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8일 (일)
(백) 부활 제5주일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성극ㅣ영화ㅣ예술

가톨릭 예술가 이야기: 박경리 데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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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08-14 ㅣ No.87

[백형찬의 가톨릭 예술가 이야기] (31) 박경리 데레사 (상)


자연을 노래하고 인간을 사랑한 문학계의 프란치스코, 박경리

 

 

지병이 있었지만 글쓰는 것은 소풍

 

박경리(데레사, 朴景利, 1926~2008)는 병에 대해 무감각했다. ‘인명재천(人命在天)’이라는 생각을 늘 갖고 있었다. 체하면 바늘로 손톱 밑을 찔러 피를 냈고, 감기 들면 뜰 안을 왔다 갔다 했다. 상처 나면 소독하고 밴드를 붙였다. 병원에 가기가 싫어 약도 안 먹었다. 박경리는 목숨에 연연하지 않았다. 원래 먹어야 하는 약이 많은데 모두 거부하고 오직 혈압약만 먹었다. 한 인터뷰에서 “살아보겠다고 날마다 약 먹고 병원 가고 하는 거, 내 생명을 저울질하며 사는 거 같아서 싫어”라고 솔직하게 말했다.

 

「토지」를 쓰기 시작하자 유방암에 걸렸다. 3시간에 걸쳐 수술했다. 그러고는 보름 만에 퇴원했다. 퇴원한 날부터 가슴에 붕대를 감고 다시 「토지」를 써 내려갔다. 박경리는 그때의 기분을 ‘소풍 가는 기분’이라 했다. 의사는 그 말을 듣고 어이없어했다. 전쟁 중에 남편은 행방불명되었고, 후에 아들도 죽었다. 가족이라고는 딸 하나밖에 없었다. 박경리는 딸의 결혼 문제를 심각히 생각했다. 자신이 언제 세상을 떠날지 모르기에 어서 딸을 결혼시키겠다고 마음먹었다.

 

폐에 종양이 생겼다. 설상가상으로 뇌졸중까지 왔다. 반신 마비 증세도 보였다. 병원에서 치료했으나 회복되지 않았다. 항암 치료도 거부하고 연명 치료도 거부했다. 정의채 몬시뇰은 박홍 신부와 함께 입원한 병원을 찾아가 마지막으로 병자성사를 주었다. 그렇게 해서 박경리는 82세를 일기로 흙으로 돌아갔다. 정 몬시뇰은 장례 미사에서 “자연을 노래하고 인간을 사랑했던 고인의 문학작품들은 상처 입은 우리 인간들에게 삶의 올바른 방향을 제시해주었다. 그런 점에서 고인을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과 견줄 수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대하소설 「토지」

 

‘박경리’ 하면 「토지」이다. 대하소설 「토지」는 “1897년의 한가위”로 시작해서 “외치고 외치며, 춤을 추고, 두 팔을 번쩍번쩍 쳐들며, 눈물을 흘리다가는 소리 내어 웃고, 푸른 하늘에는 실구름이 흐르고 있었다”로 끝을 맺는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를 거쳐 민족 해방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 소설은 동학농민전쟁, 을사늑약, 청일전쟁, 간도협약, 만주사변 등 근대사의 주요 사건이 줄지어 등장한다.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서 최참판댁의 흥망성쇠와 우리나라 민족사가 속속들이 펼쳐진다.

 

「토지」의 배경은 경남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와 만주땅 용정이다. 「토지」는 외할머니가 손녀에게 들려준 짤막한 이야기에서 영감을 얻어 쓴 것이다. “거제도 그 끝도 없는 넓은 땅에 누렇게 익은 벼가 그냥 땅으로 떨어지는데 수확할 사람이 없었어. 이유는 전염병인 호열자(虎列剌·콜레라)가 그곳 사람들을 죽음으로 데려갔기 때문이야.” 외할머니의 이야기는 박경리의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박경리는 “삶과 생명을 나타내는 벼의 노란색과 호열자가 번져오는 죽음의 핏빛이 젊은 시절 내내 나의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고 했다. 그 이미지를 글로 쓰기 위해 우리나라 지도를 펼쳤다. 그래서 찾아낸 곳이 바로 평사리 악양 들판이었다. 평사리 모습이 「토지」의 배경과 너무도 흡사해 작가도 놀랐다.

 

‘집필 기간 26년, 전집 20권, 원고지 4만여 장, 등장인물 700여 명, TV 드라마(KBS 1979년 한혜숙 주인공, 1987년 최수지 주인공/SBS 2004년 김현주 주인공), 영화(1974년 김수용 감독, 김지미·이순재 주연), 오세영 화백의 만화 「토지」, 청소년 「토지」, 영어·일어·프랑스어·중국어 등으로 번역’ 이것이 한국 현대문학의 찬란한 금자탑을 이룬 「토지」가 세운 놀라운 기록들이다.

 

박경리가 말했다. “어떤 사람이/ 「토지(土地)」를/ 초라하다 했다/ 맞는 말씀이다/ 「토지(土地)」는 매우 화려하지만/ 작가는 초라했다 … 역시 「토지(土地)」는 초라했다.”(박경리의 시 ‘토지(土地)’에서)

 

- 박경리 선생 가족사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박경리 선생, 남편 김행도씨, 친정어머니, 그리고 맨 아래 가운데 아이가 김영주씨다. 출처=「박경리 이야기」

 

 

훗날 사위가 된 김지하와 만남

 

1970년대 초, 어느 가을에 시인 김지하는 몇 사람의 문학인과 함께 성북동에 있는 소설가 김동리 집을 찾아갔다. 그런데 출타 중이었다. 그래서 가까운 곳에 있는 박경리 집으로 갔다. 그때가 「현대문학」에 박경리의 「토지」 1부가 발표된 때였다. 「사상계」에 정치풍자시 ‘오적(五賊)’을 써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김지하는 「토지」를 읽어서 박경리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박경리 집에는 모녀가 살고 있었다. 김지하는 후에 장모가 된 박경리에 대한 첫인상을 이렇게 적었다.

 

“역사 이야기가 나오자 식견이 보통 탁월한 것이 아니었다. … 경상도 전라도 지리산 등등 민감한 지역 문제들에 대해서도 막힘이 없었다. 화엄불교, 동학에도 해박했고 동서양 역사는 물론 한국 현대사까지 줄줄이 꿰고 있었다. … 나는 작가 중에 그렇게 똑똑한 사람을 태어나서 그때 처음 보았다.” 김지하 일행은 박경리 집에서 술을 많이 마셨다. 박경리는 그들을 보내며 또 놀러 오라고 했다. 김지하가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시는 위안

 

박경리는 범띠 해에 경남 통영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시각이 초저녁이었다. 박경리는 자신의 사주를 이렇게 이야기했다. “…술시라던가 해시라던가/ 아무튼 초저녁이었다는 것이다/ 계집아이의 띠가/ 호랑이라는 것도 그렇거니와/ 대낮도 아니고 새벽녘도 아니고/ 한참 호랑이가 용을 쓰는/ 초저녁이라/ 그 팔자가 셀 것을 말해 뭐하냐…”(박경리의 시 ‘나의 출생’에서)

 

통영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진주고등여학교로 진학했다. 4년제 여학교를 5년 다녔다. 1년간 휴학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동급생이 상급생이 되고 하급생이 동급생이 되는 ‘기묘한 학교생활’을 했다. 박경리는 이를 ‘동굴 천장에 매달린 박쥐처럼’이라고 했다. 외곬 성격에 소외감은 더욱 깊어졌다. 공부는 잘하지 못했으나 역사에는 흥미가 많았다. 그래서 독서를 ‘야욕스럽게’ 했다. 무엇이든지 읽었다. 그나마 학교생활을 지탱시켜준 것은 ‘시 쓰는 일’이었다. 아궁이 앞에서, 이불 속에서 매일매일 시를 썼다. 후에 박경리는 ‘견디기 어려울 때 시는 위안’이었다고 했다.

 

졸업 후에 통영 금융조합에 들어갔다. 그러다가 거제도 부잣집 아들이며 일본 중앙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한 사람을 만나 결혼했다. 결혼 후에는 남편의 직장이 있는 인천에서 살았다. 집 한편에 헌책방을 열었다. 그곳이 바로 인천 헌책방 거리로 유명한 배다리이다. 지금도 아벨서점을 비롯해 헌책방 몇 곳이 남아 있다. 박경리는 인천에서 살던 시절이 가장 행복했다고 말했다. 그 후, 서울가정보육사범학교(현 세종대)에 들어갔고 졸업 후에는 황해도 연안여중에서 교편을 잡았다. 6·25 전쟁이 일어나자 남편은 좌익으로 몰려 행방불명되었다. 박경리는 통영으로 피란 가서 양품점을 했다. 전쟁이 끝나자 서울로 올라와 은행과 신문사에서 일하며 글을 썼다.

 

 

스승 김동리

 

박경리가 스승으로 모신 사람은 김동리였다. 박경리는 김동리를 “부모가 저를 태어나게 했다면, 선생님은 작가로 저를 태어나게 하신 어버이십니다”(‘고 김동리 선생님 영전에’에서)라고 했다. 박경리는 자신의 시를 김동리에게 보여주었다. 여학교 친구가 다리를 놓아준 것이다. 시를 읽은 김동리는 “상은 좋은데 표현이 틀렸다”고 했다.

 

박경리는 상심했다. 이에 김동리는 “소설을 써보면 어떨까?”하고 권했다. 그래서 ‘불안지대’라는 단편소설을 써서 김동리에게 건넸다. 김동리는 소설의 제목을 ‘계산(計算)’으로 바꾸어 「현대문학」에 1회 추천했다. 당시 작가가 되려면 2회 추천을 받아야 했다. 다음 작품으로 ‘흑흑백백’을 써서 「현대문학」에 2회 추천되었다. 박경리는 비로소 작가로 등단했다. 그런데 김동리는 작품 제목뿐만 아니라 작가 이름까지도 바꾸었다. 본래 이름인 ‘박금이’를 ‘박경리’로 바꾼 것이다. 추천이 완료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들은 날, 불행하게도 아들이 불의의 사고로 병원에서 죽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3년 8월 13일, 백형찬(라이문도, 전 서울예대 교수)]

 

 

[백형찬의 가톨릭 예술가 이야기] (32) 박경리 데레사 (하)


백발의 박경리, 하느님을 절절히 바라보다

 

 

- 활짝 웃는 박경리. 박경리 유고시집에서

 

 

원주와 음악

 

박경리(데레사, 朴景利, 1926~2008)가 원주로 간다고 했을 때 주위 사람들이 말렸다. 그러면서 한해를 넘기기 힘들 것이라 했다. 그런데 원주에서의 삶은 그들의 말대로 되지 않았다. 아주 오랫동안 원주에서 살았다. 박경리가 원주에 내려온 이유 중 하나는 ‘어떠한 것에도 사로잡히지 않는 시간과 공간에서 남은 생애의 불길을 태워보겠다는 문학적 소망’ 때문이었다.

 

박경리가 고독한 싸움을 할 때 그를 위로해준 것은 음악이었다.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과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을 계속 틀어놓고 살았다. 음악을 들으며 울었고 음악을 들으며 의지를 다졌다. 박경리는 글쓰기를 일과 병행했다. “노동은 심신을 상쾌하게 해주고 또한 끝없는 생각 속으로 끌어들인다”고 했다. 글을 쓰다가 생각이 막히면 밖에 나가 풀을 뽑았다. 그러면 생각이 떠오르며 막혔던 것이 뚫렸다.

 

후배들이 원주에 있는 토지문학관을 찾아오면 농약을 치지 않고 키운 유기농 채소로 대접했다. 박경리는 과수와 채소에 비료·농약을 쓰지 않는 일과 쓰레기차에 쓰레기를 내다 버리지 않는 일, 이 두 가지를 원주에서 철저하게 실천했다. 쓰레기를 어떻게 처리했는지 스스로 밝혔다. “드럼통에 굴뚝 달린 소각 통에다 태울 것은 태우고 거름 될 것은 모두 땅에 묻고 빈 병, 깡통, 신문지 따위, 불에 타지 않는 은지(銀紙)나 자질구레한 쇠붙이 같은 것은 빈 커피통에 넣어 뚜껑을 닫고, 그렇게 해서 그런 것들이 모이면 고물 장수에게 넘겨준다.”(‘풍요의 잔해로 신음하는 대지’에서)

 

또한 박경리는 원주에서 시간에 구속받으며 살고 싶지 않아 시계를 착용하지 않았다. 6·25 전쟁 때 양식을 얻기 위해 시계를 풀어준 뒤로는 몸에 시계를 지녀본 적이 없었다. 서울에 있을 때 시간 약속이 있으면 사람들에게 시간을 물어보거나 라디오로 시간을 가늠했다.

 

- 원주 집 마당에 서 있는 박경리. 박경리 유고시집에서

 

 

일본에 대한 생각

 

박경리는 일본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시각을 가졌다. 일본은 본래 ‘틀과 본이 없는 나라’이며 ‘틀과 본을 빌려다 연마하고 변형하고 이용하는 기능에 능한 민족’이라 했다. 일본은 자기네 나라를 신국(神國)이라 하고, 신병(神兵)과 성전(聖戰)이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사람을 죽였다.

 

박경리는 일본이 그 ‘사슬을 끊을 기회’가 있었다고 했다. 그것은 천주교가 일본에 들어온 때였다. 소위 후미에(踏繪)에 의해 수많은 순교자가 나왔을 때였다. 후미에는 손바닥 크기의 나무나 놋쇠에 예수님이나, 성모님의 모습을 새긴 것이다. 후미에는 일본 천주교 신앙의 상징이면서 천주교 박해의 상징이기도 하다. 일본 막부는 천주교인을 색출하기 위해 마을 주민들을 모이게 해서는 후미에를 밟고 가라고 했다. 신자가 아닌 사람은 밟고 갔지만, 신자는 차마 밟지 못했다. 그런 사람들은 뜨거운 증기가 나오는 화산 온천 지옥으로 끌고 가 잔혹하게 죽였다.

 

이러한 후미에를 다룬 소설이 엔도 슈사쿠(遠藤周作)가 지은 「침묵」이고, 이를 영화로 만든 것이 리암 니슨 주연의 ‘사일런스’이다. 박경리는 한 일본 잡지 편집장과의 대화에서 일본을 이웃으로 둔 것은 우리 민족의 불운이라고 했다. 일본이 이웃에 피해를 주지 않을 때 우리는 같은 인류로서 손잡을 수 있을 것이라 했다.

 

 

특별한 인연들

 

박경리는 현대그룹을 창업한 정주영과 특별한 인연이 있었다. 정 회장의 타계 소식을 들었을 때 박경리는 정 회장이 소 떼를 이끌고 분단선을 넘어가던 모습이 생각났다. 그것은 ‘멋지고 장엄한 한 편의 드라마’였으며, 세계에 자랑스러운 ‘우리 민족 본연의 기상’을 보여주었다고 했다. 박경리는 자신을 정 회장에게 ‘신세 진 사람’이라고 했다. 현대가 설립한 문화일보에서 「토지」 5부를 연재해주었고, 현대에서 출판기념회도 후원해주었다. 또한 정 회장 부부가 원주까지 내려와 출판을 축하해주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더욱 잊지 못하는 것은 프랑스에서 열리는 「토지」 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에 올라왔다가 현대 사옥에서 정 회장을 만났던 일이다. 방문 목적은 출판기념회에 대한 감사 인사를 하러 간 것이다. 인사를 하고 일어서려니까 갑자기 정 회장은 여비에 보태쓰라고 돈을 쥐여주었다. 박경리는 엉겁결에 “저도 돈 많습니다”라고 하며 받지 않았다. 그렇지만 연로한 분을 무안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 그만 지고 말았다.

 

이화여대 총장과 문교부 장관을 지낸 김옥길이 세상을 떠났다는 뉴스를 보았다. 박경리는 한동안 멍했다. 김옥길이 경북 문경 고사리 마을에서 병 치료하고 있을 때 찾아간 적이 있었다. 모자를 쓰고 안경을 쓰고 지팡이를 든 그의 모습은 영락없는 간디의 모습이었다. 병이 나으면 함께 프랑스로 여행 가자고 약속도 했다. 박경리는 자신이 직접 지은 실크 윗도리를 선물로 드렸다. 찬 바람 불면 숲에 갈 때 입으라고 드린 것이다.

 

김옥길은 박경리의 「김약국의 딸들」과 「토지」의 애독자였다. 그것이 인연이 되었다. 박경리는 김옥길을 20년 가까이 친정 언니처럼 의지하며 지냈다. 사위 김지하가 체포되고 딸과 딸의 갓 태어난 아기와 자신이 정릉에서 외롭고 힘들게 살아가고 있을 때, 김옥길은 아이의 옷을 한 아름 안고 찾아왔다. 아이의 기를 죽이지 말라고 하면서 서울 근교 백화점, 식당 등을 데리고 다녔다.

 

 

세상을 만드신 하느님

 

박완서는 남편이 죽고 이어서 아들마저 죽었다. 그야말로 참척을 당했다. 박완서는 하느님을 부정했고, 회의했고 포악을 부렸고, 저주까지 했다. 세례받을 때 선물 받은 십자고상에 원망을 퍼부었고 내팽개치기까지 했다. 다섯 살 위였던 박경리가 박완서를 원주 집으로 불렀다. 후배를 위해 밤새 맛있는 국을 끓였다. 원주 집에 도착한 박완서와 박경리는 서로 껴안고 울었다. 선배는 후배의 등을 토닥이며 글을 써야지만 이겨낼 수 있다고 위로했다. 박완서는 선배가 끓여준 국을 맛있게 먹었다. 그러고는 다시 글을 쓰며 살아가겠다고 굳은 결심을 했다.

 

박경리는 가톨릭신문에 한편의 글을 기고했다. 그 글을 정의채 신부가 읽었다. 정 신부는 그 글이 너무 좋아 박경리에게 만나자고 연락했다. 박경리는 정 신부와 만나 “요즘 죽음에 대해 많이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정 신부는 도와주겠다고 했다. 그 후에 정 신부에게 가톨릭 교리를 공부했다. 교리 공부를 끝마치고 ‘데레사’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 후, 박경리는 가톨릭신문에 ‘눈먼 식솔’이라는 소설을 연재했다.

 

박경리의 신앙은 그의 유고 시집인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의 ‘우주 만상 속의 당신’에 잘 나타나 있다. 자신의 영혼이 의지할 곳 없어 항간을 떠돌고 있을 때, 뱀처럼 배를 깔고 갈밭을 헤맬 때, 생사를 넘나드는 미친 바람 속을 질주하며 울부짖었을 때 하느님은 산간 높은 나뭇가지에 앉아, 산마루 헐벗은 바위에 앉아, 풀숲 들꽃 옆에 앉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고 했다. 하느님께 진작 다가가지 못한 자신을 책망했다. 덩쿨을 헤치고 맨발로라도 하느님 곁으로 갔어야 했다고 고백했다. 이제 머리가 백발이 되어 겨우 도착하니 하느님은 아직도 먼 곳에 계신다고 했다. 그래도 하느님을 절절히 바라본다고 했다.

 

“당신께서는 언제나/ 바늘구멍만큼 열어주셨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살았겠습니까 … 천수(天水)를 주시던 당신/ 삶은 참 아름다웠습니다”(박경리의 시 ‘세상을 만드신 당신께’에서)

 

참고자료 : ▲ 박경리 「토지」 20(5부 5권). 마로니에북스. 2012 ▲ 박경리 「우리들의 시간」 마로니에북스. 2022 ▲ 박경리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마로니에북스. 2008 ▲ 박경리 「原州通信」 지식산업사. 1985 ▲ 박경리 「꿈꾸는 자가 창조한다」 나남. 1994 ▲ 박경리 「생명의 아픔」 마로니에북스. 2016 ▲ 김형국 「박경리 이야기」 나남출판. 2022 ▲ 가톨릭신문(2008.5.18.) ‘토지 작가 박경리 선생 위령미사 봉헌’ ▲ 가톨릭평화신문(2008.5.7) 정의채 몬시뇰 “故 박경리 선생은 현대의 프란치스코 성인” ▲ 동아일보(2013.5.31) 김지하 “박경리 선생처럼 똑똑한 작가는 처음” ▲ 중앙일보(2008.5.5.) 故 박경리 선생 “시련 없었다면 「토지」도 없어”

 

[가톨릭평화신문, 2023년 8월 20일, 백형찬(라이문도, 전 서울예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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