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0일 (금)
(백) 부활 제6주간 금요일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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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 생태신학으로 성경 읽기: 에덴의 동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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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6-04 ㅣ No.1537

[생태신학으로 성경 읽기] 에덴의 동쪽

 

 

봄기운이 대지를 감돌아 하늘로 피어오른다. 낙산 마루의 나무들에 아기 손 같은 새순이 돋아난다. 창조의 신비가 축제처럼 도처에 번진다. 창조는 전적으로 하느님의 선물이요 은총이다. 세상에 온통 하느님의 사랑과 복이 현현한다. 이 은총의 꽃비에는 법칙이 존재한다. 하와와 아담의 이야기는 창조 질서의 법칙에 관한 이야기이다.

 

인간이 누리는 가장 원초적 복은 ‘먹는 일’과 ‘성적 결합’이다. 그런데 복에는 제한이 있다. 아담과 하와는 성적 결합으로 한 몸이 되었다고 한다. ‘한 몸’은 일치의 상태를 가리키면서도 구별이 없어진 혼융의 상태를 의미한다. 아담이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창세 2,23)이라고 외친 것처럼 하와를 자신의 일부로 환원하는 것이 성적 결합이다. 본래 한 몸이었는데 다시금 한 몸이 되는 것이 부부의 성적 결합인 셈이다.

 

기실 창조란 분리의 과정이 아니던가! 하느님께서는 꼴을 갖추지 못한 혼돈에서 빛과 어둠을 가르시고 궁창의 위와 아래를 가르셨다. 아담과 하와가 한 몸이었다는 것은, 플라톤의 《향연》에서 아리스토파네스가 주장하는 ‘자웅동체설’의 성경 버전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아담을 ‘너’라고 불러 주셨듯, 하와를 아담의 상대자(kenegdo)로 삼아 주셨다. 개체의 탄생은 자유의 출현과 상호 존중의 인격적 만남을 가능케 한다. 그러나 성적 결합은 한 몸의 원초적 기억을 상기시킬 뿐 아니라 상대방을 내 안에 동화시키는 파괴의 특성도 지닌다. 그 중심에 남자가 있다. 하와는 이미 자신의 이름을 상실하고 아담의 아내로 불린다(창세 4,25 참조).

 

알몸이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점은 부부의 결합에 결핍이 없음을 의미한다. 수치심(bushah)은 지연이나 늦어지는(boshesh) 상황과 관련이 있다. 탈출기에서는 모세가 늦어지자 백성이 기다렸고(탈출 32,1 참조), 판관기에서는 시스라의 귀환이 늦어지자 그의 어머니가 기다렸다(판관 5,28 참조). 만남과 결합은 만족을 주고, 기다림은 초조함과 근심을 준다. 기다림의 가장 애절한 대상은 나의 상대자이다. 그러나 성적 결합은 상대자를 나의 일부(한 몸)로 만들어 버려 자기중심적 일체감과 자아의 확장을 경험케 한다. 여기서 타인을 나의 일부로 소유하려는 전체주의적 발상이 시작된다. 이처럼 성적 결합은 분리되기 전의 한 몸으로 복귀하려는 근원적 동작이요 만남이 주는 혼융의 향연이다.

 

이런 현상은 먹는 일에서도 발생한다. 하느님께서는 먹는 복을 주셨다. 에덴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에서 열매를 먹고 즐기라는 것이 첫 번째 법이다. 즐거움과 기쁨이 하느님의 최초 율법인 셈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이 즐김과 동화의 과정에 한계가 있다고 금령으로 제시하셨다. 그렇다면 왜 금지가 필요한가? 존재는 욕망이며 욕망은 무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신분석학자들은 욕망의 장례 예식을 치러야 한다고 말한다. 금령을 통한 인간 능력의 제한은 인간의 존재론적 한계를 보여 준다. 먹을거리는 혀를 자극해 기쁨을 주고 육체의 활력으로 이어지면서 심리적으로 대상을 내 것으로 만드는 철저한 소유의 과정으로 나아간다. 그리하여 먹는 행위는 음식을 내 것으로 만드는 일체화 작용이기에 세상을 온통 먹을거리(소유의 대상)로 봐서 탐욕을 일으키게 하는 근원적 동기가 된다. 아기가 모든 것을 입에 넣으려는 행위가 이 점을 상징한다. 재물에 대한 한계 없는 탐욕은 먹어서 내 것을 만드는 섭생의 왜곡되고 변형된 형태이다.

 

지식의 나무 열매를 따먹는 행위는 어떤 의미인가? 그것은 선과 악을 아는 열매를 먹음으로써 내가 선과 악 자체가 되고, 선과 악의 기준을 내 안에서 찾고자 하는 것이다. 인간이 스스로 선과 악의 결정 기준을 정하려는 유혹, 이것이 창세기가 지적하는 인간의 교만(Hybris)이요 원죄의 실상이다. 그것은 자신을 하느님으로 착각하는 환상일 뿐이다. 명정(酩酊), 곧 만취 상태가 환상을 만들어 낸다. 환상에 빠진 인간은 선악을 구별하지 못하고 절대상태를 추구한다. 마약은 나르시즘적 자아도취를 강력하게 일으키는 물질이고, 나치즘은 히틀러의 자아도취적 기만과 환상주의가 만든 만취의 종교이다.

 

유혹자 뱀은 들짐승 가운데 가장 영리한 동물로 소개된다. 들은 들짐승의 폭력과 위협, 죽음과 투쟁이 존재하는 무법 지대다. 에덴은 평화와 질서의 세계다. 본문은 에덴과 동물의 세계를 극적으로 대비시킨다. 뱀으로 대표되는 세계는 본시 아담의 본질적인 면이 아닌가? 인간은 여섯째 날에 동물과 함께 창조된 존재이다. 뱀은 아담 안에 숨겨진 동물성의 상징인지도 모른다.

 

뱀의 유혹은 다른 말로 전능에 대한 유혹이다. 이는 전체주의 형태로 나타나는, 권력을 향한 인간의 의지이다. 그러기에 초인이 되고 싶은 인간, 신이 되고 싶은 인간, 절대 권력을 지향하는 인간에게 뱀의 유혹은 너무나 달콤하다. 뱀은 본질상 다신론자(多神論者)이다. 그의 미끼는 ‘인간이 신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각자에게 고유한 법이 있고 자신이 자기 영역의 주인이라는 이야기다. 상대주의가 판을 치는 현대에 뱀의 유혹은 사람들에게 인간 능력의 위대함을 고취시키며 다가온다. 그러나 절대 진리의 보편적 원칙이 없을 때, 개별적 원칙은 힘겨루기를 통해 패권주의와 전체주의로 치닫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다.

 

아담과 하와의 죄에 대한 책임은 평화가 갈등과 전쟁으로 바뀌는 저주로 나타났다. 자연과 인간이 적대 관계가 된다. “땅은 너 때문에 저주를 받으리라. 너는 사는 동안 줄곧 고통 속에서 땅을 부쳐 먹으리라”(창세 3,17). 인간과 동물의 전쟁이 시작된다. “여자의 후손은 너의 머리에 상처를 입히고 너는 그의 발꿈치에 상처를 입히리라”(창세 3,15). 남자와 여자의 전쟁이 불붙게 된다. “너는 네 남편을 갈망하고 그는 너의 주인이 되리라”(창세 3,16).

 

그러면 남자의 노동과 여자의 산고 등 인간 삶의 고달픔이 과연 저주인가? 에덴의 동쪽에서의 삶은 선과 악의 도가니 속에서 하느님의 법에 따라 헤쳐 나가야 할 가시덤불이다. 세상은 에덴에 비해 삶의 방식이 달라졌을 뿐 인간의 삶은 이어지고 인간과 하느님의 관계도 계속된다. 뱀은 여전히 인간을 유혹하는 악한 경향으로 다가온다. 뱀이 지닌 숫자의 가치(nahash=50+8+300=358)는 메시아(mashiha=40+300+10+8=358)와 같다. 뱀은 그리스도의 적이고 그리스도는 뱀의 적이다. 에덴 동산과 에덴의 동쪽은 동일한 실재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의 문제이기도 하다.

 

하느님께서 성과 음식을 통해 주신 생명의 축제를 교만과 탐욕으로 저주의 향연이 되게 할 것인가? 아니면 창조주 하느님 안에서 사람, 동물, 식물, 하늘, 땅, 바람, 물이 서로를 소중히 여기며 평화롭게 살아가는 우주적 공동체를 이룰 것인가?

 

* 백운철 신부는 1985년에 사제품을 받고 파리 가톨릭대학교에서 수학하였다. 현재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에서 신약성경을 가르치며, 신학대학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성서와 함께, 2014년 4월호(통권 457호), 백운철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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