다. 또 이듬해인 1840년 1월 31일에는 어머니 이성례마저 순교했다. 이 사실도 모른 채 최양업은 피난지 롤롬보이에서 아버지에게 그리움을 담은 편지를 보냈다.

 

- 11년 동안 국내에서 사목에 헌신한 최양업 신부는 과로와 장티푸스가 겹쳐 1861년 6월 15일 선종했다. 사진은 원주교구 제천 배론성지에 조성돼 있는 가경자 최양업 신부 무덤.

 

 

조선 입국로 개척가

 

김대건이 1842년 2월 마카오를 떠나고, 최양업은 1842년 7월 파리외방전교회 조선 선교사와 함께 마카오를 떠나 요동반도 태장하 해안 백가점을 거쳐 11월 소팔가자에 이른다. 

 

최양업은 이곳에서 김대건과 함께 신학 교육을 받고 1844년 12월 소팔가자에서 제3대 조선대목구장 페레올 주교(1808~1853)에게 부제품을 받았다. 이후 김대건은 조선 입국에 성공한 후 배를 타고 상해로 건너와 페레올 주교에게 사제품을 받고 주교와 함께 조선 재입국에 성공했다. 

 

반면, 최양업은 소팔가자에 머무르면서 두만강과 압록강을 통한 조선 입국 루트를 개척했다. 그러다 1846년 겨울 그해 병오박해로 김대건 신부가 순교한 소식을 듣게 된다. 

 

최 부제는 1847년 초 홍콩 극동대표부로 돌아가 페레올 주교가 프랑스어로 쓴 「기해ㆍ병오 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을 라틴어로 번역해 파리로 보냈다. 이 문서에 기록된 기해년(1839년)· 병오년(1846년) 순교자 82위 중 79위가 시성됐다. 

 

그해 7월 최양업은 매스트르 신부와 프랑스 군함을 타고 4번째 조선 입국을 시도하다 서해 고군산도 인근에서 난파하는 바람에 상해로 돌아간다. 최양업은 1849년 4월 15일 상해에서 강남대목구장 마레스카 주교에게 사제품을 받았다. 두 번째 한국인 사제였고, 그의 나이 28살이었다.

 

 

한국인 첫 해외 선교사 

 

사제 수품 후 그해 5월 최양업 신부는 매스트르 신부와 서해 뱃길로 다섯 번째 조선 입국을 시도했으나 또 실패하고 요동지방 양관과 차쿠에서 베르노 신부를 보좌해 중국 신자들을 사목했다. 이로써 최 신부는 한국인 첫 해외 선교사로, 차쿠는 한국인 첫 해외 선교지로 기록된다. 최 신부가 차쿠에서 사목한 기간은 7개월가량으로 1849년 5월 말에서 12월 말까지다.

 

 

길 위의 사제

 

최 신부는 1849년 12월 압록강을 넘어 13년 만에 귀국한다. 1850년 1월 서울에 도착한 최양업 신부는 다블뤼 신부에게 병자성사를 집전하는 것으로 조선에서의 첫 성무를 시작했다. 이후 최 신부는 잠시도 쉬지 못한 채 교우촌 순방에 들어갔다. 

 

페레올 주교는 서한에서 “최양업 신부가 돌아오지 않았다면, 제가 무거운 짐을 다 짊어져야 했을텐데, 최 신부의 입국으로 하느님께서 저에게 얼마나 큰 도움을 주셨는지 잘 짐작하실 것”이라고 썼다.

 

최 신부가 1년 중 순방해야 할 교우촌은 전체 교우촌의 약 70%에 해당하는 120여 곳으로 해마다 2800여 ㎞를 걸어야 했다.

 

 

우리말 교리서와 기도서 펴내다

 

교우촌을 다니던 최 신부는 우리말 교리서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의 여덟 번째 서한에서 “쉬운 한글 덕분으로 세련되지 못한 산골에서도 신자들이 빨리 천주교 교리를 배우고 구원을 위한 훈계를 받을 수 있다”며 주요 교리와 기도문을 가사체로 노래한 천주가사를 편찬한다. 그는 1859년 여름 다블뤼 주교를 도와 한국 교회 최초의 공식 교리서인 한문본 「성교요리문답」과 한문본 기도서인 「천주성교공과」를 우리말로 옮기는 작업을 완성했다. 한글본 「성교요리문답」은 1934년에 「천주교 요리 문답」이 나오기까지 공식 교리서로 쓰였다. 한글본 「천주성교공과」는 1972년 「가톨릭 기도서」가 출간되기까지 110년간 사용됐다.

 

 

땀의 순교자

 

최 신부는 갈수록 쇠약해졌다. 12년간 해마다 7000여리를 걸어 교우촌을 순방한 그는 지쳤다. 1861년 6월 15일, 최 신부는 과로와 장티푸스가 겹쳐 경북 문경 인근에서 쓰러지고 만다. 그는 배론에서 급히 달려온 푸르티에 신부에게 병자성사를 받고 예수 마리아의 이름을 되뇌다 선종했다. 그의 나이 만 40살이었다. 조선에 들어와 사목한 지 11년 6개월 만이었다. 최 신부의 유해는 선종지에 가매장됐다가 훗날 배론에 안장됐다. 

 

최 신부의 죽음은 ‘조선 교회 전체의 초상’이었다. 베르뇌 주교는 1861년 9월 4일자 서한에서 “(최 신부는) 12년간 거룩한 사제의 모든 본분을 지극히 정확하게 지킴으로써 사람들을 감화하고 성공적으로 영혼 구원에 힘쓰기를 그치지 않았다”고 안타까워했다.

 

[평화신문, 2016년 6월 26일, 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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