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4일 (화)
(홍) 성 마티아 사도 축일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자] 순교자 강완숙 골룸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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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09-22 ㅣ No.1162

[이달의 성인] 순교자 강완숙 골룸바(1761-1801년)



한국 초기교회사에 가장 두드러진 여인, 강완숙 골룸바는 내포(內浦)지방인 충청도 홍성에서 양반가의 자녀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말재주가 있었고 용감하였으며, 생각과 취미가 고상했었다. 혼기가 된 그녀는 덕산에서 상처하여 살고 있던 양반 홍지영에게 시집을 갔으나, 순박했지만 마음이 용렬했던 남편과 맞지 않음으로 우울하고 답답한 날들을 보내던 중에 천주교를 만나 곧 열성어린 신자가 되었다.

그녀는 총명함, 근면, 열성, 자제력으로 가족과 가까운 친척들에게 전교하면서 자신의 남편에게도 온 힘을 다하여 교리를 전하였으나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신해(1791) 박해가 일어나자 남편 홍지영은 천주교 신자인 부인으로 인해 자신에게 피해가 올 것을 두려워하여, 부인 강완숙을 집에서 나가게 한다. 그래서 강완숙은 모든 전답을 남편에게 맡기고 신자가 된 전처의 아들 홍필주 필립보와 딸과 시어머니를 모시고 서울로 상경하기에 이른다.

그녀는 지황(사바, 1766-1795)과 윤유일(바오로, 1760-1795) 등의 주문모 신부 영접하는 일에 경제적 일을 담당하였고, 교회내의 크고 작은 일들을 도왔다. 주문모 신부는 입국 후, 그녀의 성실함과 영리함을 인정하여 여회장으로 임명했다.

1794년의 박해 때, 그녀는 주문모 신부를 혼자서 자신의 집에 숨겨두고 보호하던 중에, 포졸들이 문 앞까지 왔어도 감히 들어올 수 없도록 하는 등 혼신의 힘으로 보호하였다. 그녀는 6년 동안을 물심양면을 다해 불편이 없도록 최선으로 주문모 신부를 모셨고, 교회내의 경영과 적응에 뛰어난 솜씨를 발휘하였다. 또한 동정녀들과 과부들을 많이 모아 지도하고 그들로 하여금 집집마다 방문하여 신앙을 권유토록 했으며, 자신도 불철주야 능란한 언어구사와 이치에 합당한 말로 교리를 가르치고 남을 권유하며 감화시키기에 전력을 다했다.

한국교회 최초의 여회장 강완숙 골룸바의 활약과 업적을 우리는 다음과 같이 본다. 첫째, 명도회 여회장으로서 남인 양반과 중인들과 함께 펼쳤던 다양한 선교활동이다. 둘째, 양반가의 부녀들을 입교시키고 동정녀들과 과부들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교육하였으며, 선교 자선사업 등으로 교회의 성장에 기여한 것이다. 셋째,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주문모 신부를 6년간이나 자신의 집에서 피신시키고 보호하였다. 넷째, 굳센 믿음과 불굴의 의지로 신앙을 지킨 순교자라는 것이다.

그녀는 관가에 체포되어 주문모 신부의 행적에 대하여 신문을 받으며 주뢰의 고문까지 받았지만, 조금도 변함없이 태연하였다. 그녀는 마침내 1801년 7월 2일(음력 5월 22일) 동료 4명과 함께 수레를 타고 형장으로 끌려갔다. 형장에 이른 그녀는 형장의 주재 관리에게 말한다. “국법에는 사형을 받는 이들의 옷을 벗기라고 명하지만, 여인들을 그렇게 다루는 것은 온당치 않으니, 우리는 옷을 입은 채로 죽기를 청한다.” 그녀의 청은 받아들여지고 그녀는 맨 먼저 형틀로 나아가 십자성호를 긋고 한 떨기 고운 목숨 천주를 위해 바친다. 그녀의 나이 41세였다. 그녀와 같이 함께 참수치명(斬首致命)한 여인들은 강경복, 문영인, 김연이, 한신애 등의 순교자들이였다.

[2013년 9월 22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경축 이동 전주주보 숲정이 2면, 윤 클레멘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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