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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부활 제6주간 금요일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교육ㅣ심리ㅣ상담

[피정] 성령칠은6: 효경의 은혜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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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19 ㅣ No.51

[성령칠은 제6강의] 효경(孝敬 piety)의 은혜 (3) (9월 7일 월요일 오후)

 

 

1고린 3:5-17:

 

(5) 도대체 아폴로는 무엇이고 바울로는 무엇입니까? 아폴로나 나나 다 같이 여러분을 믿음으로 인도한 일꾼에 불과하며 주님께서 우리에게 각각 맡겨 주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 (6) 나는 씨를 심었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자라게 하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7) 심는 사람이나 물을 주는 사람은 중요한 것이 없고 자라게 하시는 하느님만이 중요합니다.(8) 심는 사람과 물주는 사람은 동등한 사람이고 각기 수고한 만큼 삯을 받을 따름입니다. (9) 우리는 하느님을 위해서 함께 일하는 일꾼들이고 여러분은 하느님의 밭이며 하느님의 건물입니다. (10) 나는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으로 능숙한 건축가가 되어 기초를 놓았고 다른 사람은 그 위에 집을 짓고 있습니다. 그러나 집을 짓는 방법에 대해서는 각자가 신중히 생각해야 합니다. (11) 이미 예수 그리스도라는 기초가 놓여 있으니 아무도 다른 기초는 놓을 수가 없습니다. (12) 이 기초 위에다가 어떤 사람은 금으로, 어떤 사람은 은으로, 어떤 사람은 보석으로, 어떤 사람은 나무로, 어떤 사람은 마른 풀로, 어떤 사람은 짚으로 집을 짓는다고 합시다. (13) 이제 심판의 날이 오면 모든 것이 드러나서 각자가 한 일이 명백하게 될 것입니다. 심판의 날은 불을 몰고 오겠고 그 불은 각자의 업적을 시험하여 그 진가를 가려 줄 것입니다. (14) 만일 그 기초 위에 세운 집이 그 불을 견디어 내면 그 집을 지은 사람은 상을 받고 (15) 만일 그 집이 불에 타 버리면 그는 낭패를 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자신은 불 속에서 살아 나오는 사람같이 구원을 받습니다. (16) 여러분은 자신이 하느님의 성전이며 하느님의 성령께서 자기 안에 살아 계시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17) 만일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을 멸망시키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성전은 거룩하며 여러분 자신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며 성령이 건축가로서 귀중한 돌로 집을 짓고 있습니다. 작은 사람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2가지 예를 들겠다.  작은 사람들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하나는 정신박약아 집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 집에 초대받아서 그곳 봉사자들이 자신들의 삶을 나와 함께 나누고 그들을 위해서 피정을 지도하여 주었다. 피정 후에 발씻는 예식을 하는 전통이 있다. 상대방의 발을 씻어 주고 그 사람의 앞에 무릎을 꿇고 그 사람의 강복을 받는다. 다운증후군에 걸린 벨라뎃다와 한 짝이 되어 서로의 발을 씻어 주고 서로의 강복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본을 따라서 벨라뎃다의 발을 씻어 주었습니다. 저는 그때까지 예수님의 발을 씻어 주시는 것이 겸손한 섬김이라는 것만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겸손되이 섬겨 주셨습니다. 벨라뎃다의 발을 씻어 주고 그녀의 강복을 받았는데 저에게는 그 순간이 회심의 기회였습니다. 그때에 강복을 주는 사람이 그녀가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벨라뎃다가 하느님의 축복을 가득히 받아서 나에 주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받았습니다. 저는 그녀에게 주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것은 그냥 단순한 겸손이 아니고, 발을 씻긴 제자들로부터 오는 하느님 아버지의 축복에 참여하는 것이었습니다.

 

또 다른 예를 든다. 장애인들을 위한 집이었다. 렌즈윗(Ranzwet)이라는 청년이 있다. 전신 마비였다. 손과 다리 전신이 쓸 수 없었다. 오직 얼굴의 근육을 씰룩거리고 말할 뿐이다. 그의 두뇌만 온전했다. 숨을 쉴 수 있는 만큼만 근육이 움직였다. 손은 엄지손가락만 움직였다. 그의 머리로 자신이 장애인이라는 것을 안다. 그런 사람 앞에서 우리는 좌절하고 불편하다. 아이를 대하듯 잘 대하기가 힘들었다. 머리는 총명했다. 이 아이를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나? 그를 보고 첫 반응이 “무엇을 할 수 있나”라고 묻게 되었다. 먼저 가족적인 분위기 있는 집에 보냈다. 보조자를 보냈다. 라디오를 주었다. 우리는 그가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찾다가 어느 날 어떤 사람이 칫솔을 발견했다. 오른 손에 칫솔을 들고 물감을 뿌리게 해서 수채화를 그리게 해서 어떤 모양을 만들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무늬의 본을 떠 주고 거기에 맞는 색깔을 고르게 해서 카드를 만들 수 있었다. 그는 다른 것도 할 수 있다. 저녁에 같이 기도할 때에는 라디오를 듣고 세상을 위한 기도 지향을 만들어 내어놓는다. 그는 이제 공동체의 삶속에 참여하고 있다. 세상에 관한 뉴스를 듣고 그것을 기도 지향으로 바꾸었다. 그것이 렌즈윗의 삶이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마침내 렌즈윗으로부터 많은 것을 받았습니다. 그가 아름다운 마음의 소유자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마음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그 이상의 것이었다. 하느님 아버지는 그의 능력을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의 마음을 사랑하신다. 그 사람도 하느님의 사랑 받는 아들이다. 하느님은 그의 감수성이 있고 창조적인 일에 연민을 가고 계시다. 그의 활동은 아주 제한된 것이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무한한 것이다. 렌즈윗이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내가 맡겨진 사명이 굉장히 중요하고 필요한 일이지만 나는 오직 제한된 일만을 할 수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하느님이 인류에게 맡기신 구원 사업이 무엇인지 이해하게 되면 그 엄청난 구원 계획에 비하여, 나에게 맡겨진 사명이 얼마나 제한된 사명이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 렌즈윗이 장애자 공동체 안에 할 수 있는 것과 내가 인류 공동체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을 비교하니. 하느님의 렌즈윗을 통한 하느님의 사랑의 계획이 나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보다 훨씬 앞서 간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나는 구원자가 아니고, 구원자이신 하느님의 한없는 사랑과 사랑의 구혼(propose)을 함께 이루어 가야만 하는 공동 협력자라는 것입니다. 공동 협력은 교회 안에서 이루어진다. 그를 위해 물감을 도와주는 사람이 있고 카드를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공동체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의 요구가 이루어진다. 하느님 아버지는 우리 마음을 바라보신다.

 

예수님의 선교 사업을 예를 들자면, 예수님께 맡겨진 사명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제한되었다. 시간적으로 33년이란 짧은 시간 동안 사셨고, 공간적으로 작은 나라에서 당신 구원을 수 있었을 뿐이다. 그것도 30년간은 나자렛에서 그냥 사셨다. 예수님이 하신 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당신이 하느님의 뜻에 마음으로 온전히 일치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는 큰아들에게서 일을 기대하신 것이 아니라 아들로서의 마음을 먼저 기대하셨다. 일은 우리의 마음을 표현하는 수단일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자녀된 심정(心情)은 우리에게 맡겨진 어떤 일보다 훨씬 더 귀중하다. 우리는 사람들이 그들이 갖은 권력이나 능력이나 효율성이 높이 평가되는 사회에서 산다. 그래서 일보다 훨씬 더 중요한 마음을 잊어버립니다. 우리는 이 효경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이상이 렌즈윗이 저에게 가르쳐 준 내용입니다. 저는 그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시간을 내서 길을 잃어버린 사람을 바라볼 수 있다면! 그렇게 하려면 우리는 현대사회의 주류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어떤 사람은 아파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 시간을 내서 멈추게 된다면 우리는 차츰 많은 것을 발견하게 된다.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느님의 눈에는 아주 소중한 존재이다. 내가 가장 낙오된 사람을 형제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아버지의 마음을 결코 깨달을 수 없고 하느님 아버지께 ‘아빠’라고 부를 수 없다. 내가 진정으로 ‘우리’ 아버지 ‘우리’ 아버지라고 부른다면, 하느님 아버지부터 같은 축복을 받은 진정한 형제들에게 “형제” “자매”라고 부를 수 있다. 공동체를 건설 할 때에 우리의 주의를 더 많이 요구하는 낙오된 사람에게 관심을 더 주어야 한다.

 

효경을 실재로 잘 적용할 수 있는 3가지 요점을 말씀드리겠습니다.

 

1. 서로를 하느님의 선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 첫째이다. 신부님들이 어떤 사목적인 일을 하는지 나는 잘 모른다. 어떻게 공동체를 이루어 가는가? 가정을 방문하고, 여러 가정을 한데 모아서 공동체 이루고 거기서 미사를 드리기도 할 것이다. 사람들이 받은 선물이 다양하다. 성령은 다양한 은총을 받은 여러 사람들을 합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루려고 한다. 우리가 모든 것을 다할 수 없다. 사람들과 함께해야 한다. 사람들과 함께하되 작은 사람들에게 관심 갖고 “그들을 어떻게 초대할까”를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유능한 사람들을 먼저 취하려고 하는 유혹을 받는다. 물론 우리는 유능한 사람들에게 주의를 기우려야 하지요. 그러나 우리가 온전히 잃어버린 사람이나 가장 가난한 사람이나 몹시 소외된 사람 즉 작은 사람들을 잃어버리면 우리는 공동체를 이루는데 핵심을 놓치게 된다. 가장 중요한 것인 진정한 형제적인 사랑으로 이루어진 공동체를 잃어버리게 된다.

 

우리는 소공동체(BEC)에 대해서 이야기 할 수 있지만, 먼저 사제관에서 함께 사는 사제들의 공동체를 생각해야 한다. 어떻게 함께 살까? 서로 다른 은총의 선물을 존중해야 한다. 연장자는 젊은이들이 받은 선물을 존중하고, 젊은이는 연장자가 받은 선물을 존중해야 한다. 예수님은 항상 제자들을 지칭할 때에 “저에게 맡기신 이 사람들”이라고 하는데, 우리는 동료 사제들을 예수님이 나에게 보내 주신 형제로 생각해야 한다. 동료 사제가 하느님의 선물들이다. 누가 명령을 내리는가가 중요하지 않다. 종종 젊은 사람이 명령을 내리기도 한다. 누가 명령을 내리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하느님이 맡기신 사명을 어떻게 함께 받아들이는 가가 중요하고 이것이 신비이다. 그것은 나의 사명이 아니고, 함께 불린 것이고 공동 사명을 받은 것이다. 서로를 하느님의 선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 첫째이다.

 

2. 두 번째는 성령이 가져다주는 열매를 맺도록 관상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성바오로 서간이나 베드로 서간에도 공동체 안에서 성령의 열매를 받아들이려고 주의를 기우리라고 권합니다. 공동체 안에는 항상 적의나 싸움이나 말다툼이 있다. 저는 이것이 중요한 관심사라고 생각한다. 각 공동체마다 성령의 열매가 없는 것이 문제이다. 공동체를 이루는 것은 인간적인 노력으로 불가능하고 성령이 맺어 주시는 성령의 선물입니다. 우리는 성서의 서간에서 사도들이 공동체 신자들에게 계속 주의를 상기시키는 것을 본다. 서간의 성령의 열매가 나오는 성서 구절을 말씀드립니다.

 

** 로마 12:9-13 ;

 

(로마12:9) 사랑은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악을 미워하고 꾸준히 선한 일을 하십시오. (로마12:10) 형제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고 다투어 서로 남을 존경하는 일에 뒤지지 마십시오. (로마12:11)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일하며 열렬한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십시오. (로마12:12) 희망을 가지고 기뻐하며 환난 속에서 참으며 꾸준히 기도하십시오. 성도들의 딱한 사정을 돌봐 주고 나그네를 후히 대접하십시오.(로마12:13) 성도들의 딱한 사정을 돌봐 주고 나그네를 후히 대접하십시오.

 

** 1고린 13:4-7 ;

 

(1고린13:4)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자랑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5) 사랑은 무례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사욕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성을 내지 않습니다. 사랑은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6) 사랑은 불의를 보고 기뻐하지 아니하고 진리를 보고 기뻐합니다. (7)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 1고린 14:1~ ;

 

(1고린14:1) 힘써 남을 사랑하고 성령의 선물을 간절히 구하십시오. 특히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은혜를 간절히 구하십시오. (2) 이상한 언어를 말하는 사람은 성령의 힘으로 신비한 일을 말하는 것이므로 아무도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3) 그러나 말씀을 받아 전하는 사람은 사람들을 키워 주고 격려해 주고 위로해 주려고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4) 이상한 언어로 말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도울 뿐이지만 말씀을 받아서 전하는 사람은 교회에 도움을 줍니다. (5) 나는 여러분이 모두 이상한 언어로 말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할 수 있으면 더 좋겠습니다. 만일 이상한 언어를 해석해 주는 사람이 있어서 그것이 교회의 이익이 된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다면 이상한 언어로 말하는 사람보다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사람이 더 위대합니다. (6) 형제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가서 이상한 언어로 말한다고 하더라도 만일 어떤 계시나 지식이나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이나 가르침을 전해 드리지 못한다면 내가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7) 피리나 거문고 같은 생명 없는 악기도 소리는 납니다. 그러나 악보대로 분명하게 연주하지 않으면 무슨 곡이 연주되고 있는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8) 또 나팔 부는 사람이 분명한 소리를 내지 않으면 누가 전투준비를 하겠습니까? (9) 이와 같이 여러분도 이상한 언어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한다면 그것이 무슨 말인지 누가 알겠습니까? 결국 여러분은 허공에다 대고 말하는 셈입니다. (10) 세상에는 갖가지 말이 있지만 뜻없는 말은 하나도 없습니다. (11) 그런데 내가 어떤 말의 뜻을 알아듣지 못한다면 그런 말을 하는 사람과 나는 서로 외국인입니다. (12) 성령의 선물은 여러분이 갈망하는 것이니 되도록 풍성하게 받으십시오. 그러나 그것은 교회를 돕는 것이어야 합니다. (13) 그러므로 이상한 언어로 말하는 사람은 그것을 해석하는 능력까지 얻으려고 기도하십시오. (14) 만일 내가 이상한 언어로 기도한다면, 기도하는 것은 내 심령뿐이고 내 이성은 작용을 하지 않습니다. (15)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나는 심령으로 기도하는 동시에 이성으로도 기도하겠습니다. 나는 심령으로 찬미의 노래를 부르는 동시에 이성으로도 찬미의 노래를 부르겠습니다. (16) 만일 여러분이 심령으로만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면 그 집회에 참석한 보통 교인들은 당신이 말하는 것을 알아듣지 못할 터이니 어떻게 그 감사의 기도 끝에 “아멘” 하고 응답할 수 있겠습니까? (17) 여러분은 훌륭하게 감사의 기도를 드리지만 남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18) 나는 여러분 중 어느 누구보다도 이상한 언어를 더 많이 말할 수 있다는 것을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19) 그러나 교회에서 남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이상한 언어로 일만 마디의 말을 하느니보다는 차라리 내 이성으로 다섯 마디의 말을 하고 싶습니다. (20) 형제 여러분, 생각하는 데는 어린아이가 되지 마십시오. 악한 일에는 어린아이가 되고 생각하는 데는 어른이 되십시오. (21) 율법서에 “‘내가 이상한 언어를 말하는 자들의 혀와 외국인의 입술을 빌어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그들은 끝내 내 말을 귀담아 듣지 않으리라.’ 주께서 말씀하신다” 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22) 그러므로 이상한 언어는 믿는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에게 보여 주신 하느님의 능력의 표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받아 전하는 것은 믿지 않는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믿는 사람에게 보여 주신 하느님의 능력의 표입니다. (23) 만일 온 교회가 모여서 저마다 이상한 언어로 말하고 있을 때 보통 교인이나 믿지 않는 사람들이 그 자리에 들어온다면 그들은 여러분을 보고 미쳤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24) 그러나 모두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고 있을 때 믿지 않는 사람이나 보통 교인이 그 자리에 들어온다면 그 사람은 모든 사람이 하는 말을 듣고 마음에 가책을 받아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고 (25) 마침내 자기 마음에 품은 비밀이 폭로 될 것입니다. 그러면 엎드려 하느님을 경배하며 “진정으로 하느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십니다” 하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26) 그러면, 형제 여러분,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이 함께 모일 때에는 찬송하는 사람도 있고 가르치는 사람도 있고 하느님의 계시를 말하는 사람도 있고 이상한 언어로 말하는 사람도 있고 그것을 해석하는 사람도 있을 터이지만 모든 것은 교회 발전에 도움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27) 이상한 언어를 말할 때에는 둘이나 많아야 셋이 차례로 말해야 하고 한 사람은 그것을 해석해 주어야 합니다. (28) 해석할 사람이 없을 때에는 교회 안에서는 그런 말을 쓰지 말고 혼자서 말하거나 하느님하고만 말하십시오. (29) 하느님 말씀을 받아서 전하는 사람도 둘이나 셋만 말하고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잘 새겨들으십시오. (30) 그러나 곁에 앉은 사람이 하느님의 계시를 받을 경우에는 먼저 말하던 사람은 말을 중단해야 합니다. (31) 그래야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이 차례로 다 말씀을 전하게 되어 모든 사람이 배우고 격려를 받게 될 것입니다. (32)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사람은 자기 심령을 자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33)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무질서가 아니고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의 모든 교회가 하고 있는 대로 (34) 여자들은 교회 집회에서 말할 권리가 없으니 말을 하지 마십시오. 율법에도 있듯이 여자들은 남자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35) 알고 싶은 것이 있으면 집에 돌아가서 남편들에게 물어 보도록 하십시오. 여자가 교회 집회에서 말하는 것은 자기에게 수치가 됩니다. (36) 하느님의 말씀이 여러분에게서 나왔다는 말입니까? 또는 여러분만이 하느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말입니까? (37) 자기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한다고 생각하거나 성령의 선물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내가 여러분에게 써 보내는 이 말이 주님의 명령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38) 이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의 말은 인정할 수 없습니다. (39)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은혜를 간절히 구하십시오. 그리고 이상한 언어를 말하는 것도 굳이 막지는 마십시오. (40) 다만 나는 여러분이 모든 일에 점잖게 또 질서 있게 처리해 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 갈라 5:22 ;

 

(갈라5:22) 성령께서 맺어 주시는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진실,(갈라5:23) 온유, 그리고 절제입니다. 이것을 금하는 법은 없습니다.

 

** 에페 4:1-6 ;

 

(에페4:1) 주님을 위해서 일하다가 감옥에 갇힌 내가 여분에게 권고합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불러 주셨으니 그 불러 주신 목적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2)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다하여 사랑으로 서로 너그럽게 대하십시오. (3) 성령께서 평화의 줄로 여러분을 묶어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신 것을 그대로 보존하도록 노력하십시오. (4)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며 성령도 하나입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당신의 백성으로 부르셔서 안겨 주시는 희망도 하나입니다. (5)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고 세례도 하나이며 (6) 만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계시고 만물을 꿰뚫어 계시며 만물 안에 계십니다.

 

** 갈라 3:12-15 ;

 

(갈라3:12) 율법은 믿음에 기초를 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은 다만 “율법을 지키는 자는 그것을 지킴으로 산다” 고 말합니다. (13) “나무에 달린 자는 누구나 저주받을 자다” 라고 성서에 기록되어 있듯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저주받은 자가 되셔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구원해 내셨습니다. (14)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이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이방인들에게까지 미치게 되었고 우리는 믿음으로 약속된 성령을 받게 되었습니다. (15) 형제 여러분, 세상의 관례를 들어서 말해 봅시다. 사람들이 맺은 계약도 한 번 맺은 다음에는 아무도 그것을 무효로 만들거나 무엇을 덧붙이거나 할 수 없는 것입니다.

 

** 1베드 3:8-9 ;

 

(1베드3:8) 끝으로 말합니다. 여러분은 모두 한 마음을 품고 서로 동정하고 서로 형제처럼 사랑하며 자비심을 가지고 겸손한 사람들이 되십시오. (9) 악을 악으로 갚거나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축복해 주십시오. 그러기 위해서 여러분이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하면 여러분은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성서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성서를 계속해서 묵상하면서 이런 성령의 은총을 계속해서 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공동체를 형성하는데 문제를 만나더라도 결코 놀라지 마시고 포기하지 마십시오.

 

3. 셋째로 두 가지를 말씀드립니다.

 

하나는 사도행전에 보면 사도들이 각각 다른 공동체를 방문하여 그들이 만난 어려움 앞에 격려하고 이들 공동체에게 “어렵지만 그런 어려움이 주님의 십자가를 함께 나누는 길”이라고 말한다. (사도14:22) 그들은 각 도시에서 신도들의 용기를 북돋우며 끝까지 믿음을 지키라고 격려하면서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온 마음을 다하여 믿음을 새롭게 하라고 격려해야 한다. 공동체를 방문하고 모임에 갈 때에 끝까지 싱싱한 믿음을 가지라고 격려해 주어야 한다. 삶의 전망을 지니라고 말해 주고, 동시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라고 격려한다. 그것이 우리의 첫째가는 일이 되어야 합니다. 격려해야 합니다. 때로는 우리가 절망하는 말을 듣는다. 성령의 열매를 맺도록 격려해 주어야 한다.

 

용서를 통해서 이 효경의 선물을 간직하는 것을 말씀드리고 끝내겠다. 우리는 첫째로 화해의 사도들입니다. 용서하고 또 다시 용서하여야 한다. 베드로 사도의 질문을 받고 예수님이 7번씩 70번 용서하라고 하신다. 이 말씀 후에 예수님은 빛을 탕감 받는 2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신다. 우리가 진정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여야 하는데 그 사랑은 항상 용서로 드러난다. 우리가 형제 자매를 용서하지 않는다면 사랑할 수 없다. 화해 없이는 사랑이 없다. 화해를 보면 사랑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있다. 훌륭한 남편과 훌륭한 아내 사이에도 마찬가지이다. 죄인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사제들 사이도 마찬가지다. 사제들 간에 용서와 화해 없이 사랑이 없다. 하느님은 우리가 착한 사람일 때에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죄인 일 때에 아낌없이 우리를 사랑해 주셨다. 우리는 우리의 한계를 느낀다. 우리는 선물을 받아야 하는 존재이다. 그래서 선물을 주시라고 기도해야 한다. 성령이 주시는 선물들은 우리의 한계를 깨닫게 해준다. 기도하고 침묵하고 우리 마음을 열지 않는 한 우리는 이런 선물을 받을 수 없다. 우리는 우리 힘으로 할 수 없지만 절대로 절망하지 말자. 나의 한계를 느낄 때에 기도하자. 하느님은 그 선물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하신다. 하느님이 주시고자 하는 선물이 무엇인지 안다면! 피정 날짜가 얼마 남지 않아서 파장의 분위기가 될 수 있다. 서로 대화하고 게임을 하는 것도 좋다. 동시에 주님의 사랑 안에서 평화롭게 머무르는 것은 더욱 좋다. 그렇게 하도록 서로 격려하자. 성모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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